▲ 지난 88년 이씨와 어머니 박씨. | ||
이아무개씨의 아들이라고 주장하는 이재○씨(41)는 지난 7월19일 서울지방법원에 이씨를 상대로 친자확인소송을 제기했다. 서울에서 인테리어업을 하고 있는 이씨는 슬하에 1남1녀를 두고 있고 어머니인 박아무개씨 호적에 올라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이씨는 왜 40여 년의 세월이 흐른 뒤에야 ‘아버지를 찾겠다’고 나선 것일까. 이씨는 <일요신문>과 만나 “소송 제기나 언론 인터뷰를 꺼리기도 했다. 하지만 아버지 건강이 안 좋은 것으로 알려진 데다 연락마저 닿지 않아 뿌리 찾기를 더 이상 늦출 수 없다는 생각에 소송을 제기했다”고 배경을 밝혔다.
다음은 이씨와의 인터뷰 전문이다.
―소송 내기 전 부친쪽과 연락을 해봤나.
▲이민을 가기 직전에 알고 있던 연락처로 계속 해봤지만 연락이 안됐다. ○○씨(생부의 본가 둘째 아들)에게도 연락이 닿지 않았다. 변호사가 소송을 내기 전 회장실로 연락을 했는데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고 했다.
―‘○○’씨를 형이라고 부르는데.
▲○○씨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부친을 뵙기 전에 만나본 적이 있다. 고교를 졸업하고 신라호텔에 갔었는데, 집안끼리 잘 아는 후배가 ○○씨를 알고 있었고 마침 그 자리에 우연히 ○○씨가 있어서 서로 만나게 됐다. 당시 ○○씨는 내가 동생이라고 하니까 내 손과 다리를 살폈다. 그러더니 “우리 식구 맞네”라고 반가워했다. 이후 장충동 자택 연락처를 받았고 ○○씨와는 이민 가서도 가끔 연락하고 지냈다.
―아버지가 이씨라는 것은 언제 알았나.
▲어렸을 때는 어머니와 같이 살던 최아무개 회장이 아버지인 줄 알았다. 어려서부터 아버지 이름이 이아무개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어릴 때는 최 회장 이름이 이아무개인 것으로만 알았다. 초등학교 5학년 때 텔레비전을 보다가 최 회장이 (생부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그 다음부터는 최 회장에게 ‘아버지’라는 호칭을 쓰지 않았다.
―부친은 언제 처음 만났나.
▲고3 무렵부터 어머니가 이민을 결심했다. 나를 교육시키며 살기 위해선 이곳보단 미국이 좋다는 생각에서였다. 84년 10월쯤 미국으로 이민갔다. 이민을 가는 것이라 어머니가 이제 가면 언제 보겠냐는 생각에 아는 분의 중간역할로 이민 직전에 부자상봉을 주선했다.
―그 후 몇 번이나 만났나.
▲세 번쯤 만났다. 그 해 초여름쯤 부산 해운대 별장에서 한 번, 대구 한일호텔에서 한 번, 서울 조선호텔에서 한 번 이렇게 세 번 만났다. 처음 만났을 때 “이제 아버지가 누구라고 떳떳하게 말하고 다녀라”고 말씀하시며 당신의 이름이 새겨진 버클과 지갑을 주셨다. 대구에서는 혼자 내려가 부친과 둘이서 이틀 내내 있었다. 그때 이야기를 많이 했다. 할아버지 회장에 대한 얘기, 집안에 대한 얘기를 많이 들었다. 나중에 생각해보니 당시 부친의 처지가 딱하다는 생각이 들어 가슴이 아팠다. 당시 부친은 조부님의 엄명으로 서울에 올라오지 못했고, 가진 돈도 없으셨다. 서울에서 한 번 만났을 때도 몰래 올라오신 것이라고 들었다.
▲ 이씨가 아버지로부터 받았다는 버클과 지갑. 이씨는 여기에 아버지 이니셜이 새겨져 있다고 밝혔다. | ||
▲86∼87년 무렵부터 연락이 안됐다. 그 무렵 ○○씨의 장충동 연락처도 전화를 안 받았다. 대만으로 유학을 갔다고 하더라. 부친은 87년에 남미를 갔다가 귀국길에 LA공항에서 나에게 전화한 적이 있었다. 그게 마지막 통화였다. ‘시간 되면 보자’고 하셨는데 그때 다른 일이 있어서 뵙지 못한 게 마지막이었다.
―(이민을 갔다가) 귀국은 언제 했나.
▲92년도에 했다. 미국에서 인테리어일을 하면서 LA의 메리어트 호텔일도 하는 등 꽤 성과가 있었다. 그 회사가 한국 지사를 내면서 발령을 받아 귀국했다.
―A재벌쪽 일도 했다고 하던데.
▲내가 다니던 회사가 A재벌쪽 일을 했다. 그래서 하게 됐다. 할아버지 자택이나 현 회장 집, 계열사 공사 등도 했다. 물론 내가 누구라는 것을 말하지도 않았고, 할 이유도 없었고, 비즈니스로 한 것뿐이다.
―A회장 집 공사를 할 때 집안 식구들과 마주친 적은 있었나.
▲없었다.
―왜 이제야 아버지를 찾겠다고 소송을 제기했나.
▲부친이 재벌가 장남이라고 해서 소송을 내는 게 아니다. 돈을 떠난 문제다. 어렸을 땐 부친의 존재나 그런 문제가 중요하지 않았다. 하지만 나도 아이들을 키우다 보니까 호적에 조부의 이름을 찾아넣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국에서는 호적 개념이 없고 나 혼자였지만 그때도 아버지 이름 자리에는 생부의 이름을 써넣었다. 고교 졸업 후 아버지를 만났을 때 아버지가 “이제 주눅들지 말고 아버지 이름 을 말하고 다녀라”고 말씀하셨다. 일부러 떠들고 다닐 일도 아니고 내가 학생 때라 그런 문제에 집착하지 않았다. 하지만 아이들을 키우다보니 근본을 찾아야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게다가 아버지의 건강이 안 좋다는 소식도 들려 더 이상 (이 문제를) 늦출 수 없다는 생각이 들어서 서둘러 소송을 제기했다.
한편 강남에 11명의 직원을 둔 인테리어 회사의 사장인 이씨는 지난 3년간 여름휴가를 가본 적이 없었다고 했다. 일이 밀려 갈 수 없었다는 것. 적어도 “돈 때문에 아버지를 찾는 게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그는 “아버지에게 아이들을 보여주고 싶다”며 두 명의 아이 사진을 보여줬다. 사내아이는 아버지를 많이 닮아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