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3월23일 오전 부산 영주동 대청공원 충혼탑에 헌화한 정동영 의장. 국회사진기자단 | ||
‘탄핵풍’을 타고 원내 과반 이상 의석 확보에 자신감으로 팽배하던 당내 분위기가 공식 선거운동 개시일(2일) 이후 계파 간 알력이 불거지면서 이완 조짐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특히 총선전략과 정국대응 방향을 놓고 이견을 보였던 정동영 의장 중심의 당권파 대 친노(親盧) 직계그룹-재야·소장파 간 갈등은 상황에 따라 언제든지 다시 ‘휴화산’ 상태에서 ‘활화산’으로 변할 수 있다는 평가다.
수면 아래 잠복해 있던 당권파와 개혁그룹의 갈등이 표출된 데는 지역구·비례대표 공천, 그리고 선대위 인선이 직접적인 계기가 됐다.
정 의장 등이 자신들이 영입한 외부인사들과 측근들을 공천과 선대위 요직 인선 등에서 전진배치하는 등 ‘독주’하면서 상대적으로 소외감을 느낀 다른 계파의 ‘울분’이 폭발했다는 것이 일반적인 분석이다.
당권파에 대한 당내 불만은 다양한 경로로 표출됐다. 가장 적극적으로 문제 제기에 나선 인물은 유시민 의원과 문성근 국민참여운동본부장. 노무현 대통령의 핵심측근이자 ‘노사모’ 등 친노 대중조직에 큰 영향력을 가진 두 사람의 당권파에 대한 비판은 여권 내에 적지 않은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유 의원은 공천작업, 특히 비례대표 후보 선정 과정에서 나타난 정 의장 등의 ‘세 확산’ 시도를 문제삼았다. 비례대표 후보 선정작업이 본격화되기 시작한 3월18일 유 의원은 기자들에게 “과거 당을 저주하고 광고를 내서 악담을 퍼붓던 사람을 영입한다는 게 말이 되느냐. 열린우리당은 장관이나 신문사 편집국장 지낸 사람을 모셔 국회의원을 만들어주는 자원봉사 조직이 아니다”고 직격탄을 날렸다.
재야 출신의 한 핵심당직자도 “‘낮에는 국방군’ ‘밤에는 공산당’하는 소신 없는 사람들은 당이 어려움에 처하면 가장 먼저 도망가게 마련이다. 당의 지지율이 올랐다고 원칙없이 받아들였다가는 정체성이 뿌리째 흔들릴 것”이라고 가세했다.
두 사람의 ‘독설’에 가까운 비판은 당권파 중에서도 특히 정 의장을 표적으로 삼았다는 것이 당내의 일반적인 해석이었다. MBC 기자 출신인 정 의장이 1월11일 전당대회에서 대표로 선출된 이후 전직 장관 등 고위 관료 출신들과 언론계 인사 영입에 상당한 공을 들여왔음을 겨냥했다는 분석이다.
당권파를 향한 유 의원의 공세는 3월28일 비례대표 후보 순위 확정을 위한 투표장에서도 계속됐다. 그는 상임중앙위원회가 12명의 비례대표 전략후보를 선정하면서 이경숙 전 당 공동의장을 배제한 반면 탄핵안 가결 이후 민주당을 탈당, 열린우리당에 입당한 조성준 의원을 포함시킨 것을 강도높게 비판한 후 투표 불참을 선언했다.
문 본부장의 경우는 당권파들과의 정책·노선상 이견을 ‘분당’ 필요성과 연결지어 파문을 낳았다. 그는 1일 인터넷 ‘미디어 다음’과의 회견에서 “개인적으로 열린우리당이 (총선 후에) 분당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현재로는 정체성이 다른 사람들이 섞여 있는데, 정치개혁이라는 대의로 뭉친 다음에는 이념 성향에 따라 보수와 진보로 분리돼야 한다고 본다”고 말했다.
