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창극 낙마’ 후 유력한 총리 후보로 거론됐던 김문수 전 경기지사. 하지만 박 대통령은 정홍원 총리의 유임을 결정했다. 작은 사진은 지난해 박 대통령이 인수위 시절 김문수 전 경기지사와 이야기하는 모습. 박은숙 기자
지난 6월 24일, 문창극 전 국무총리 내정자가 결국 자진사퇴했다. 10일 총리 내정 이후 2주 만의 일이다. 이에 앞서 박근혜 대통령이 16일 해외순방길에 나서기 전, 재가 결정을 유보했고 서청원 김무성 의원 등 여권의 유력 당권주자들까지 사퇴를 종용했다. 다소 늦은 감이 있지만, 예견된 상황이었다.
이 때문에 문 전 내정자의 사퇴 이전부터 정치권에선 이미 차기 총리 후보자에 대한 하마평이 나돌았다. 잇따른 인사 실패 탓에 차기 인선은 안정적인 카드가 점쳐졌다. 이에 유력 여권 정치인들이 후보감으로 거론됐다.
여기에 황우여 전 새누리당 대표를 비롯해 강창희 전 국회의장, 이인제 의원 등 친박 진영 내 5선 이상 원로급 정치인들이 대거 포함됐다. 심지어 6·4 지방선거에서 고배를 마신 김황식 전 총리의 재임용 카드까지 거론됐다.
하지만 이들에 앞서 가장 유력한 후보로 거론됐던 이는 김문수 전 경기지사였다. 이미 안대희 전 총리 내정자의 자진사퇴 이후 줄곧 하마평에 올랐다. 앞선 후보군이 진영 내 인사라면, 김 전 지사는 분명 진영 외 인사였다.
여기에 3선의 의정 경력과 재선의 지방정부 수장을 지낸 경험은 물론 유력 대권 주자라는 점에서 방향을 잃은 현 정부의 국정 동력을 다시금 잡아줄 적임자라는 평이 주를 이뤘다. 무엇보다 당내 계파 논리에서 벗어나 자기만의 색깔을 분명히 해온 그간 정치 행보를 놓고 볼 때, ‘책임총리제’와 가장 잘 어울린다는 평가도 있었다.
김 전 지사 입장에서도 총리 발탁은 매력적인 카드였다. 여권의 한 관계자는 “김문수 지사는 유력한 대권 주자 아닌가. 정계 복귀를 위해 7·30 재보선 출마와 당권 도전을 두고 저울질하고 있는 상황이지만, 총리직은 현 정부의 실질적 국정 운영자로서 전국적인 주목을 받을 수 있는 자리다. 이건 어마어마한 메리트”라며 “야권 주자들과 비교하면 전국적 인지도가 빈약한 김 전 지사로서는 결과가 불투명한 재보선이나 당권 도전 보다 오히려 총리직이 나았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정 총리 유임이 결정되기 직전까지 분위기도 좋았다. 차기 유력 당권 주자인 김무성 의원은 19일 청와대에 김 전 지사를 직접 추천했다고 밝혔다. 유임 결정 하루 전인 25일에는 김 전 지사가 퇴임 기자간담회에서 “난 이사도 두 번밖에 안했고 논문도 없다. 청문회에서 걸릴 것 없다”며 총리에 대한 욕심을 숨기지 않았다. 김기춘 비서실장의 반대 가능성에 대한 기자들의 질문에도 “그 분과 친하다. 반대할 이유가 없다”고 덧붙였다. 본인 스스로 분위기가 무르익었다는 자신감이 없다면 나올 수 없는 발언이었다.
하지만 박근혜 대통령은 외부의 비난을 감수하고도 결국 유력 카드로 거론되는 김 전 지사가 아닌 정 총리의 유임을 택했다. 김 전 지사 입장에선 ‘김칫국만 마신 꼴’이 됐다. 문 전 내정자의 자진사퇴와 정 총리의 유임 결정 1주일 앞서 청와대의 한 관계자는 김 전 지사를 두고 이렇게 말했다.
“김 전 지사가 총리 적임자로서 손색이 없는 것은 인정한다. 청와대 입장에서 고민도 깊다. 하지만 청와대의 고민은 역설적이게도 김 전 지사가 차기 대권주자라는 데 있다. 박 대통령으로서는 조기 레임덕을 염려할 수밖에 없다. 김 전 지사와의 동거 정부가 현실화된다면, 응당 국정 동력은 ‘현재’가 아닌 ‘미래’로 몰릴 것이다. 차기를 염두에 둔 김 전 지사로서는 분명 이득이겠지만, 현재의 박 대통령으로서는 적잖은 부담이다. 이제 겨우 정부 출범 1년 반이다. 벌써 손 놓고 싶진 않을 것이다.”
한마디로 박근혜 대통령에게 김 전 지사는 ‘함께하기엔 너무나 먼 당신’인 셈이다. 당내에선 이에 대한 비판 역시 만만찮다. 이러한 기류는 이제 여권 내 주류와 비주류를 불문하고 번지고 있다.
앞서의 여권 관계자는 정 총리 유임 이후 기자와의 통화에서 “레임덕을 염려해 청와대가 현재의 선택을 했다는 것에 대해 의문”이라며 “외부에서 ‘수첩 속 인물’이 다 떨어진 것 아니냐는 비아냥거림만 듣고 있다. 오히려 이번 유임이 국정 동력 하락을 야기할 수 있다. 이번만큼은 정략적 관계를 떠나 누구나 합당하다고 판단되는 인사가 선행됐어야 한다”고 아쉬움을 피력했다.
한편으론 현 정권의 차기 대권 주자 양성 노력 부재를 두고 비판이 쏟아지고 있다. 이재관 정치컨설턴트는 “야권과 비교한다면, 여권의 대권 주자들은 빈약하다. 사실 대권 주자의 경쟁력은 현 정권에서 키우기 나름”이라며 “청와대의 이번 총리 유임은 결국 그러한 의지가 없다는 것 아니겠나. 먼 미래보다는 지금 당장의 김기춘 체제를 놓지 않고 당분간 유지하겠다는 의도”라고 해석했다.
청와대는 정홍원 총리 유임과 함께 6년 만에 인사수석실을 부활하겠다고 밝혔다. 그간 참담한 결과를 가져온 인사 검증 시스템의 실패를 사실상 인정한 셈이다. 한 차례 책임을 지고 사의를 밝힌 정 총리가 위기일로를 걷고 있는 정국의 정상화를 어느 정도 회복할지 의문이다.
이와 함께 김 전 지사의 향후 행보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총리 내정 가능성이 물 건너 간 이상, 이제 ‘정공법’이 예상된다. 대권을 향한 이번 첫 발이 무척 중요하다는 것이 정치권의 분석이다.
한병관 기자 wlimodu@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