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왼쪽부터 노무현, 이회창, 정몽준 | ||
2002년 대통령선거에서 제기된 중심과제는‘제왕적 대통령 시대’를 막 내린다는 것이다. 대통령이‘선출된 황제’가 되는 한국의 정치문화는 만악(萬惡)의 근원이다. 측근정치, 세도정치, 대통령 가족과 친인척 비리 등 이 모든 폐단의 뿌리는 제왕적 대통령제다. 그래서 대통령 후보들은 예외 없이 나만은 결코 제왕이 되지 않겠다고 약속하고 있다. 우리는 이 약속을 믿어도 될까. 그러나 아직은 믿음이 가지 않는다.
‘제왕이 되지 않겠다’는 후보들의 합창은 귀에 익은 노래다. 이전 선거에서 들었던 것과 별로 다르지 않다. 그러니 신뢰도는 떨어진다. 제왕이 되지 않겠다는 공약 중 가장 비현실적인 건 민주당 노무현 후보의 공약이다. 그는 방송토론에서 “제왕적 대통령은 제도가 아니라 사람의 문제다. 대통령은 나라의 미래와 연결되는 문제, 20~30년 후의 나라를 생각하는 큰 것만 관장하고 일상적인 국정은 총리가 처리토록 하는 책임총리제로 운영하겠다”고 했다.
이게 가당키나 한 일인가. 이 나라 헌법은 대통령 중심제다. 대통령은 20년이나 30년 후의 한국이 아니라 오늘의 한국, 오늘의 국정을 책임 맡고 있다. 바로 오늘의 국정이 그에게 밀려드는데 그걸 총리에게 맡기고 큰 것만 챙긴다. 도대체 큰 것과 작은 걸 누가 가릴 것인가. 그걸 가린다 해도 국정분업이 가능할 것이라고 그는 믿고 있을까.
이회창 후보 역시 “3권 분립을 확실하게 정착시키고 대통령과 정당ㆍ의회의 관계를 정상화할 것”이라고 했다. ▲청와대 비서실 축소 ▲대통령 집무실 이전 ▲국무총리에 내각 통할권 부여 등이 그 내용이다. 그러면서 “대통령이 되면 국회에 직접 나가 국정을 설명하고 최선을 다해 국회를 설득할 것”이라고도 했다.
우리 헌법은 국무위원 제청 등 상당한 권한을 총리에게 부여하고 있다. 그러나 총리를 임명하고 갈아치울 수도 있는 권력은 대통령의 것이다. 그래서 총리의 장관 제청권도 실제론 유명무실하다. 장관들은 그들에 대한 임면 권한을 가진 대통령만 바라본다. 이 점에선 총리 역시 장관과 다를 게 없다. 그런데 총리가 내각을 다스릴 수 있을 것인가.
설혹 대통령이 그런 의지를 갖고 있다 해도 대통령 생각대로 되는 게 아니라는 걸 보여준 게 대한민국 정부의 권력운용 반세기가 보여준 경험의 진실이다. 그뿐 아니다. 총리에 전권을 주는 국정운영을 하겠다면서 국회에 나가 국정을 설명하고 국회의원 설득을 대통령 스스로 맡겠다는 건 모순이다.
제왕이 되지 않겠다는 공약에 그래도 가장 가까이 다가가 있는 게 정몽준 의원이 말하는 ‘중앙당 폐지’‘원내정당론’이다. 그러나 이 동네도 말만 그렇게 할 뿐 창당과정 등 실제로 나타나고 있는 정치행보는 ‘제왕의 길’을 닦고 있다.
예비후보들의 합창 중 비현실적이기는 측근정치, 친인척 비리 척결에 대한 공약도 마찬가지다. 폐단의 하나인 ‘가족과 친인척 비리’에 대해 후보마다 “나는 절대로 없도록 하겠다”고 약속하고 있다.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나 민주당 노무현 후보, 둘 다 이 문제의 접근방법도 닮아 있다.
▲ 왼쪽부터 박철언, 김현철, 김홍업 | ||
친인척 비리라는 게 감찰기능이 없어서 일어난 일인가. 이 대명천지에 대통령 친인척이 하는 일이라고 사정기관의 눈밖에 있는 게 아니다. 가족, 친인척의 권력남용이나 비리는 즉시 당국에 포착된다. 그 사례를 살펴보자.
노태우 대통령 시대 박철언 특보가 권력을 행사하기 시작하던 초기의 일이다. 당시 민정비서실의 김옥조 비서관은 박철언 특보가 너무 많은 일에 개입하고 있다는 사실들을 알게 됐다. 이래서 부당한 권력행사에 대한 사례를 수집, 정리해 보고서를 만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 보고서를 대통령에게 제출했다. 그런데 며칠 후 박철언 특보가 전화로 자기 방에 들르라고 했다. 갔더니 그가 작성해 대통령에게 제출한 보고서가 거기 있었다. 박 특보는 김 비서관에게 보고서를 들어 보이면서 “쓸데없이 이런 건 왜 작성해 올리느냐. 더 이상 이런 번거로운 일은 하지 말자”고 말하더라는 것.
대통령에게 올린 보고서가 표적이 된 당사자에게 넘어가는 형편인데 누가, 어떤 기구가 이 실세를 견제하고 다스릴 것인가. 노태우 시대 박철언 특보는 그 이후 ‘황태자’로 ‘떠오르는 별’로 거침없이 잘 나갔다.
김영삼 대통령 때 박관용 비서실장은 대통령의 차남 김현철씨에 대한 얘기를 대통령에게 건의했던 일이 있었다고 했다. 그런데 곧바로 김현철씨가 그런 건의를 알고 박 실장에게 전화를 걸어 ‘어떻게 나한테 그럴 수 있느냐’고 했다던가.
친인척 관리에서 가장 모범을 보인 대통령이 박정희 대통령이다. 그런데 그도 손을 못쓴 게 하나 있다. 딸인 박근혜에 대한 다스림이다. 육영수 여사 별세 후 퍼스트 레이디 역을 맡은 박근혜에게 한 종교인이 접근해 이런저런 일들을 도모했다. ‘안되겠다’고 판단한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은 방대한 보고서를 만들어 대통령에게 내밀었다.
박 대통령은 딸의 주의를 환기했지만 ‘터무니없는 모함’이라는 항변만 들었다. 대통령은 이런 일이 있은 후 당시 청와대 사정수석 신두영씨에게 자신의 고충을 털어놓았다고 한다. 신씨는 박근혜가 울면서 항변한 이 사건에 대해 “박 대통령도 따님에 대해선 마음 약한 아버지였다. 자랄 때 아버지 노릇을 제대로 못했다는 자책감을 지니고 있던 박 대통령은 아이들에게 평범한 아버지보다 엄격함이 더 모자란 것 같았다”고 술회했다.
대통령 가족, 친인척의 비리, 측근의 발호 등 세도정치를 근절하는 길은 대통령을 제왕의 자리에서 내려앉게 하는 일이다. 그 일을 누가 해야 하는가. 말할 것도 없이 그 일은 국회와 정당의 몫이다. 대통령에 대한 국회의 견제기능이 작동하는 정치, 그 길을 제시하는 게 현실적 공약이다.
홍민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