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재야 대통령’ 장준하(왼쪽)와 ‘권력의 2인자’ 김재규. 지난 75년 이 두 사람은 ‘거사’를 함께 준비했던 것으로 밝혀졌다. | ||
장준하의 장남인 장호권 <사상계> 대표(56)는 <일요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선친은 당시 ‘거사’를 앞두고 재야인사뿐만 아니라 군 장성급 인사들과도 집중적인 물밑 접촉을 가졌으며, 거기에는 김재규 부장도 물론 포함되어 있었다”고 밝혔다. 그는 “평소 선친은 김 부장을 ‘민주화 일을 같이 할 애국군인’이라고 평할 정도로 두 분은 의기투합하는 관계였다”고 회고했다. 하지만 이 계획은 성사 직전 장준하의 갑작스런 의문의 죽음으로 그대로 역사 속으로 묻혀 버렸다.
박정희 대통령과 장준하. 이들은 ‘숙명의 맞수’로 불린다. 일제시대 광복군 대위 출신이었던 장준하는 일본군 장교 출신의 박 대통령을 인정하지 않았고, 박 대통령 역시 그런 장준하에게 적개심을 감추지 않았다. 3공화국에서 대통령과 야당(신민당) 국회의원으로 만난 두 사람은 이후 75년까지 ‘정권 퇴진 운동’과 ‘탄압’으로 맞섰다. 그리고 그 사이에 김재규가 자리 잡고 있다.
‘10·26 재평가와 김재규 장군 명예회복 추진위원회’의 집행위원인 이해학 목사는 지난 10월26일 ‘10·26의거 26주년 기념행사’ 기념사를 통해 “고 장준하 선생은 김재규 장군과 ‘이대로는 안 된다’는 공감대를 함께 하고 있었다. 장 선생은 ‘학생들의 힘만으로는 유신체제 청산을 할 수가 없다. 군이 필요하다’면서 ‘우리 군에도 양심 있는 군인이 있다’고 말씀하셨다. 그 군인이 바로 김재규 장군이다. 두 분은 굳은 밀약이 있었다”고 주장했다.
최근 화제를 일으키고 있는 안동일 변호사(김재규의 변호인)의 저서 <10·26은 아직도 살아 있다>에도 두 사람의 밀착된 관계를 암시하는 내용이 김재규의 진술을 통해서 소개되고 있다.
기자는 사실 확인을 위해 장준하의 장남 장호권 대표를 여의도에 있는 그의 사무실에서 만났다. 그는 현재 <사상계>의 복간 준비를 서두르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군에서 제대한 70년부터 75년 선친의 사망 때까지 약 5년간 선친의 수행비서 역할을 하면서 모든 심부름을 도맡았다고 한다. 그래서 당시의 상황을 지금도 비교적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두 사람의 인연에 대해서 장 대표는 “선친이 60년대 국회의원 시절 당시 국방위원회에서 활약했는데, 국정감사 현장 등에서 보여준 선친의 군에 대해 깊은 지식과 진한 애정이 현역 장성이었던 김 부장에게는 무척 인상 깊게 다가왔다고 한다. 그러던 중 69년경 당시 현역 복무중이던 내가 휴가를 이용, 정치 유세장에 참석한 것이 문제가 되자 선친이 당시 보안사령관이었던 김 부장을 직접 찾아가서 오랜 시간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그것이 두 분의 실질적인 첫 만남이었다. 이 대화에서 선친이 김 부장에 대해 상당히 깊은 인상을 받았다. 박정희 군사정권의 보통 장성들하고는 많이 다르다고 하셨다”고 전했다.
실제 박 정권 당시에도 군 장성 가운데서는 장준하에 대해 상당히 호감을 표시한 인사들이 많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채명신 장군 또한 얼마전 한 인터뷰에서 “만약 75년 사망하지 않았다면 장 선생이 DJ보다 먼저 대통령이 됐을 것”이란 말을 하기도 했다.
장준하는 광복 30주년이 되는 75년 8월15일을 D데이로 하는 모종의 ‘거사’를 준비했다. 이 거사는 세간에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재야인사들 주변에서는 “장 선생이 사망하지만 않았다면 유신 정권의 종말이 4년은 더 앞당겨졌을 것”이라고 아쉬워하는 이들이 많다. 이 거사의 성격에 대해서는 재야인사와 학생 종교계가 총동원되는 대규모 집회라는 얘기도 있고, 군부 동조 세력까지 포함된 일종의 쿠데타와 같은 성격이라는 주장도 있다. 이에 대해 장 대표는 “쿠데타로까지 표현하기엔 좀 과장되지만 군부가 포함된 것은 사실”이라고 털어놓았다.
그는 “광복군 장교 출신인 선친은 평소에도 정보 보안 유지가 몸에 밴 분이다. 내가 직접 수행비서 역할을 했지만 당시 ‘거사’는 철저한 보안 속에 극비리에 진행됐다. 정치계, 재야, 종교계, 법조계, 학원, 군부 등을 선친은 철저히 따로 따로 관리했고, 서로 연관성을 두지 않았다. 그 모든 링커 역할만 선친이 했다”고 전했다.
그는 “솔직히 나도 D데이가 언제인지는 전혀 모른 채 막연히 불안함과 긴박함만 느끼고 있을 때였다. 박 정권도 낌새를 느꼈는지 당시 밀착 감시가 정말 대단했다. 심지어 내가 지붕을 타고 다니며 심부름을 할 정도였다”고 밝혔다.
