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검찰청 | ||
그러나 삼성 관련 사건들은 검찰이 자존심을 세운다고 무작정 칼을 휘두를 수 없는 ‘어려운’ 것들이 대부분이다. 국내 초대형 로펌에 버금가는 삼성그룹의 법무팀도 검찰에게는 만만히 볼 상대가 아니다. 검찰로서는 이래저래 벙어리 냉가슴을 앓을 수밖에 없는 상황인 셈이다.
지난 7월 말 언론에 폭로된 안기부 도청테이프에는 삼성이 1997년 대선을 앞두고 어느 정치인에게 얼마씩의 돈을 주었다는 부분과, 특히 기아자동차 인수 문제 등을 거론하며 뇌물을 제공한 듯한 대화도 녹음돼 있다. 시민단체는 물론 국민 대다수는 돈으로 정치권력마저 만들어내려는 거대 자본의 실체가 드러났다며 검찰에게 삼성에 대한 엄정한 수사를 촉구하고 나섰다. 그러나 안기부 도청테이프 자체가 법정에 증거로 쓸 수 없는 불법자료인 데다 사건 자체도 워낙 오래전 일이어서 검찰의 수사가 말처럼 쉽지 않다.
이후 안기부 도청테이프 2백74개가 무더기로 추가 발견되면서 검찰의 고민은 더 커졌다. 여론은 추가 발견된 테이프의 내용들도 수사하라고 요구하지만 워낙 커다란 사회적 파장이 예상되고 법리적으로도 쉽지 않아 검찰은 수사가 영 마땅치 않은 상황이다.
그런데 앞서 공개된 도청테이프에 나와 있는 삼성의 불법로비 혐의에 대한 수사는 추가로 발견된 테이프들의 내용에 대한 수사와 직결돼 있다. 검찰 앞에는 둘 다 수사하거나, 둘 다 불법도청 자료라는 이유로 수사를 않겠다고 선언하는 두 가지 선택밖에 없는 것이다. 이에 따라 검찰은 삼성에 대한 수사를 최대한 조심스럽게 접근할 수밖에 없는 상황인데, 이를 두고 또 다시 시민단체들은 검찰이 삼성에 ‘면죄부’를 주려 한다고 강력히 비난하고 있어 검찰의 어깨는 무겁기만 하다.
나쁜 일은 연달아 닥치는 법일까. 안 그래도 삼성 때문에 곤란한 검찰에 지난주 또 하나의 골칫거리가 얹어졌다. 흘러간 얘기라고만 생각했던 2002년 삼성의 불법대선자금 사건이 다시 불거진 것이다.
대검 중수부는 2003년 대선자금 수사 때 삼성이 8백억원대의 채권을 매입, 이 중 3백여억원어치가 정치권에 제공된 사실을 밝혀냈다. 그러나 나머지 채권 5백여억원대의 사용처는 규명하지 못하고 수사를 마무리했다. 당시 검찰은 “채권을 매입하는 데 관여한 것으로 보이는 전직 삼성증권 직원 김아무개씨와 최아무개씨가 해외에 체류중이어서 수사가 진전되지 않는다”며 “이들이 귀국하는 대로 수사를 재개할 것”이라고 밝혔다. 그런데 이 둘이 지난해 9월과 올 5월 잇따라 귀국하면서 행방이 묘연한 삼성 채권 5백억원의 수사가 재개될 가능성이 열린 것이다.
