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탄핵정국 이후 노무현 대통령의 ‘파워’는 줄어들 전망이다. 사진은 지난 21일 청와대 관저 내에서 창밖을 바라보는 노 대통령. 사진제공=청와대 | ||
50%대를 넘나드는 지지율에, 취약지인 영남권에서도 한나라당을 앞서는 것으로 나타나자 ‘탄핵특수’라는 얘기가 자연스레 나오고 있는 상황이다. 정동영 의장을 비롯한 지도부는 눈에 띄게 ‘표정관리’에 신경을 써야 하게 됐고, 하루가 멀다하고 쏟아지는 여론조사 결과만 놓고 보면 원내 1당은 물론이고, 과반수 이상 의석 확보도 무난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총선 ‘압승’의 기대치가 높아가는 이면에는 여권 내 파워그룹들간에 신경전과 이에 따른 ‘잡음’도 적지 않다. 지지율 급등 등 ‘탄핵정국’이 가져온 과실이 모두에게 똑같이 돌아가지는 않는 만큼, 변화된 상황을 자신들에 보다 유리하게 활용하려는 시도가 서로 맞부딪히고 있는 것이다.
여기엔 노무현 대통령과 정동영 열린우리당 의장이라고 예외일 수 없다. 아니, 오히려 두 사람을 축으로 후보 공천과 총선전략 등을 놓고 새로운 권력질서 형성을 위한 세력간 제휴·경쟁이 이뤄지고 있다는 것이 정확한 진단일 것이다. 과연 ‘탄핵정국’의 막후에서 여권에는 어떤 일들이 벌어지고 있을까?
`탄핵정국’이 여권 전반에 유·무형의 호재로 작용하고 있지만, 최대 수혜자는 역시 정동영 의장이다. 총선을 진두지휘하는 정 의장에게 탄핵안 가결 이후 상황은 과장해서 말하자면, “손 안 대고 코 푸는” 것이 가능할 만큼 유리하게 흘러가고 있다. 전략지인 수도권에선 열린우리당의 무명 후보가 민주당 추미애, 한나라당 이재오 의원 등 야권의 ‘스타’들을 앞서고 있는 터라 정 의장은 별반 힘들이지 않고도 총선 승리의 ‘과실’을 차지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노 대통령이 총선 결과와 재신임의 연계를 선언한 것도 정 의장에겐 호재다. 노 대통령의 운명이 총선 결과에 달려 있는 만큼 열린우리당이 총선에서 압승할 경우 자연스레 정 의장이 ‘수렁에 빠진’ 노 대통령을 구한 형국이 되기 때문이다. 그만큼 총선 후 그려질 여권 내 역학구도에서 정 의장의 입김은 세질 수밖에 없고, 노 대통령도 싫든 좋든 그의 ‘공로’를 인정해야 할 판이다. 정 의장으로선 그야말로 ‘꽃놀이패’를 들고 총선을 치르게 된 것이다.
정 의장이 ‘탄핵 정국’의 덕을 단단히 보고 있다면, 정작 직무정지 상태에 빠져들면서까지 지금의 여건을 만든 노 대통령은 오히려 피해가 많다는 분석이다. 물론 총선 결과 열린우리당이 승리해 기존의 극단적인 ‘여소야대’가 ‘여대야소’로 바뀌면, 국정운영은 한결 매끄러워질 것이 확실하다.
그러나 노 대통령으로선 이유 여하를 불문하고 임기 말까지 사상초유의 ‘탄핵당한 대통령’이란 꼬리표를 달고 가야 할 처지라 전도가 밝지는 않다. 특히 총선 결과에 따라 목소리가 커질 것이 확실한 정 의장 중심의 열린우리당의 실체를 인정해야 하고, 이 경우 2년차에서부터 ‘포스트 노무현’ 또는 여권 발(發) 개헌논의가 활발해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일부에서는 노 대통령의 ‘레임 덕’이 역대 어느 대통령에 비할 바 없이 일찍 찾아올 수도 있다는 얘기도 나온다.
실제 최근 열린우리당 내에서는 탄핵 정국 이후 달라진 노 대통령-정 의장의 관계를 보여주는 징후들이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다.
