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상명 대검차장의 검찰총장 내정을 놓고 일각에서는 ‘각본론’을 제기하고 있다. 이종현 기자 jhlee@ilyo.co.kr | ||
그간 암묵적으로 갈등을 빚어온 현 정부와 검찰. 때문에 검찰 주변에서는 법무부 장관의 소신 발언과 검찰총장의 소신 용퇴의 배경에 대해 ‘별의별’ 얘기가 다 흘러나왔다. 대다수 검찰 인사들은 내심 “검찰 장악의 구체적 시나리오가 실현된 것”이라며 강하게 흥분했다. 일부 검찰 고위 간부 출신 법조인들도 “현 정부는 검찰을 마지막 구시대 이데올로기로 여기고 있다”며 이번 파문을 외부로 나타난 현상 그대로 보지 않고 있는 시각이다. 심지어 “법무부 장관 수사권 지휘와 관련해서 나타난 일련의 과정들은 노무현식 코드 인사를 위한 짜고 치는 고스톱”이라는 다소 수위 높은 ‘독설’도 검찰 주변에서는 쉽게 들을 수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모든 관심은 자연스레 노무현 대통령이 지명한 정상명 검찰총장 내정자(현 대검차장)에게 쏠린 상태다. 무엇보다 정 내정자가 노무현 대통령과 보통 인연이 아니라는 점이 검찰 조직을 아는 사람들의 머리를 복잡하게 만들고 있다. 정 내정자는 대통령과는 사시 17회 동기로 요즘도 두 부부가 만나 자주 식사도 하고 골프까지 치는 사이다.
천정배 법무부 장관의 느닷없는 수사권 지휘 발동 - 취임 이후부터 현 정부와는 뭔가 코드가 맞지 않았던 김종빈 총장의 퇴진 - 노 대통령과 보통 사이가 아닌 정상명의 등장. 검찰로서는 마치 각본을 짜 놓은 것처럼 일사불란하게 이어진 몇주간이었다.
그런 점에서 이러한 검찰 드라마의 최종편이랄 수 있는 총장 인선 이후 정 내정자의 인맥, 성향, 앞으로 검찰 조직 내의 판도 변화 등에 일반인의 관심이 쏠리고 있다.
현 정부 들어 정 내정자는 차기 총장 후보감으로 꾸준히 평가돼 왔다. 그러나 1순위는 아니었다. 지난 여름까지만 해도 사시 동기이자 동갑내기인 이종백 현 서울중앙지검장에게 다소 밀리는 추세였다는 게 검찰 관계자들의 공통된 반응이었다. 더구나 TK(대구·경북) 출신에 대한 본능적 거부감을 갖고 있던 일부 청와대 및 여당 386 인사들이 경북 의성 출신인 정 내정자를 탐탁지 않게 여기고 있었기 때문에 정 내정자의 총장 입성은 사실상 어렵지 않겠냐는 관측이 지배적이었다.
하지만 ‘정상명 대세론’이 서서히 흘러나오면서 전세가 역전되기 시작한 것은 삼성 이건희 회장의 사돈인 대상 그룹 임창욱 회장의 비자금 조성 사건 의혹이 불거지면서다. 이 비자금 사건에 대한 검찰의 ‘봐주기 수사’ 의혹이 제기되면서 인천지검장 시절 임 회장에 대해 참고인 중지 결정을 내린 이 지검장이 총장 후보에서 사실상 멀어지게 된 것.
이때부터 정 내정자는 비록 TK 출신 검사라는 약점을 갖고 있었지만, 노 대통령과 막역한 사이라는 점이 크게 부각되면서 검찰 내부에서조차 검찰과 현 정부의 중간 다리 역할을 맡을 유일한 대안으로 꼽히기 시작했다. 허준영 경찰청장의 경북고 선배인 정 내정자는 또 여권과 검찰 간 갈등은 물론 검찰과 경찰 사이에서 엉킨 실타래를 푸는 데도 제격이었다.
정 내정자를 잘 안다는 검찰 출신의 한 변호사는 “정 내정자는 지난해 법무차관으로 재직시 상급자인 강금실 전 법무부 장관이 업무에서 완전히 손을 떼 누가 봐도 어려움에 처할 듯 했지만, 무리 없이 업무를 처리해 노 대통령은 물론 정 내정자에게 관심을 두지 않던 측근들로부터도 상당한 호평을 받았던 것으로 안다”며 “정부로서는 검찰 인사 중 유일하게 대화가 가능한 상대라는 판단을 했을 테고, 검찰 내부 분위기도 정 차장 정도라면 손해 본 장사는 아니라는 쪽으로 대세가 모아진 것 같다”고 전했다.
