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일 창원의 한 공장 방문 도중 탄핵안 가결 소식을 들은 노무현 대통령이 굳은 표정을 짓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 ||
탄핵소추안에 대한 법률적 판단은 헌법재판소가 맡겠지만, 이미 총선에 재신임을 연계한 노 대통령에겐 ‘총선 시험대’를 통과하는 것이 당면과제. 헌재 판결 역시 총선 결과에 연동될 가능성이 많은 만큼 노 대통령측으로선 일단 4월15일 이후는 아예 생각하지도 않겠다는 분위기다.
‘식물 대통령’이 된 노 대통령의 입지는 현재까진 그리 나빠 보이진 않는다. 각종 여론조사에서 예외없이 ‘탄핵 반대’가 70%를 상회하는 데다, 12일 탄핵안 표결 당시 소속 의원들이 국회 본회의장에서 ‘내동댕이쳐지는’ 수모를 당한 열린우리당도 지지율이 40%대로 급등해 ‘표정 관리’에 여념이 없기 때문이다. 일부에서는 심지어 이 모든 결과를 ‘음모론적’으로 해석해, “노 대통령과 여권 핵심부가 탄핵안 가결을 방조했다”는 주장까지도 나오고 있는 상황이다.
그러나 위와 같은 긍정적 신호에도 불구하고 총선 때까지 정국이 지금 페이스대로 흘러가리라 예단하기는 이르다. 그만큼 노 대통령의 운명 역시 불투명하다. 과연 ‘승부사 노무현’은 이번에도 탄핵이라는 위기를 전화위복의 계기로 만들 수 있을까. 성패를 가를 변수들을 점검해 봤다.
1. 급변한 총선 상황
‘노무현의 부활=열린우리당 총선 승리’라는 등식을 감안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선거 구도다. 탄핵 정국 이전까지만 해도 총선 구도는 열린우리당을 한편으로 하는 ‘친노’(親盧)와 한나라당과 민주당, 자민련 등 세 야당을 망라하는 ‘반노’(反盧)가 제도 정치권을 중심으로 맞서는 형태였다. 이전 총선처럼 지역구도를 축으로 각 정당·후보간 ‘인물 대결’ ‘정책 대결’이 부분적으로 ‘긍정적 기제’가 되어 작용할 것이란 게 일반적인 예상이었다.
그러나 탄핵으로 상황은 완전히 달라졌다.
“사상초유의 TV로 생중계된 쿠데타”(열린우리당 정동영 의장)라는 국회 본회의 탄핵안 가결 과정이 군사정권 종식 이후 잊혀졌던 ‘민주 대 반(反) 민주’의 대립구도를 되살렸기 때문이다. 김영삼(YS)-김대중(DJ)정권은 물론 노무현 정권도 예외없이 ‘보수정권’으로 규정지으며 비판의 날을 세워 온 시민단체와 민중운동세력들이 열린우리당과 함께 ‘탄핵 반대’ 대열에 동참한 것이다. 개혁세력의 지지를 놓고 열린우리당과 경쟁관계에 있는 민주노동당의 핵심기반인 민주노총도 여기에 포함된다. 탄핵반대 운동의 주도체인 ‘탄핵반대와 민주수호를 위한 범(汎) 국민행동’에는 무려 5백50개 단체가 망라됐다.
여권은 비록 ‘맹아적 형태’이긴 하지만 탄핵반대의 움직임이 ‘시민 저항’의 양상으로 발전하고, ‘민주 대 반민주’ 구도가 계속 이어질 경우 총선승리는 필연이라고 여기는 분위기다. 민병두 열린우리당 총선기획단 부단장은 “노 대통령 취임 3∼4개월 만에 비노(非盧)로 돌아섰던 참여연대 등 2백여 개 시민단체들이 탄핵안 가결에 반대하고 있는 것은 남다른 의미가 있다. 헌재 결정 때까지 광화문 촛불시위 등이 확산될 것이다”고 밝혔다.
그러나 ‘탄핵 후폭풍’에 주춤거리는 3야(野) 등 보수세력들이 대반격에 나서 ‘친노 대(對) 반노’ 구도가 그려지면 판도는 달라진다.
