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근 주가가 치솟고 있는 소녀배우 문근영의 외가가 ‘시대의 아픔’을 직접 겪은 장기수 집안인 것으로 확인됐다. 사진은 지난 3월 영화 <어린신부> 기자간담회. | ||
장기수 류낙진씨 일가에 대한 아픈 가족사는 광주 지역의 재야계에서는 어느 정도 알려진 내용이었다. 특히 류씨의 아내이자 숨진 영선씨의 형수가 되는 신애덕 여사(73)의 지나온 50여 년 세월은 한 편의 영화 시나리오로 손색이 없을 정도. 그녀는 지난 1971년 보성의 중학교 교사였던 남편 류씨가 ‘통혁당 재건사건’으로 고정간첩으로 몰려 구속된 이후, ‘빨갱이 가족’이라는 따가운 시선 속에서도 남편을 대신해서 시장 행상과 보험 외판원 등으로 어린 시동생 두 명과 네 남매를 교육시켰다.
그러던 80년 ‘광주 사태’ 당시 자식과 다름없는 시동생 영선씨를 잃었고, 역시 경찰에 연행돼 간 큰딸(문근영의 큰이모·당시 조선대 재학)과 막내아들(당시 고교생)의 생사를 확인하는 과정에서 심한 고초도 겪어야 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런 신 여사가 최근 문근영의 외할머니로 매스컴에 이따금씩 등장하면서 광주의 재야계에서 조심스레 “문근영이 장기수 류씨 일가의 외손녀”라는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다. 외할머니 신 여사는 광주에서 공무원 생활을 하고 있는 문근영의 부모를 대신해 촬영장을 일일이 쫓아다니며 외손녀의 뒷바라지를 해주는 사실상의 ‘매니저’ 역할을 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문근영 또한 이런 외할머니에 대한 사랑이 각별한 것으로 전해졌다.
특히 문근영이 최근 연기활동 등으로 벌어들인 수입금 대부분을 어려운 이들을 돕기 위한 성금으로 기부하고 있고, 또한 북한 동포 돕기 운동에도 나서는 등 선행이 잇따르자 류씨 일가를 잘 아는 주변에서는 “역시 할아버지 할머니의 영향이 컸다고 본다. 남들보다 더 아팠던 만큼 남들보다 더 반듯해야 한다는 가정교육 때문인 것 같다”라고 말하고 있다.
실제 문근영은 고향인 광주시에서 인재 양성을 위해 운영중인 ‘빛고을장학회’에 2천만원을 기탁한 것을 비롯해 사회복지공동기금 성금 1천만원, 광주국제영화제 성금 1천만원, MBC <느낌표> 순천 ‘기적의 도서관 짓기’ 성금 5백만원 등을 잇따라 냈다. 언론 보도를 통해 확인된 것만 이 정도고 실제로는 이보다 훨씬 많다고 한다.
북한의 용천 대참사가 일어나자 그는 용천참사동포돕기 바자회에 직접 참여했고, 북한에 연탄보내기 자선행사에 동참하여 북한 땅을 밟은 가장 어린 연예인으로 기록되기도 했다. 뿐만 아니다. CF 수입 등으로 번 돈은 거의 예외없이 성금으로 썼다. 특히 학생복 모델로 받은 돈 3억원은 전액을 소아암 환자 돕기와 책읽는사회운동본부에 기부하면서 화제를 일으켰다.
이에 대해 문근영은 “엄마는 내게 ‘어려움을 아는 사람이 어려운 사람을 돕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부모님께서도 넉넉하지는 않지만 두 분 모두 공무원이어서 충분히 능력이 있는데, 어린 제가 많은 돈을 버는 것을 속상해 하신다. 그래서 그 돈을 더더욱 함부로 쓸 수 없다고 하신다. 나도 아빠 엄마의 뜻을 전적으로 따르기로 한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문근영의 소속사인 나무액터스 관계자 또한 “근영이는 부모님과 외할머니의 교육 영향으로 행동이나 생각이 또래 연예인에 비교해 두드러질 만큼 어른스럽고 아주 반듯하다. 영화 <어린 신부> 이후 모델료가 많이 올라 수익이 상당했으나 예전과 마찬가지로 거의 대부분을 기부하고 있다. 근영의 부모님 역시 근영이 벌어들이는 돈으로 재산을 불릴 생각이 전혀 없다고 말씀하신다”고 밝히기도 했다.
문근영의 외할아버지인 류낙진씨는 한국전쟁 직후 지리산 빨치산으로 활동했다가 구속됐다. 아내인 신씨 역시 지리산에서 만난 것으로 알려졌다. 류씨는 석방된 뒤 신씨와 결혼하고 전남 보성의 예당중 교사로 재직하다가 71년 통혁당 사건으로 구속돼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88년 6공 정권에 의해서 20년형으로 감형된 뒤 90년 전향서를 제출하고 19년 만에 가석방됐다.
하지만 그는 김영삼 정권 시절인 94년 또다시 구국전위 사건으로 인해 안기부에 의해 재검거됐다. 당시 구국전위 사건은 총책 안재구씨와 호남책 류낙진씨 등이 조선노동당의 남조선 지하당으로 ‘구국전위’를 구성하고, 남한 내의 동향을 북한에 정기적으로 보고했다는 혐의였으나, 사건 조작 논란도 불러일으켰던 바 있다.
하지만 김대중 정권이 들어선 지난 99년 광주지역 재야 인사들이 ‘류낙진 선생 석방추진위원회’를 만들어 “30년 넘게 감옥에 갇혔던 통일운동가 류씨가 이미 복역 기간(8년)의 절반 이상을 산 데다, 양심수 가운데 가장 연로하고, 또 5·18 희생자 유가족인 점을 참작해달라”고 석방 운동을 벌인 데 힘입어 99년 광복절 특사로 가석방되었다. 당시 류씨는 금속연맹 노조위원장이던 단병호 현 의원과 함께 준법서약을 거부했던 바 있다.
한편 문근영의 부모는 기자와 만난 자리에서 “근영이가 아주 어렸을 때지만 손을 잡고 외할아버지 면회를 함께 간 적도 있다. 근영이도 외가의 아픔을 대강 알고 있을 것”이라며 “이 같은 가족사를 굳이 감출 이유도 없지만 또 굳이 밝히고 나설 이유도 없어 여기까지 이르렀다. 언젠가는 자연스럽게 밝혀질 것으로 생각했고, 또 서로 오해나 아픈 상처가 없는 시점에 밝혀졌으면 하는 바람으로 기도했다”고 밝혔다.
감명국 기자 kmg@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