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성탈출>은 개봉일을 갑작스럽게 앞당겨 상도덕에 어긋난다는 비판을 받았다. 왼쪽 작은 사진은 변칙개봉에 적잖은 타격을 받은 <신의 한 수>와 <좋은 친구들> 스틸컷.
이런 상황을 지켜보며 <혹성탈출>의 직배사인 이십세기폭스코리아를 성토하는 목소리는 영화계 전반에서 나오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트랜스포머>를 상대로 선전하고 있는 <신의 한 수>는 <혹성탈출>과 일주일 일찍 맞닥뜨리게 되면서 확보해놓은 개봉관을 내줘야 했고, 같은 날 개봉된 배우 지성, 주지훈 주연 영화 <좋은 친구들> 역시 강력한 경쟁작과 나란히 출발선에 서야 하는 부담을 안았다. <사보티지> 수입사인 메인타이틀픽쳐스 이창언 대표는 “이번 변칙 개봉은 시장의 기본 질서를 위태롭게 하는 심각한 상황”이라고 강도 높게 비판했다.
하지만 현실을 직시할 필요가 있다. 중요한 건 ‘바뀔 게 없다는 것’이다. 수많은 논란을 뚫고 <혹성탈출>은 발표한대로 10일 개봉됐다. 어떤 비판을 가해도 이십세기폭스코리아는 개봉일을 다시 미룰 생각이 없었을 것이다. “등급 심사가 예상보다 빨리 나왔다”며 영상물등급위원회와 다른 이야기를 꺼내고 “영화에 대한 관객의 성화와 폭발적인 기대가 이어져 개봉을 앞당겼다”는 폭스에게 ‘자비’를 기대하긴 어렵다.
하지만 이 사건을 다른 방향으로 해석해볼 필요가 있다. 이창언 대표의 주장처럼 “시장 질서를 위태롭게 할” 만한 일이 벌어졌음에도 이를 규제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정해진 개봉일대로 움직여야 할 규제나 법적인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개봉일은 전적으로 제작사와 배급사가 정한다. 대작은 피하고 틈새시장을 찾아가며 개봉일을 잡기 위해 좌고우면하는 이유다. 블록버스터가 있으면 상영관을 잡기 힘들어 아예 관객과 만날 기회조차 줄어든다. 그래서 상대적으로 규모가 작은 영화일수록 타 배급사와 제작사의 상황을 따져 가장 유리한 개봉일을 고른다.
그럼에도 이번과 같은 사태가 벌어졌을 때 상대를 비판할 수 있는 근거는 ‘동업자 의식’뿐이다. 같은 영화 업계에 종사하는 사람으로서 개봉일을 변경해 상대방에 타격을 주는 것은 상도의에 어긋난다는 주장이다.
하지만 이건 엄밀히 말해 상업 논리에는 위배된다. 기업의 최대 목표는 이윤 추구다. 법에 저촉되지 않는 선에서 이윤을 극대화하기 위해 무슨 방법이든 동원하는 게 기업의 논리다.
게다가 <혹성탈출>을 배급하는 이십세기폭스코리아는 해외 직배사다. ‘충무로’가 아니라 ‘할리우드’라는 의미다. 감성보다 이성이 앞서는 미국 본사의 결정을 동업자 의식을 앞세워 한국지사에서 뒤집을 근거를 찾기 어렵다. <혹성탈출>의 개봉일 변경에 대해서도 이십세기폭스코리아 외 다른 해외 직배사는 침묵을 지키고 있다. 그들이 ‘영화인’이라 불리는 충무로의 테두리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혹성탈출>의 개봉일 변경이 유독 질타를 받은 실질적 이유는 상반기 극장 상황에서 답을 찾을 수 있다. 8일 오후 영화진흥위원회가 발표한 ‘2014년 상반기 한국영화산업 결산’ 자료에 따르면 올 상반기 국내 영화시장은 지난해와 비슷한 규모를 유지했으나 한국영화 관객수는 4154만 명으로 2009년 이후 최저 성적을 기록했다. 지난해 같은 시기와 비교하면 무려 25.2%가 감소했다. 지난해 상반기 한국 영화를 봤던 관객 4명 중 1명이 외화로 발길을 돌렸다는 뜻이다.
2월까지는 분위기가 좋았다. 지난해 12월 개봉된 후 올해로 넘어온 <변호인>을 비롯해 1월 개봉작인 <수상한 그녀>가 선전하며 50%가 넘는 점유율을 기록했다. 하지만 3월부터 상황은 급반전됐다. 3월 점유율 26.2%, 4월 점유율 21.9%에 머물렀다.
5월 초부터 <역린>과 <표적>, <끝까지 간다>와 <인간중독> 등이 관객몰이에 나섰지만 4월 점유율 역시 49.2%로 외화에 뒤졌다. 상반기 마지막 달인 6월은 <우는 남자> <하이힐> <황제를 위하여> 등이 잇따라 개봉되며 승부수를 띄웠으나 결과는 처참했다. 점유율은 28%에 그쳤다.
국내에서 흥행 돌풍을 일으킨 <엣지 오브 투모로우>.
반면 외화는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1203만 명이 늘어난 5497만 명을 동원했다. 애니메이션 영화 최초로 1000만 고지를 밟은 <겨울왕국>을 필두로 <엑스맨:데이즈 오브 퓨처 패스트>와 <어메이징 스파이더맨2>, <엣지 오브 투모로우>와 <캡틴 아메리카:윈터솔져> 등이 연이어 큰 성공을 거둔 덕이다.
최근 들어 업계에는 “볼만한 한국 영화가 없다”는 이야기가 다시금 고개를 들고 있다. 충무로 영화인이 가장 두려워하는 이야기다. 2006년 엄청난 성공을 거둔 영화 <괴물>을 기점으로 충무로에 자본이 몰리면서 우후죽순 격으로 제작된 한국 영화들이 잇따라 참패한 이후 지난 8년은 “한국 영화도 볼 만하다”고 대중의 인식을 전환하는 과정의 연속이었다. 하지만 상반기 한국 영화 시장이 흔들리며 위기의식이 팽배해졌다.
항간에는 2006년 시행된 스크린쿼터 축소 문제를 다시 끄집어내는 이들도 있다.
한 영화계 관계자는 “스크린쿼터가 축소되면 한국 영화가 고사할 것이란 전망이 많았다. 하지만 한국 영화는 오히려 크게 성장해왔다. 내내 성장 곡선을 그리던 충무로가 상반기 크게 위축되며 섣부른 우려까지 나오는 것 같다”며 “<혹성탈출>의 변칙 개봉이 동업자 의식에는 위배된다고 하지만 ‘동업자 의식’은 언제든 깨질 수 있는 허울뿐인 약속이다. 상대방을 탓하기 전에 외화에도 흔들리지 않을 탄탄한 작품을 만드는 것이 먼저”라고 충고했다.
김소리 대중문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