우선 지난 1월11일 전당대회에서 대표로 선출된 후 꾸준히 자기 세력을 확대해 온 정 의장은 탄핵정국 들어, 그 페이스를 더욱 더 빨리하고 있다. 신기남 이부영 이미경 상임중앙위원, 천정배 클린선거대책위원장 등과 연대해 당권파를 확실히 형성한 데 이어 자신이 공들여 영입한 김명자 전 환경부 장관, 정덕구 전 산업자원부 장관, 민병두 총선기획단장(전 <문화일보> 정치부장) 등을 선거전에 전면 배치하는 등 시간이 지날수록 친정체제를 강화하고 있다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정 의장은 이들 외에도 이수빈 삼성생명 회장, 고교 동문(전주고)으로 ‘아침편지’로 유명한 고도원 CBS 전 ‘행복찾기’ 진행자(전 청와대 연설담당비서관) 등의 영입에 적극 나서는 등 ‘세 확산’에 주력하고 있다. 정 의장은 이들 외부 영입인사들을 비례대표 당선 안정권에 집중배치, 당내 기반을 강화한다는 복안인 것으로 알려졌다.
반면 ‘노무현 사람들’은 탄핵정국 돌입 이후 입지가 크게 흔들리고 있다. 경선 승리 등을 통해 공천이 결정되는 듯했던 대통령의 핵심 측근들이 당권파의 집중견제로 입지가 불안정해지고 있는 것이다. 특히 당권파 내에서 “탄핵특수는 적극 활용하되, 선거전에선 ‘노무현 지우기’를 전략으로 내세워야 한다”는 얘기까지 나돌면서, 노 대통령 측근들의 2선 후퇴를 기정사실화하는 분위기다.
▲ 당권파의 ‘노무현 지우기’ 징후가 보이고 있다. 사진은 지난 16일 비상대책위원회 회의를 주재하는 정동영 열린우리당 의장. 이종현 기자 jhlee@ilyo.co.kr | ||
그러나 당권파들은 이 전 실장이 썬앤문 문병욱 회장으로부터 1억원을 받아 역시 386 핵심측근인 안희정씨에 전달하는 등 불법 대선자금 수수와 관련있다는 점을 들어 태클을 걸고 나섰다. 지난해 10월 이 전 실장을 겨냥해 “청와대에서 정보와 권력을 독점한 실세를 경질해야 한다”고 공격해 결국 청와대를 떠나게 만들었던 천정배 의원은 이번엔 “공천에서 정치개혁의 취지가 견지돼야 한다”고 압박했고, 역시 당권파인 김성호 공천재심위원장도 “이 전 실장 본인이 알아서 처신하는 것이 좋다”며 사실상 자진사퇴를 촉구했다.
386 참모그룹의 또 다른 핵심인 서갑원 전 청와대 정무비서관도 당권파의 거센 공세를 받고 있다. 전남 순천 경선에서 승리한 서 전 비서관은 경쟁자였던 신택호 변호사가 “선거인단이 당 지지자들로만 구성됐다”며 공천재심위에 이의를 제기하고, 이에 재심위가 이에 대한 소명을 요청하자 이를 거부했다. 재심위는 서 전 비서관을 상대로 부정 경선 여부를 조사해 조치를 취할 예정이지만 “소명조차 안하는 것은 오만한 자세다. 청와대 출신에겐 더 가혹한 도덕적 잣대를 들이댈 것”(김성호 위원장)이란 분위기여서 당선 무효 및 재경선 실시 결정이 내려질 가능성이 높은 상황이다.
이밖에 한때 옥중출마설이 나돌던 정만호 전 청와대 의전비서관도 이창복 강원도지부장 등이 나서 중앙당에 재공천 또는 ‘무소속 출마시 공천 보류’를 요청했지만, 당권파들이 “원칙도 없는 측근 봐주기”라며 반대하고 나서 좌절됐다. 박범계 전 청와대 법무비서관의 경우 대전 서구 을 경선(2월28일)에서 패배했으나, 지난 17일 지역 경선관리위원장이 ‘당선자인 구논회 후보측 선거원이 선거법 위반으로 검찰조사를 받고 있다’는 이유로 경선 무효를 선언하자 한때 ‘구제’ 가능성이 거론됐다. 박 전 비서관은 그러나 당권파들을 중심으로 자신에 대한 비난 분위기가 형성되자 결국 ‘백의종군’을 선언하며 뜻을 접었다.