당초 정 내정자가 차기 총장 1순위로 부각되면서 보수적인 성향의 검찰 관계자들 사이에서는 정 내정자가 현 정부와 여러 공통분모를 갖고 있다는 점을 매우 부담스러워 하는 시각이 많았다. 하지만 검사로서의 탁월한 수사 실력뿐 아니라 친화력, 그리고 타고난 승진운까지 겸비했다는 평가가 이어지면서 검찰 인맥의 교통정리도 이뤄졌다는 후문이다. 검찰 내부의 정통한 관계자도 “대상 문제가 불거진 후 각계 라인으로 퍼져있던 검찰 인맥이 한쪽으로 규합되는 양상을 보였는데 그 중심은 정 내정자였다”고 전했다.
실제 9월 이후 서울중앙지검의 TK 출신 검사들이 정 내정자 쪽으로 대거 라인을 바꿔 탔다는 것은 기정사실처럼 받아들여지는 얘기. 심지어 이종백 서울중앙지검장의 고교 및 대학 직계 후배인 측근 지검장급 인사가 정 내정자 라인으로 선회했으며, 그 인사가 총장 청문회 이후 새로이 임명될 빅4자리 중의 한 자리를 차지할 수 있을 것이라는 소문까지 나돌고 있는 실정이다.
▲ 정상명 검찰총장 내정자가 지난 10월24일 대검차장실에서 기자들과 간담회를 갖고 있다. 정 내정자는 탁월한 친화력과 조정력이 장점으로 꼽히고 있다. 사진제공=동아일보 | ||
검찰총장 인사 청문회 이후 있을 서울중앙지검장 및 대검 중수부장, 공안부장, 법무부 검찰국장 등 이른바 검찰 내 빅4로 불리는 인사와 함께 앞으로 어떠한 인맥이 검찰 내에서 중용되고 이름을 떨칠지 여부도 태풍의 핵이다.
일단 정 내정자는 사시 17회 동기인 안대희 서울고검장, 이종백 서울중앙지검장, 임승관 부산고검장, 이기배 수원지검장, 유성수 의정부지검장 등 5명과 빅4 인사들에 대해 유임 입장을 밝힌 상태.
그러나 사시 동기들 모두 주변에서 “일단 떠난 뒤 다음을 노리는 게 가장 현명한 처사”라는 반응이 들려오자 고심에 고심을 거듭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정 내정자와 사시 17회 동기인 ‘국민검사’ 안대희 서울고검장실 관계자도 “고검장께서 아직 용퇴를 결정하는 서류에 사인을 하고 있지 않은 상황이다. 내심 고민중”이라고만 밝혔다.
정 내정자와 친분이 있는 법조계 인사들은 정 내정자의 스타일로 보아 ‘온고이지신’의 지혜와 원칙이 앞으로의 검찰 인사에 적절하게 투영되지 않겠냐는 반응이다. 정 내정자와 고교, 대학 동문이자 검찰 출신인 A변호사는 “정 내정자는 한쪽으로 치우침이 없다. 현 정부가 바라는 개혁이라는 코드를 우선하겠지만, 검찰 조직 특유의 보수성도 무시할 수는 없을 것이다. ‘개혁적 보수’가 인사 원칙으로 자리 잡을 것으로 본다”고 전망했다.
그러나 한편에서는 벌써부터 TK출신 검사들의 대거 중용설도 들린다. 일부 검찰 관계자들 사이에서는 ‘정상명 황태자’로 검사 3~4명의 이름까지 거론되고 있는 상황이다.
정 내정자가 현 정부와 뜻이 맞는 검찰총장이라는 평가지만 국가보안법과 검·경 수사권 조정 문제에 대해서는 일단 검찰쪽의 입장을 강하게 대변할 것이라는 관측이다. 공안 전문 검사라는 평가도 받은 바 있는 정 내정자로서는 공안 사건에 대해 불구속 수사 원칙을 내세우고 있는 대통령과 법무부 장관과의 논리 대결이 불가피할 전망이다.
또한 청와대가 경찰도 수사주체로 명시하는 방향으로 형사소송법을 개정하고, 경찰의 독자 수사 대상 범죄를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내용의 검·경 수사권 조정 기준안을 마련한 점도 정 내정자로서는 약간은 당혹스러운 부분. 그가 검찰을 대표하는 수장으로서 청와대의 결정에 어떠한 응답을 내놓을지 주목되는 대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