그러나 검찰은 이 사건에서도 “수사를 미적댄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우선 전직 직원 김씨의 경우 지난해 9월에 입국했음에도 조사는 1년여가 지난 올 8월에 이뤄졌고, 최씨의 경우도 올 5월 입국했지만 아직 신병조차 확보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 삼성 본관 | ||
이처럼 검찰이 최근 들어 삼성과 여론 사이에 ‘낑겨 있다’ 보니 갈팡질팡하는 모습도 노출하고 있다. X파일을 수사중인 서울중앙지검 공안2부는 수사 초기 이학수 삼성 부회장을 소환할 생각이 없었다. 이 사건과 관련, 이 부회장은 도청테이프를 갖고 있던 재미교포 박인회씨로부터 협박을 당한 ‘피해자’(참고인)이자 테이프 내용에 대해서는 참여연대로부터 고발을 당한 ‘피고발인’이다. 검찰은 이 부회장에 대해 최소한 피해자 조사라도 해야 하지만 수사 초기에는 박씨를 주로 상대했던 삼성측 변호사를 조사하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판단했다. 피고발인 자격으로 이 부회장을 조사한다는 계획은 애초부터 없었다.
그러나 이에 대해 ‘삼성 봐주기’라는 비판여론이 쏟아지자 ‘울며 겨자 먹기’식으로 지난주 이 부회장을 소환조사했다. 하지만 등 떠밀려 실시한 소환조사는 결국 국내외 취재진에게 이 부회장이 검찰청에 출두하는 모습의 사진거리만 제공했을 뿐 아무런 성과도 내지 못했다.
검찰이 이번 사태에서 중심을 제대로 잡지 못하는 이유 중에는 최근 들어 시민단체들이 삼성을 집중 공격하면서 그 중 하나로 삼성과 검찰의 유착 의혹도 물고 늘어지는 것에 대한 부담감도 있다. 참여연대는 최근 삼성그룹이 고위공무원·판검사·언론인 등 영향력 있는 인사들을 대거 영입, ‘문어발식 인맥’을 형성해 일종의 로비스트로 쓴다는 취지의 보고서를 냈다. 총 2백78명의 외부 고위직 출신 삼성 임원들을 분석한 이 보고서에는 판·검사 출신도 28명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참여연대는 X파일 사건과 관련해서는 수사팀과 삼성에서 영입한 검찰 출신 변호사들의 친분관계를 비교한 자료까지 별도로 내면서 검찰을 압박했다. 이 자료에 따르면 삼성 법무팀의 수장인 구조조정본부 법무실장 이종왕 변호사는 이종백 서울지검장과 사법시험(17회) 동기다. 또 삼성 구조본 부사장 서우정 변호사는 X파일 담당 부장인 서창희 서울지검 공안2부장과 법무부에서 함께 근무한 적이 있고, 구조본 상무인 김수목 변호사는 황교안 서울지검 2차장과 대검에서 함께 일했다.
이 같은 시민단체들의 공세에 실제 삼성 법무팀과 수사팀 간에 밀접한 관계가 없다 해도 검찰은 위축될 수밖에 없는 상황인 것이다. 여기에 도청테이프에는 삼성이 당시 검찰 주요 간부 7명에게 5백만원에서 2천만원의 ‘떡값’을 주었다는 대화까지 들어 있어 검찰을 더욱 곤혹스럽게 하고 있다.
과거 검찰이 삼성 관련 각종 사건을 수사한 결과도 현재의 검찰을 난처하게 하는 데 한몫을 하고 있다. 과거 검찰이 삼성SDS의 신주인수권부사채(BW)와 삼성생명의 비상장주식 등이 이건희 회장의 장남인 이재용씨에게 헐값에 넘어간 사건이나 삼성SDI가 근로자의 휴대폰을 불법적으로 위치 추적했다는 사건 등에서 잇따라 무혐의 결론을 냈기 때문이다.
이처럼 드러난 점만 보면 개개 사건의 처리는 물론, 인맥 형성 부분까지 검찰이 삼성과의 관계에서 의심을 살 만한 정황이 넘쳐나고 있는 셈이다. 검찰 관계자는 “때가 어느 때인데 검찰이 삼성이라고 봐주기 수사를 하겠느냐”며 억울하다고 말했다. 그러나 검찰이 “억울하다”는 백 마디 말보다 이번 사건의 수사 결과를 통해서만 국민적 의혹을 해소할 수 있을 것이라는 점을 법조계에서는 지적하고 있다.
이진기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