자신들을 겨냥한 당권파의 이 같은 ‘비토’ 분위기에 노 대통령 측근들도 잔뜩 격앙하는 분위기다. 한 386 측근은 “이광재 전 실장의 경우 썬앤문 돈 1억원을 단순 전달한 것 이외에 불법 대선자금 문제와 관련해 드러난 혐의가 없고, 특히 측근비리 특검에서 무혐의 결론을 내렸는데도 이를 문제삼는 것은 다른 저의가 있어서가 아니냐. 이런 얘기까진 않으려 했지만, 굿머니로부터 대선자금을 전달받아 불구속 기소된 신계륜 의원이 공천된 데 대해서는 아무 말도 않으면서 이 전 실장만 대통령 측근이라는 이유로 사퇴하라는 것은 형평성 면에서 근본적인 문제가 있음을 단적으로 보여준다”며 비판했다.
이들은 또 당권파들이 ‘공천혁명’을 주장하며 노 대통령 측근들을 배제하려 하면서, 자신들과 가까운 인사들에는 전혀 다른 기준을 적용하고 있다고 주장하며 단적인 예로 공천에 대한 불만으로 탈당했다 며칠 만에 복당한 유선호 전 의원 케이스를 꼽는다.
당 법률지원단장을 맡고 있던 유 전 의원은 탄핵안 가결 전인 8일 공천에 대한 불만으로 열린우리당 탈당-무소속 출마(경기 군포)를 선언했으나, 13일 복당해 뒷말을 낳았는데 당 지도부는 그에게 당초 공천을 줬던 경기 안산 단원 을을 다시 맡겨 해당 지역 당원들이 거세게 반발하고 있는 상황. 노 대통령 측근들은 유 전 의원이 공천을 받게 된 배경이 당권파의 핵심인물인 천정배 의원과의 특수 관계(목포고-서울대 법대 동문) 때문 아니냐고 지적하고 있다.
주목되는 것은 정 의장을 축으로 한 당권파들의 독주 기세에, 당내 재야 출신과 386운동권 출신 소장파 의원들도 조직적으로 맞설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는 점이다. 특히 정 의장 등 당권파들이 탄핵정국 돌입 이후 ‘민생 행보’를 내세워 ‘탄핵 반대’ 촛불집회에 자제를 요청하는 등 보수성향을 강화하자, 김근태 원내대표를 축으로 한 재야-소장파들이 비판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했다.
이 같은 기류를 반영한 듯 연세대 총학생회장 출신인 송영길 의원은 지난 18일 열린 의원총회에서 검은 넥타이를 매고 나와 “탄핵 무효를 주장하는 자발적인 촛불집회가 어떻게 혼란이냐. 정 의장이 발 빠르게 민생 현장을 찾는 것은 좋지만 단순히 의석수를 계산해 ‘부자 몸조심’ 같은 얘기를 하면 안 된다”며 당권파를 정면으로 비판했다.
한양대 총학생회장을 지낸 임종석 의원도 “민생행보가 헌정수호라는 큰 전선을 훼손할 수 있고, 국민의 분노를 선거전략 차원으로 격하시킬 수 있다. 시민들의 분노에 당이 거리를 두려는 모습을 보여서는 안 된다”며 지도부 성토에 가세해 눈길을 끈 바 있다.
재야-소장파들은 또 의원직 총사퇴 선언을 놓고 당권파들이 “사퇴시 50억원이 넘는 국고 보조금을 상실해 당 재정난이 가중된다”며 철회를 주장하는 데 대해 반대입장을 분명히 하고 있다. 재야 출신의 당내 이론가이자 대통령직 인수위원장을 지낸 임채정 의원은 “(의원직 사퇴는) 국민에 대한 고백이자 약속이고 새로운 시대에 대한 결의다. 이것을 정치기술적인 차원에서 포기할 수 없다. 사즉생(死卽生)의 각오로 나서야 국민은 우리를 인정하고 새로운 희망을 찾을 것이다”며 강력 비판했다. 탄핵정국으로부터 촉발된 여권 내 권력투쟁이 인적 청산-노선 갈등 등 전방위로 확산되면서 총선 후 전면화될 수도 있을 것임을 예고하는 대목이라 하겠다.
이준원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