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청원 공동선대위원장이 지방선거 마지막 유세일인 지난 3일 서울 청계광장에서 유권자들에게 정몽준 새누리당 서울시장 후보에 대한 지지를 호소하고 있는 모습. 최준필 기자 choijp85@ilyo.co.kr
‘12대 5’
지방선거 전날인 지난 6월 3일 새누리당 싱크탱크 여의도연구원 관계자가 밝힌 자체 판세였다. 해당 자료에 따르면 새누리당은 경북·대구·울산·경남·제주 5곳에서만 승리가 유력한 것으로 나타났다. 수도권 전 지역은 물론 텃밭인 부산을 내주고 경합 지역으로 분류됐던 충북과 강원에서까지 패하는 충격적인 결과였다.
당시 여의도연구원 관계자는 “막판 지지율이 상승 기미를 보이긴 했지만 여론조사 결과는 참담하다”며 “이대로라면 박 대통령이 국정 방향을 전면적으로 틀어야 할 것이다. 또 새누리당은 제2의 창당까지 각오해야 할 것”이라고 걱정했다.
막상 투표함을 열자 여권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승산이 희박한 것으로 점쳐졌던 인천을 필두로 경기와 부산까지 승리했기 때문이다. 윤상현 새누리당 사무총장은 5일 “경기와 부산이 마지노선이었다. 여기에 인천을 탈환해 선방했다”고 자평했다.
권대우 정치평론가는 “서울의 경우 박원순 인물론에 의해 새정치민주연합이 승리할 수 있었다. 수도권만 놓고 보면 새누리당이 새정치연합을 누른 셈”이라고 설명했다. 여기에 새누리당은 기초단체장 226곳 가운데 절반 이상인 117곳을 차지하며 새정치연합(80곳)을 압도했다. 오히려 지난 2010년 지방선거 때인 82곳보다 35곳이나 더 늘어났다.
이러한 결과에 대해 정치권에서는 다소 의외라는 반응이 주를 이룬다. 새누리당이 완패할 것이란 전망이 압도적으로 많았던 까닭에서다. 세월호 참사 수습 과정에서 드러난 정부의 무능함으로 인해 민심이 싸늘했고, 선거 후반 야권 단일화가 곳곳에서 이뤄지며 새누리당은 고전을 면치 못했다.
60%대를 유지하던 박근혜 대통령 국정 지지율이 40%대까지 추락한 가운데 야권이 박근혜 정부 중간평가론을 들고 나왔다는 점도 새누리당으로선 부담이 될 수밖에 없었다. 집권 여당이 대부분 지방선거에서 좋지 못한 스코어를 기록했던 과거 사례는 거론할 필요도 없이 제반 조건 자체가 불리했다.
그러나 새누리당엔 ‘선거의 여왕’이 있었다. 위기에 빠진 박근혜 대통령은 직접 국민 앞에 나와 눈물을 흘렸다. 또 지난 2012년 대선 당시 불협화음을 내며 껄끄러운 사이로 알려진 안대희 전 대법관을 총리 후보자로 내세웠다. 박 대통령의 ‘안대희 카드’는 수포로 돌아갔지만 국면을 반전시키는 데는 효과가 있었다는 평이다.
김무성 공동선대위원장은 부산지역에서 선거 사흘을 앞둔 지난 1일 ‘도와주세요’가 적힌 피켓을 들고 1인 유세를 하기도 했다. 사진출처=서병수 홈페이지
새누리당도 선거 막바지에 접어들면서 ‘박근혜’ 이름 세 글자를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선거 초·중반엔 찾아보기 힘들었던 이른바 ‘박근혜 마케팅’을 꺼내든 것이다. 새누리당 의원들은 계파를 떠나 “박 대통령에게 한 번만 더 기회를 달라”고 읍소했다. 당 중진 의원들은 전국 주요 도시에서 ‘도와 달라’는 피켓을 들고 1인 유세를 하기도 했다.
야권은 “박 대통령을 선거에 끌어들이려는 치졸한 전략”이라며 이를 깎아내렸다. 이에 대해 한 친박 의원은 “솔직히 새누리당이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박 대통령에게 기댈 수밖에 없지 않느냐”고 하소연하면서 “특정인에 대한 지나친 의존이 새누리당의 한계일 수 있지만 이런 정치인을 갖고 있다는 건 정당의 최대 강점이기도 하다”고 덧붙였다.