문 본부장은 또 “현재의 열린우리당은 말 그대로 잡탕이다. 나도 말이 안되는 사람들을 후보로 많이 뽑았다고 생각한다. 비판받아도 마땅하다. 일단 판이 바뀌면 국민들이 냉엄한 자세로 옥석을 가려낼 수 있을 것이다”고 말해 공천결과에 대한 불만을 감추지 않았다.
여기서 관심은 자연 공천과 선대위 구성에서 정 의장 등 당권파의 ‘입김’이 얼마나, 어떻게 작용했으며 결과는 어떠한지로 모아진다.
비(非)당권파에선 내놓고 “공천과 선대위 요직 인선이 당권파 핵심인사들, 특히 정 의장 측근들의 ‘잔치’가 되어 버렸다”고 주장하고 있다.
▲ 유시민 의원(왼쪽),문성근 국참본부장 | ||
정 의장측의 ‘독주’가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난 곳은 비례대표 인선과 선대위 인선 과정. 우선 비례대표 당선안정권에 든 정 의장측 인사는 홍창선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 총장(2번)-김명자 전 환경부 장관(3번)-박찬석 전 경북대 총장(6번)-조성태 전 국방부 장관(8번)-박영선 대변인(9번)-정의용 전 국제노동기구 이사회 의장(10번)-김현미 전 청와대 정무2비서관(11번)-정덕구 전 산자부 장관(16번)-민병두 전 <문화일보> 정치부장(18번)-김재홍 전 경기대 교수(24번)-서혜석 국제변호사(25번) 등 11명에 이른다.
이들은 대부분 정 의장이 주도적으로 영입한 인사들. 특히 김현미 전 비서관과 김재홍 전 경기대 교수를 빼곤 모두 정 의장과 신기남 이부영 이미경 상임중앙위원 등 당권파가 장악하고 있는 상임중앙위원회가 결정한 ‘전략후보’여서 비당권파의 곱지 않은 시선을 받고 있다. 여기에 계파 구분이 뚜렷하지 않은 일부 비례대표 후보도 잠재적인 ‘친(親) 정동영’ 계열로 봐야 한다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총선 선대위도 핵심인 기획·홍보 분야는 정 의장측 인사들이 사실상 ‘독점’하고 있다는 구설을 낳고 있다. 정 의장은 3월28일 기존의 박영선 대변인에 더해 양기대 전 <동아일보> 사회부 차장(경기 광명을 공천자)을 선대위 대변인에 임명했는데, 이 인사를 두고 뒷말이 무성했다. 양 전 차장이 정 의장의 고교-대학(서울대) 후배인 데다, 박 대변인 역시 정 의장이 영입한 MBC 후배이기 때문.
여기에 선대위 홍보위원장 역시 정 의장의 전주고 선배인 유균 전 KBS 보도위원이 맡아, 홍보 분야는 그야말로 ‘정동영 직할체제’라는 말이 무색하지 않을 정도다.
총선기획단도 상황은 비슷하다. 기획단은 김한길 전 의원이 지역구 선거(서울 구로을) 때문에 단장직을 내놓은 뒤 민병두 전 <문화일보> 정치부장이 후임으로 임명돼, 김현미 부단장(전 청와대 정무2비서관)과 함께 이끌고 있는 상황이다.
민 단장은 정 의장이 ‘삼고초려(三顧草廬)가 아니라 십고초려’ 끝에 영입에 성공했다고 밝혀 화제가 된 바 있다. 98년 정 의장이 국민회의 대변인 시절 출입기자를 했던 인연을 갖고 있다. 김 부단장이 같은 시기 국민회의 부대변인으로 일한 바 있는 것도 눈길을 끄는 대목. 정 의장이 선대위 공동대변인으로 임명한 양기대 전 <동아일보> 사회부 차장도 이 무렵 국민회의 출입기자였다.
