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17일 안상수 의원의 탄핵 철회 발언에 대해 긴급상임위원회가 소집돼 나온 최병렬 대표. 이종현 기자 | ||
치밀하게 탄핵 철회 시나리오가 짜여졌으며 한나라당이 그렇게 갈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여론의 반발과 역풍을 예상하고 국회에서 야권공조로 탄핵안을 통과시킨 뒤 지배적 여론이 ‘탄핵까지는 너무했다’는 쪽으로 나타나자 탄핵을 철회하기 위한 방법론이 논의되기 시작했고, 이를 구체적으로 적용하는 단계에 이르렀다는 정황들이 속속 나타난다.
탄핵 철회 시나리오는 ‘새 대표 선출 후 노무현 대통령을 만나 협상한 뒤 국민통합이라는 명분을 내세워 일정한 수순을 밟은 뒤 탄핵안을 철회한다’는 것으로 요약된다. 이 과정에서 탄핵 역풍을 확실히 차단하고 국민의 뜻을 되돌리기 위한 대국민사과성명도 낼 수 있다는 아이디어까지 한나라당 내에서 돌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탄핵안 철회 시나리오는 당초 한나라당 내 수도권 의원과 일부 개혁성향의 총선 후보들 사이에서 나왔으며 이를 당 대표 경선에 나섰던 김문수 의원이 수용했다. 처음 탄핵안 철회 입장을 편 건 당 대표 특보단장인 안상수 의원(경기도 과천·의왕)이었다.
안 의원은 “노무현 대통령 사과 및 헌법 준수를 전제로 탄핵안을 철회해야 한다”고 주장했었다.
여기서 흥미를 끄는 것은 안 의원의 정체성이다. 수도권의 한 초선 의원은 주목해야 할 두 가지를 들었다.
하나는 안 의원이 평소 말이 많지도 않을 뿐 아니라 잘 나서지도 않는 성격이라는 점, 다른 하나는 안 의원이 법률구조단에 오랫동안 몸담아온 변호사 출신의 법률 전문가라는 점이다.
이 초선 의원은 “안 의원의 발언은 사실은 수도권을 포함한 당내의 일반의지를 내보인 것으로 해석돼야 한다”고 말했다.
또 다른 수도권의 재선 의원은 “안 의원이 수도권의 상당수 초·재선 의원들과 상의를 끝낸 뒤 소
신을 밝힌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탄핵안 철회론을 모의한 수도권 인사들 중엔 이재오 맹형규 강인섭 전재희 홍준표 심재철 서상섭 장광근 의원 등이 속해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들은 탄핵안 가결 이후 불어닥친 역풍 해소 방안을 논의하는 과정에서 다소의 당 이미지의 손실이 있다 하더라도 탄핵안을 깨끗하게 철회하는 게 더욱 큰 재앙을 막는 길이라는 데 의견을 모았다고 한다.
또 필요하다면 당이 탄핵안 처리에 대해 국민들의 의사를 정확히 묻지 못한 것에 대해 국민들에게 사과해야 한다는 제안도 나왔다는 후문이다.
▲ 한나라당 내에서 최초로 탄핵 철회 얘기를 꺼낸 안상수 의원. | ||
이 기구는 이에 따라 탄핵안 철회를 가정한 법률 검토에 들어갔다.
율사 출신의 한 관계자는 “당초 국회법에는 탄핵안 의결 절차만 있을 뿐 철회절차에 대한 규정은 없다”면서“내부에서는 철회를 위해서는 형사소송법상 고소 취하와 국회법 일반법률의 철회과정 등을 준용할 수밖에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고 말했다.
이 기구는 수도권쪽의 표심을 얻고 있는 김문수 의원에게 이런 분위기를 전달했다고 한다.
안상수 의원이 총대를 멘 탄핵안 철회 관련 발언 직후 최병렬 대표 등 당 지도부에서 공식 부인 반응이 나간 지 하루밖에 안돼 문제의 김문수 의원 발언이 뒤따른 것은 바로 이 같은 분위기의 연장선상에서 이뤄진 것이라는게 관계자들의 한결같은 말이다.
이에 김 의원은 지난주 말 한 일간지와의 인터뷰에서 “새 대표가 탄핵소추안 철회를 포함한 광범위한 여론 수렴작업을 해야 한다”면서 ‘철회론’에 다시 불을 붙였고, 대표 경선 주자인 그의 탄핵안 철회 발언은 엄청난 평지풍파를 일으켰다. 김문수 의원은 21일 밤 진행된 KBS의 대표 경선 5인 토론회에서도 “우리가 통과시킨 탄핵안에 대해 국민 절대 다수가 반대하고 있다”며 “국민이야말로 최고의 권력기관인 만큼 국민의 뜻을 따르는 정당이 되고자 대표가 되면 바로 철회를 검토하겠다”고 사실상 공론화했다.
한나라당 현역의원 4명을 포함한 수도권 공천자 27명은 21일 ‘탄핵 철회’를 요구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수도권 공천자들은 이날 여의도 한강둔치에 설치한 ‘천막당사’에서 비상회의를 가진 뒤 “한나라당은 대국민 사과를 해야 하며, 사후 처리는 국민여론과 사회 각계 원로의 의견 수렴을 거쳐 결정해야 한다”고 말했다.
▲ 탄핵 철회를 다시 끄집어내 공론화시킨 김문수 의원. | ||
특히 설 의원은 삭발하고 지도부 사퇴와 탄핵 철회가 받아들여질 때까지 무기한 단식농성에 돌입했다.
자민련은 일찌감치 탄핵 철회쪽 입장을 정리했다. 무엇보다 노회한 김종필 명예총재가 한나라당 내에서 탄핵안 철회론이 나오기 전부터 “탄핵안을 가결시킨 게 실제로 대통령을 자리에서 물러나게까지 하려는 것은 아니었다”면서 완전히 뒤로 물러섰다. 대부분의 의원들도 대통령 사과를 전제로 탄핵안 철회를 검토할 수 있다는 입장으로 돌아섰다.
그러나 여전히 탄핵안 철회를 가로막는 요인이 적지 않다. 한나라당이 탄핵안 철회 수순을 밟을 경우 여론이 한나라당으로 되돌아올지가 우선 의문이다. 오히려 우왕좌왕, 좌고우면하는 모습에 대해 ‘기회주의적 작태’라는 비난이 쏟아져 여론이 악화될 가능성도 있다. 영남권의 한 중진 의원은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식의 이중적인 행동을 하는 것은 받아들일 수 없다.
일부에서 탄핵 철회를 주장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럼에도 탄핵안은 결국 ‘철회 시나리오’쪽으로 갈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하다. 관건은 여론이다. 선거가 20여일밖에 남지 않은 지금, 각 언론사의 여론조사 결과 거대여당의 출현은 불가피하게 보인다. 일각에서는 열린우리당이 전체 의석의 3분의 2인 2백 석을 확보할지 모른다는 섣부른 전망도 나온다. 한나라당으로서는 판을 완전히 뒤엎을 ‘올인 전술’을 강구하지 않으면 안될 상황이다.
한나라당 법률구조단의 한 주요 관계자는 “일단 여론이 악화될 만큼 악화된 상태에서 총선이 코 앞에 있다는 점 하나만으로도 새 대표는 탄핵안을 철회할 방법을 찾지 않으면 안된다”면서 “탄핵안 철회는 당연한 수순”이라고 장담했다.
허소향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