야권은 이번 총선을 16대 대선의 재판(再版)으로 끌고 가겠다는 구상이다. “지금 상황은 진보세력의 가면을 쓴 노무현 정권과 사회단체를 위장한 급진세력이 한 깃발 아래 결탁, 중도보수 세력을 파괴하려는 절체절명의 위기다. (17대 총선은) 우리가 원하든 원치 않든 친노-반노간 사생결단적 전쟁이 될 것이다”는 한나라당 최병렬 대표의 주장이 야권의 구상을 가감없이 보여준다.
▲ 13일 광화문에 모인 탄핵반대 시민들. 임준선 기자 kjlim@ilyo.co.kr | ||
2. 호남 민심의 향방
총선 구도의 중요성은 자연스레 호남 민심의 향배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진다. 열린우리당과 민주당이 반분하던 호남 민심이 탄핵을 계기로 전자로 집중된다면, 직·간접적 효과가 예상하기 어려우리만큼 크기 때문이다. 민주당에 밀려 온 호남에서의 우위는 물론 ‘수(數)의 우위’와 ‘특유의 응집력’으로 수도권 50∼60개 지역구의 승패를 갈라 온 호남 출신 유권자들을 ‘내 편’으로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일부에선 수도권 호남 유권자들의 동향에 따라 열린우리당과 민주당 후보간의 연대도 가속화되리란 전망도 나온다.
실제 탄핵정국 돌입 이후 호남권의 움직임은 여권에 이 같은 희망을 품게 만들기에 충분하다. 강현욱 전북지사가 11일 민주당을 탈당하고, 열린우리당 입당을 선언한 데 이어 15일에는 박태영 전남지사가 역시 같은 행로를 밟았다. 구속중인 박광태 광주시장을 제외하면 호남권 광역단체장들이 모두 열린우리당 소속이 된 것이다. 여기에 윤동호 전남 강진군수 등 기초자치단체장과 분당 이후 민주당에 입당한 조순용 전 청와대 정무수석과 고재방 전 청와대 제1부속실장, 박준영 전 청와대 공보수석 등 김대중 전 대통령(DJ)의 ‘총신’(聰臣)들도 탄핵반대의 뜻으로 탈당 대열에 동참한 상황이다.
저변의 호남 민심은 더욱 급변 양상이다. <문화일보>-TNS조사(12일)에 따르면 호남에서 탄핵안 가결이 ‘잘된 일’이라는 평가는 민주당 지지층의 절반에도 못 미치는 15.5%에 불과했다. 이는 민주당 핵심 지지자들의 현안 인식과 호남 민심 간의 괴리가 커져가고 있음을 단적으로 보여줬다는 해석이다. 호남에서의 정당지지도도 열린우리당은 전국에서 가장 높은 60.5%를 기록한 반면, 민주당은 21.6%에 머물렀다. 그동안 열린우리당과 민주당 사이에서 고민하던 호남 유권자들이 이번 탄핵안 가결을 계기로 확실히 전자로 돌아섰다는 해석이 가능한 지표라 하겠다.
그러나 여권에 긍정적인 방향으로 분위기가 바뀌었다 해서 아직 ‘호남 민심=열린우리당’이라 단정하기는 어렵다. 민주당엔 여전히 지역 민심에 큰 영향을 미치는 DJ 장남 김홍일 의원과 ‘리틀 DJ’ 한화갑 전 대표 등이 버티고 있다. 아직도 민주당에 기운 듯한 인상을 주고 있는 DJ의 향후 행보도 변수다. 여기에 당 존립 여부가 달린 ‘텃밭’인 호남을 방어하려는 민주당의 의지 역시 녹록지 않은 것도 전망을 불투명하게 만드는 요인이다.
▲ 지난 12일 탄핵안 가결 후 고건 총리가 임시국무회의를 주재하기 위해 정부청사에 나왔다. | ||
노 대통령의 향후 행보, 특히 열린우리당과의 관계 설정도 정국 기상도를 좌우할 변수다. 특히 노 대통령이 11일 기자회견에서 총선결과와 자신의 재신임을 연계지을 것임과, ‘3월 말, 늦어도 4월 초 열린우리당 입당’을 공언한 터라 약속이행 여부에 관심이 모아진다. 회견 다음날 바로 직무정지 상태에 들어가 행동반경이 대폭 줄어든 만큼, 노 대통령이 ‘상황 변화’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것인가, 아니면 특유의 ‘정면돌파’ 스타일대로 기존 구상대로 밀어붙이느냐의 문제다.
