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결백하다>로 히치콕과 세 번째 만난 1955년은 그녀의 인생을 바꿔 놓은 해였다. 칸영화제에 초청을 받았을 때 그녀는 자동차로 한 시간 거리인 모나코를 방문한다. 당시 <파리마치>라는 잡지의 편집장이자 명배우 올리비아 드 하빌랜드의 남편이었던 피에르 갈란테는 모나코 궁을 배경으로 한 화보 촬영을 제안했고, 켈리는 당시 33세의 레니에 3세 왕자를 처음 만났다.
사실 이 시기 그레이스 켈리는 할리우드 러브 커넥션에서 빠질 수 없는 인물이었다. 열아홉 살, TV 출연하던 시절에 만났던 마크 밀러를 시작으로 감독이었던 돈 리처드슨, 그리고 진 라이온스 등과 연인 관계였던 그녀는 <하이 눈>에서 공연한 게리 쿠퍼를 시작으로 레이 밀랜드, 빙 크로스비, 윌리엄 홀든 등 함께 작품을 한 배우들과 데이트를 즐겼다. 패션 디자이너인 올렉 카시니와 당대 최고의 바람둥이 프랭크 시내트라 등도 연인이었고, 레니에 왕자와 처음 만났던 시기엔 프랑스 배우 장-피에르 오몽과 사귀고 있었다. 이외에도 말런 브랜도, 폴 뉴먼, 클라크 게이블 등과도 루머가 있었고 존 F 케네디의 여인 중 한 명이라는 얘기도 돌았다.
모나코 왕자 레니에 3세와 결혼하면서 5년 만에 영화계에서 은퇴한 그레이스 켈리. 그녀는 할리우드 컴백을 희망했지만 모나코 왕실의 반대로 꿈을 접어야 했다.
미국으로 돌아온 켈리는 다시 영화 촬영에 들어갔고, 1955년 12월 레니에 3세는 미국으로 와 켈리의 부모를 만났다. 레니에 3세는 두 가지 조건을 내걸었다. 첫 번째는 수태 능력. 후계자를 생산해야 했기 때문이다. 두 번째는 200만 달러의 지참금. 어쩌면 민간인이 왕족의 신분으로 상승하는 데 필요한 돈이었다. 그리고 1956년 4월 18일, 그들은 모나코 왕궁에서 결혼식을 올렸고 지중해에서 7주 동안 요트 허니문을 즐겼다.
결혼 후 1957년에 카롤린, 1958년에 알베르, 1965년에 스테파니를 낳은 켈리. 언젠가는 배우로 컴백하겠다는 희망을 품었지만 남편의 입장은 절대 엄금이었다. 1962년엔 히치콕 감독이 <마니>(1964)의 여주인공 역을 제안했지만 결국 무산되었다. 1977년엔 허버트 로스 감독이 <터닝 포인트>로 러브콜을 보냈지만 역시 남편의 반대로 출연하지 못했다. 가능한 건 다큐멘터리나 아동용 TV 시리즈에 목소리로 등장하는 것 정도. 모나코 왕실은 켈리가 다시 배우로 사는 걸 끔찍하게 싫어했고, 켈리는 경력 단절에 대한 공포로 점점 술에 빠졌다. 더 늙고 더 체중이 늘기 전에 은막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레니에 3세와 켈리.
이 말은 모두 현실이 되었는데, 카롤린은 21세에 결혼했고, 총 네 명의 아이가 있으며, 두 번째 남편 스테파노 카시라기는 보트 사고로 사망했다.
그리고 1982년 9월 13일, 막내딸 스테파니와 함께 직접 운전을 해 모나코로 향하던 그레이스 켈리는 도로 아래로 굴러 떨어져 세상을 떠난다. 나중에 정밀 검사를 한 결과 밝혀진 사고 원인은 운전 중 갑작스럽게 찾아온 심장 발작. 사고 후 병원으로 옮겼을 땐 이미 심각한 골절들이 일어난 상태였고, 곧 세상을 떠났다. 53세의 젊은 나이였다.
그레이스 켈리는 할리우드 스타가 왕실과 만난 동화 같은 이야기의 주인공이었지만, 현실에선 자신의 꿈을 접고 왕실의 가이드에 따라 강요된 길을 가야 했던 인물이었다. 게다가 레니에 3세가 바람을 피운다는 루머는 끊이지 않았고, 켈리의 할리우드 컴백은 절대 불가능한 일로 못 박혀 있는 상태였다. 새장 속의 새 같았던 그레이스 켈리. 그런 면에서 그녀는 다이애나와 비교될 수 있지만, 다이애나는 과감하게 왕궁을 뛰쳐나왔고 켈리는 그렇지 못했다. 그리고 두 사람 모두, 아이로니컬하게도 젊은 나이에 갑작스러운 자동차 사고로 세상을 떠났으니… 꽤나 잔혹한 운명이었던 셈이다.
김형석 영화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