여권에선 이번 지방선거 결과로 인해 청와대 우위의 당·청 관계가 당분간은 지속될 것이란 관측을 내놓고 있다. 세월호 정국에서 청와대에 대한 불만이 폭발 일보 직전까지 갔지만 어느 정도 진화될 것이란 얘기다. 오히려 지방선거 일등공신이라고 할 수 있는 박 대통령의 당 장악력이 높아질 것이란 추측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청와대 정무 관계자는 “국민들이 다시 한 번 박 대통령에게 재량권을 준 것으로 판단하고 겸손한 자세로 국정에 임할 것”이라면서 “정치적으로 봤을 때 이탈 기미가 보였던 친박이 단일대오를 이루게 되는 계기가 될 수 있다”고 기대했다.
당에 대한 박 대통령 입지 강화, 친박 재결집은 오는 7월 14일 열리는 전당대회에도 영향을 미칠 전망이다. 새누리당은 이번 전대에서 향후 2년간 당을 이끌 대표와 최고위원 4명을 선출해 차기 지도부를 구성한다. 친박 서청원 의원 대 비박 김무성 의원의 ‘맞장’이 유력시되고 있는 전대 결과에 따라 향후 당·청 관계는 물론 여권의 권력지형 재편은 불가피하다. 차기 대권 구도 역시 전대가 중요한 터닝 포인트가 될 것으로 보인다. 비박과 친박 간 사활을 건 진검승부가 예고되는 대목이다.
이런 가운데 지방선거에서의 선전은 친박 후보에게 힘을 실어주는 요인이 될 것이란 게 정가의 중론이다. 앞서의 친박 의원 역시 “패배가 유력시됐던 인천과 부산에서 박 대통령 최측근인 유정복과 서병수가 당선됐다”며 “최근 주춤했던 친박의 존재감이 부각될 것이고 이는 전당대회까지 이어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사실 선거 전만 하더라도 비주류의 전폭적 지지를 받는 김 의원이 차기 당권 레이스에서 다소 앞서나가는 것 아니냐는 주장들이 많았다. 새누리당이 패할 경우 ‘친박 책임론’이 제기될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이다. 비주류로 꼽히는 정의화 의원이 국회의장 경선에서 친박계가 공공연히 밀었던 황우여 전 대표를 꺾자 이러한 기류는 더욱 확산됐다.
지방선거 이후 전당대회 판세는 조금 달라진 모양새다. 김 의원이 친박 좌장 서 의원을 상대하기가 버거울 것이란 말까지 나온다. 윤호석 정치평론가는 “서 의원이 박 대통령의 국가개조를 뒷받침할 강력한 집권 여당을 만들겠다는 메시지를 들고 나올 경우 1위를 차지할 가능성이 높다”고 주장했다.
서 의원 측 관계자도 “박 대통령과 차별화를 하겠다는 후보와 박 대통령을 적극적으로 돕겠다는 후보 중 대의원들이 누구를 선택하겠느냐”고 되물었다. 서 의원 측은 지방선거에서 박 대통령이 기회를 한 번 더 얻은 만큼 ‘당심’ 역시 친박 후보에게 표를 던져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는 전언이다.
김 의원 측은 지방선거 결과가 전대에까지 미칠 것이란 전제 자체에 대해 부정적이다. 수도권에서 이기긴 했지만 충청권에서 모두 패했으니 여야 어느 쪽도 승리를 얘기하기 힘든 것 아니냐는 설명이다. 김 의원의 측근으로 통하는 한 의원은 “만약 이번 선거에서 부산을 내줬으면 어떨 것 같으냐. 수도권 승리는 묻혔을 것이다. 공치사를 하자면 부산의 오거돈 돌풍을 막아낸 김 의원이 일등공신일 것”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부산지역 선대위원장이기도 한 김 의원은 부산에 거의 상주하면서 줄곧 뒤지던 서병수 후보의 역전승을 일궈낸 주역으로 꼽히고 있다. 김 의원은 선거를 사흘 앞둔 6월 1일엔 ‘도와주세요’가 적힌 피켓을 들고 1인 유세를 하기도 했다. 이에 대해 서 의원 주변에선 “새누리당 텃밭인 부산에서 그 정도 경합을 벌였다는 것 자체는 패배나 다름없지 않느냐”며 김 의원 활약상을 폄하하는 분위기가 감지된다. 서병수 후보(50.7%)와 무소속 오거돈 후보(49.3%)의 표 차이는 불과 1.4%포인트였다.
오히려 서 의원 측은 수도권 승리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한다. 공동선대위 좌장 역할을 맡으며 주로 수도권 유세를 이끌었던 서 의원이 인천·경기 승리로 당을 구해냈다는 것이다. 서 의원과 가까운 또 다른 친박 의원은 “서 의원이 야당보다 빨리 ‘세월호 특별법’을 발의하는 등 선거 진두지휘를 잘했다는 평을 받고 있다. 이번 지방선거에서만큼은 김 의원보다는 서 의원이 훨씬 빛났다”고 치켜세웠다.
동진서 기자 jsdong@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