여권 내 전반적인 기류는 일단 열린우리당 입당을 총선 후로 늦추고, 정치행보를 자제해야 한다는 쪽이다. 헌법재판소가 탄핵안에 대한 심리를 진행중이고, 특히 선거법 위반이 쟁점인 만큼 자칫 입당 문제가 부정적 영향을 줄 우려가 있다는 이유에서다. 그러면서 ‘총선 후 입당’에 대한 동조세력도 늘었다. 애초 정동영 의장 측근에서 거론하던 것인데, 탄핵안 가결 전까지 ‘조기 입당론’에 섰던 김근태 원내대표, 김정길 상임중앙위원 등에게로까지 범위가 확대됐고, 노 대통령 측근들도 비슷한 입장이다. 김 원내대표는 “지금은 국민 불안감을 진정시키는 게 더 중요하다. 대통령 입당도 시간을 두고 생각할 문제가 됐다”고 했고, 김 위원은 “노 대통령 지지-반대세력이 탄핵으로 인해 분명해진 데다 야당에 공세의 빌미를 줄 수 있는 만큼 탄핵정국 종료 후 입당하는 것이 좋겠다”고 가세했다.
노 대통령의 386 한 핵심측근은 아예 “탄핵정국에서의 입당 논의 자체가 마이너스며, 얼마 전 노 대통령과 전화통화하면서 ‘입당문제는 당분간 잊으시라’고 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노 대통령이 이 같은 의견을 수용하기가 그리 쉽지는 않아 보인다. 자신이 탄핵까지 감내하면서 구도를 만들어온 총선에서 손을 떼기가 간단치 않은 데다 ‘탈(脫) 노무현’의 방향성을 갖고 총선을 자기 주도하에 치르고 싶어하는 정동영 의장과의 갈등이 여전하기 때문. 여기에 이미 총선과 재신임을 연계하겠다고 밝힌 터에 자신의 운명을 결정짓는 중대사에 손 놓고 있을 수는 없다는 노 대통령 특유의 ‘정면돌파형’ 결론을 내릴 가능성도 적지 않다.
4. 야권 ‘고건 띄우기’
마지막으로 고건 총리가 대통령 권한대행으로 이끌고 있는 과도체제와 야권의 관계 설정도 눈여겨 봐야 할 대상이다. 우선 고 총리가 사상초유의 대통령 직무정지 상태를 무난히 이끌어갈 경우 노 대통령 ‘복귀’에 대한 요구는 그만큼 줄어들 수밖에 없다. 특히 대통령 탄핵을 계기로 개헌을 통해 안정적 권력분점을 추진중인 야권이 고 총리 과도체제가 순항할 경우 ‘새로운 그림’을 만들려 할 것이란 예상도 나온다. 민주당 정균환 전 원내총무 등이 주장해온 ‘고건 대안론’을 지금 시점에서 주목해야 한다는 주장도 정치권 여기저기서 거론되고 있는 상황이다.
여기에 과도체제의 중심인 고 총리와 이헌재 경제-안병영 교육 부총리가 모두 노 대통령과 이른바 ‘코드’가 맞지 않은 인물이라는 점도 여권 내에서 ‘혹시나’하는 우려를 갖게 하는 부분이다. 이들은 스타일로나 이제까지의 경력으로나 노 대통령과 다른 ‘부류’란 평가를 받아 왔고, 입각 이전까지 노 대통령에 비판적인 입장을 공·사석에서 밝히기도 했던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게다가 이들 3인은 모두 우리 사회에서 기득권의 상징인 경기고 선후배 지간이다. 38년생인 고 총리는 56년에, 41년생인 안 부총리는 59년에, 그리고 44년생인 이 부총리는 62년에 각각 경기고를 졸업했다.
이준원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