장 대표는 “당시 선친은 여러 명의 군 장성들을 비밀리에 만났으며 거기에는 물론 김 부장도 포함된다”고 밝혔다. 그는 “당시 중앙일보사가 있던 서소문 근처를 나와 함께 지나다가 선친이 불쑥 ‘냉면이나 먹자’며 한 허름한 냉면집을 쑥 들어가셨다. 거기에 김 부장이 있었다. 두 분끼리만 밀담을 나누시고 나는 다른 테이블에서 혼자 냉면을 먹으며 기다렸다”고 당시의 기억을 떠올렸다. 장 대표의 기억이 정확하다면 당시 김재규는 3군사령관을 막 전역한 직후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73년 12월부터 그는 중정 차장에 임명됐다.
▲ 장준하-김재규 밀약 사실을 밝힌 장준하의 장남 호권씨. 그는 현재 <사상계> 복간을 준비하고 있다. 우태윤 기자 wdosa@ilyo.co.kr | ||
우연의 일치일까. 시기상 이 거사 계획 보다 2~3년 정도 앞서기는 하지만 당시 재야인사였던 김지하씨가 박 정권에 회의를 품고 있던 이종찬 당시 중정 간부 등 영관급 현역 장교들과 쿠데타를 모의했다는 비화가 얼마 전 밝혀지기도 했다. 물론 당시 장준하와 김지하씨는 의기투합할 수 있는 밀착된 재야 ‘동지’ 관계였다. 이 계획은 73년경 이종찬씨가 해외 발령이 나면서 흐지부지됐으나 실제 전혀 불가능할 것 같은 ‘재야인사-군부’의 밀약이 처음 밝혀진 셈이다.
‘쿠데타설’에 대해서 장 대표는 “군을 동원한 쿠데타 계획은 아니었을 것으로 본다. 다만 평소 군이 중요하다는 말씀을 자주 하셨기에 군을 어떤 식으로든 이용하려 했던 것은 틀림없다. 내 생각으로는 거사 당일 전국에 걸친 대규모의 동시다발적인 성명 발표와 집회 데모 등이 벌어지면 반드시 계엄령이 선포되고 군부가 투입될 것이므로 그때 군의 도움을 받기 위해 선친이 최대한의 군 인맥을 동원해서 어떤 장치를 만들어 놓은 것으로 보고 있다. 군 출동을 반대하거나 최소한 중립성은 유지해주도록 하는 사전 정지 작업을 하신 것으로 알고 있다”고 밝혔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이 거사는 실행에 옮겨지지 못했다. 내부 정보 유출로 8월15일 날짜를 5일 늦췄던 것. 하지만 새 D데이를 사흘 앞둔 8월17일 장준하의 갑작스런 의문사는 결국 거사를 좌초시키고 말았다. 당시 거사 계획을 감지한 채 밀착 감시했던 박정희 정권이 심각성을 깨닫고 거사의 중심 역할을 했던 장준하를 제거한 것이라고 장 대표를 비롯한 대부분의 재야인사들은 지금도 굳게 믿고 있다.
장 대표는 “선친 사망 직후 김 부장이 나를 찾아와서 ‘장 선생은 그냥 죽은(사고사한) 것이 아니다’라고 굉장히 비통해 하며 ‘그래도 일단 가족들이 살아야 한다’며 조심할 것을 당부했다”고 한다. 박 정권의 탄압은 남은 가족들에게도 계속됐고 생활이 굉장히 궁핍해지자 김재규는 당시 서울 변두리의 20평형대 아파트 전세금을 구해 주는 등 물질적 도움도 상당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 역시도 당시 비록 중정부장이었지만 박 정권의 눈치를 몹시 보는 듯했다고 전했다.
안 변호사에 의하면 실제 김재규는 72년 10월 유신 선포 이후 박 대통령 암살을 여러 차례 기도했다고 법정에서 진술한 것으로 밝혀졌다. 당시 김재규는 “72년 유신헌법을 보면서 이는 명백한 독재 헌법이다, 이 헌법을 타도해야겠다는 생각이 마음속에 움텄다”고 진술했다는 것.
김재규의 주장에 따르면 72년 10월 유신이 반포된 직후 당시 박 대통령이 자신이 사령관으로 있던 3군단을 시찰할 때 그를 연금해놓고 그 자리에서 녹음기를 갖다 대고 하야를 권고하려고 했으나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고 밝혔다. 이후 그는 74년 9월18일 건설부장관 사령장을 받으러 갈 때 바지주머니에 권총을 갖고 갔고, 75년 1월27일경 대통령의 건설부 초도순시 때도 태극기 밑에 권총을 숨기는 등 여러 차례 기회를 엿봤다고 밝혔다. 우연히도 장준하의 ‘거사’ 준비 시기와 일치하는 대목이다.
하지만 75년 8월 이후 부터는 한동안 그런 계획이 나타나지 않았다. 그러던 중 79년 부마사태 등으로 정국이 극도로 혼란스러워지자 또다시 그런 계획이 나타난다. 79년 4월 궁정동 안가에 육해공군 참모총장을 불러 기회를 엿보다가 무산됐고, 이후 10월26일에 결국 실행에 옮겼다는 이야기다.
이에 대해 장 대표 역시 “김 부장은 선친과 69년경 첫 대화를 가진 이후 자주 만나 뜻을 함께 해 왔고, 75년 8월 거사일 직전까지도 꾸준히 접촉할 정도로 함께 해왔기 때문에 김 부장의 거사 계획이 선친의 뜻과 일치하는 대목이 있다”며 “결국 10·26도 선친의 영향에서 힘입은 바가 큰 것으로 확신한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