여기에 정 의원이 대변인 시절 국민회의 총재권한대행을 역임했던 조세형 전 주일 대사도 지난달 31일 열린우리당에 입당, 선대위 상임고문을 맡아 주목을 끌고 있다. 역시 정 의장의 고교-대학 선배로 언론계(<한국일보> 편집국장) 출신의 4선 관록을 지닌 ‘거물’인 조 전 대사는 정 의장이 정치에 입문한 이래 ‘후견인’ 역할을 해온 인물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는 특히 김대중 정권 출범 직후인 98년 3월 당시 신기남 의원(현 열린우리당 상임중앙위원)에 대변인 자리를 물려준 정 의장을 5개월도 지나지 않은 그해 8월에 ‘롤백’시키는 등 정 의장을 각별히 지원해왔다. 여권 내에서는 조 전 대사의 정치적 비중과 정 의장과의 각별한 관계를 감안할 때 총선 후 정 의장이 본격적인 차기 행보를 하면 그가 ‘정동영 캠프’의 ‘좌장’으로 역할할 것이란 분석이 나오고 있다. 아울러 박권상 전 KBS 사장과 함께 ‘전언회’(전주고 출신 언론인 모임)를 만든 핵심 멤버인 조 전 대사가 언론계를 중심으로 ‘정동영 대세론’을 확산시키는 데 크나큰 역할을 하리란 전망도 제기되고 있다.
지역구 공천에서도 정 의장측은 ‘제 사람 심기’에 상당한 성과를 거뒀다는 평가다. 우선 눈에 띄는 것은 서울 강북을에 공천된 최규식 전 <한국일보> 편집국장. 최 전 국장은 공천작업 막판에 여론조사를 통해 ‘턱걸이’로 낙점을 받았는데, 정 의장의 전주고-서울대 1년 후배다. 과거 정치부 기자 시절 함께 민정당을 출입했던 최 전 국장을 영입하기 위해 정 의장은 그의 부인까지 만나 직접 설득했다는 후문이다.
전주고 동문으론 또 앞서 언급한 양기대 선대위 공동대변인 외에 채수찬 미국 라이스대 경제학과 교수가 있다. 채 교수는 정 의장의 지역구인 전주 덕진을 물려받았는데, 그는 2002년 민주당 대선 후보 경선 때부터 경제분야에서 정책조언을 한, 정 의장의 핵심 브레인으로 알려져 있다. 열린우리당내에서는 정 의장이 ‘전권’을 행사한 이번 공천에 미국 체류중이던 채 교수를 낙점해 급거 귀국시킨 것을 두고 “총선 후 정 의장의 본격적인 차기행보를 예고하는 것”이란 해석도 나오고 있다.
학연과 관계없는 영입인사 중엔 경기도 파주에 공천이 확정된 박정 파주미래발전연구소장이 눈길을 끈다. 유명 어학원을 운영하고 있는 박 소장은 2월27일 실시된 경선에서 우춘환 전 도의원에게 패배했지만, 우 전 의원의 선거법 위반사례가 드러나 공천이 박탈되면서 구사일생으로 출마 기회를 잡았다. 박 소장은 정 의장 아들의 미국 조기유학 상담과정에서 인연을 맺은 것으로 전해졌으며, 정 의장은 이른바 ‘스타 강사’인 그의 지명도와 참신성을 높이 사 영입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밖에 CEO(최고경영자) 출신 중 대표적인 영입인사로 꼽히는 이계안 전 현대캐피탈 회장(서울 동작을)과 김선배 전 현대정보기술 대표(서울 서초을)도 정 의장이 직접 영입작업에 나서 입당시킨 경우다. 이들 외에 이환식 전 프랑스 파리 제8대학 교수(서울 강남을)와 박세용 동남회계법인 대표(서울 강남갑), 함종길 변호사(서울 서초갑) 등 열린우리당이 약세지역인 ‘강남 벨트’의 라인업도 정 의장의 작품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물론 정 의장측은 당의장이 총선을 위해 외부 인사 영입에 적극 나서는 게 당연한 것 아니냐는 입장이다. 정 의장이 아니었으면 그만한 인물들을 데려오기 힘들었을 것이라는 얘기도 들려온다. 그러나 ‘셈법’이 남다른 정객들은 정 의장 행보의 행간을 자꾸 바라보고 있다.
이준원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