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은 칼집에 있을 때 가치가 있다’
최근 우리 사회를 뒤흔들고 있는 ‘안기부 도청 X파일’과 관련, 삼성그룹으로부터 ‘떡값’ 명목으로 금품을 받은 것으로 나타난 전·현직 검찰 간부에 대해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이 지난 3일 경찰청에 고발장을 접수시킨 것이다.
도청 테이프에는 현직 검찰 수뇌부와 잘나가는 일선 검찰간부, 전직 검찰총장 및 법무부 장관 등 10여 명의 이름이 거명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수수금액도 수백만원에서 수천만원에 이르는 것으로 전해졌다.
경찰로서는 ‘검찰의 목’을 확실히 조를 수 있는 ‘히든 카드’를 확보하게 된 셈이다. 만약 경찰이 검찰 전·현직 간부들의 금품수수 비리를 캐낼 경우 그 파장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의 엄청난 파괴력을 발휘할 수 있다.
그간 검찰이 경찰에게 수사권을 주지 않기 위해 ‘전가의 보도’처럼 휘둘렀던 ‘경찰 비리’ 논리를 한번에 뒤엎고, 수사권 조정 문제에서 우위를 점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경찰은 이 히든카드를 서둘러 활용할 생각은 없어 보인다. 검찰의 반발이 불을 보듯 뻔한 데다 정치권에서 특검제와 특별법 등이 논의되고 있어 시간을 두고 보자는 셈법이 강해 보인다.
경찰이 느긋한 데는 ‘칼’은 우리가 쥐고 있다는 자신감이 바탕에 깔려 있는 것으로 분석된다. 검찰의 약점을 틀어쥐고 있는 만큼 주변 상황을 보아가며 천천히 검찰의 목을 조여도 상관없다는 인식과 통한다.
정의구현사제단이 고발장을 접수시키면서 밝힌 고발 이유는 ‘경찰이 하고 싶은 말을 대신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경찰의 입장을 100% 담고 있다.
사제단 김용식 신부는 “검찰은 신고자가 ‘도둑이야’ 소리쳤는데 도둑은 잡지 않고 신고자를 ‘고성방가죄’로 구속수사 운운하고 있다”며 “이번 사건은 검찰·언론·정치권 등 ‘권력의 눈’들이 작당해서 저지른 일이다”라고 규정했다.
김 신부는 “역사의 퇴보를 막고 과거로 회귀하지 않도록 검찰의 권력 견제를 위해 경찰에 고발장을 접수했다”며 “일방적으로 경찰을 편드는 것이 아니라 수사권 독립 측면에서도 검찰을 견제하는 도구가 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안승길 신부는 좀 더 노골적이다. 그는 “검찰을 못 믿겠으니 경찰에 고발장을 제출해 시비를 가리자는 의미에서 경찰에 고발장을 냈다”며 “경찰도 이번만큼은 검찰의 부정을 제대로 밝혀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사제단에 앞서 ‘사법제도 개혁을 위한 네티즌연대 준비모임’(대표 황동렬)이 금품수수 의혹을 받고 있는 전·현직 검찰 고위 간부를 고발한 것도 경찰에게는 힘이 되고 있다.
사제단의 고발에 대해 경찰은 일단 원론적인 입장을 밝히고 있다. “고발장이 접수된 만큼 규정에 따라, 원칙대로 처리하겠다. 고발장을 접수한 경찰청 특수수사과에서 수사를 계속 진행할 예정이며 곧 고발인들을 상대로 조사를 시작하겠다”고 했다.
경찰청 특수수사과는 정치인 비리나 전직 장관, 군 장성 등이 연루된 굵직굵직한 사건을 해결한 경찰의 핵심부서다.
이는 검찰과의 ‘정면승부’도 마다하지 않겠다는 말로도 들린다. 경찰 고위 관계자는 “경찰이 소극적으로 임할 경우 ‘검찰의 눈치나 보는 경찰에게 무슨 수사권이냐’라는 여론이 비등해질 텐데 어떻게 가만히 있을 수 있겠냐”며 “이 같은 국민의 의구심을 지우기 위해서라도 경찰은 원칙대로 갈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검찰 비리를 속 시원히 밝혀낼 경우 수사권 조정 문제에서 유리한 위치를 차지할 수 있다는 것이 경찰의 속내다.
그러나 경찰 일각에서는 ‘이번 사건이 꼭 좋은 것(호재)만은 아니다’라는 신중론이 제기되고 있다. 경찰 한 관계자는 “본격적인 수사에 착수할 경우 검찰이 경찰의 약점을 폭로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고 말했다. 검찰이 궁지에 몰렸다고 판단해 맞불 작전으로 나올 경우 경찰도 ‘득’보단 ‘실’이 많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신중론은 경찰 수뇌부에서 비교적 분명하게 감지되고 있다. 경찰 고위 관계자는 “참여연대가 검찰에 제출한 고발장과 사제단이 우리에게 제출한 고발장이 비슷하기 때문에 병합수사하는 방안도 검토하고 있다”고 말했다.
경찰의 조심스런 행보에는 수사가 현실적으로 쉽지 않다는 점도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도청테이프가 불법인 상황에서 이를 근거로 수사하는 것이 힘들다는 것이다. 법조계에선 ‘독나무에 열린 열매는 독이 있다’는 ‘독수독과론’(毒樹毒果論)을 들어 도청 테이프 수사에 반대하는 의견이 적지 않다. 또 금품수수가 뇌물이라는 점을 입증하기도 쉽지 않다는 것이 일반적인 관측이다.
서울 경찰청 고위 관계자는 “경찰의 수사가 흐지부지 끝난다면 수사를 하지 않은 것보다 못한 상황이 올 수 있다”며 “칼은 칼집에 들어 있을 때 위협이 되지 칼집에서 나오는 순간 위엄을 잃게 된다”고 말했다.
이에 따라 삼성그룹 도청 테이프를 둘러싼 검·경 간의 신경전은 정면승부로 확전되기보다는 지루한 줄다리기가 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
유영욱 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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