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7월 10일 국회 ‘세월호 침몰사고의 진상규명을 위한 국정조사 특별위원회(세월호 국조특위)’에 출석한 김기춘 청와대 비서실장이 자신의 거취와 관련한 야당 의원들의 추궁에 이렇게 답했다. 노무현 정부 청와대 출신인 김현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이 “대통령이 세월호 참사 이후 ‘무한책임을 진다’면서 다섯 번이나 사과를 했다. 비서실장이 대통령을 잘 보좌하지 못하고 누를 끼쳤다. 304명의 희생자를 낸 이 어마어마한 참사 앞에 사퇴하는 게 책임 있는 태도 아니냐”고 질타하자 내놓은 답이었다. 김 실장은 “자진해서 물러나라”는 김 의원의 공세에는 아무런 답변을 하지 않았지만, 그가 “자리에 연연하지 않는다”며 자신의 거취에 대해 공개적으로 발언하기는 이날이 처음이었다.
세월호 특위에서 야당 의원들이 자진사퇴를 촉구하자 김기춘 실장은 “자리에 연연하지 않는다”고 답했다. 이종현 기자 jhlee@ilyo.co.kr
공교롭게도 김 실장은 취임 1년을 눈앞에 두고 있다. 박 대통령이 지난해 여름휴가를 마친 직후인 8월 5일 허태열 전 비서실장을 포함해 수석비서관 이상 인사를 단행하면서 김 실장을 등용했다. 이는 ‘휴가 뒤의 학살’이라는 반응을 낳을 정도로 당시 청와대 직원들에게 큰 충격으로 받아들여졌다. 박 대통령은 7월 말로 알려진 이번 여름휴가 기간 내내 청와대에 머물며 하반기 국정운영 구상을 가다듬을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꼭 1년 전처럼 이번 박 대통령의 휴가 구상에 비서실장 교체와 같은 청와대 개편이 포함될지 주목하게 만드는 대목이다.
소위 ‘김기춘 경질설’은 어제 오늘의 얘기가 아니고, 심지어 여당 내에서까지 김 실장을 교체해야 한다는 주장이 수차례 공개적으로 제기돼 왔지만 박 대통령은 요지부동이었다. 상당수의 청와대 참모들이 “김기춘 없는 박근혜의 청와대는 없다”고 말할 정도로 김 실장에 대한 박 대통령의 신뢰와 집착은 흔들림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 실장의 거취가 다시 주목받는 이유는 그동안의 상황변화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김 실장이 반드시 남아 있어야 할 이유가 사라졌다. 안대희·문창극 전 국무총리 후보자가 연달아 낙마하는 등 인사 참사가 이어지면서 새누리당 지도부 내에서도 김 실장을 경질해야 하는 목소리가 나왔지만, 박 대통령을 지근거리에서 보좌하는 청와대 참모들은 그때마다 “다 내보내면 일은 누가 하느냐”고 항변했다. 세월호 참사 부실대응 책임을 물어 정홍원 총리의 사표를 수리하기로 하고, 심지어 박근혜 정부 넘버 2·3로 불렸던 남재준 전 국가정보원장과 김장수 전 청와대 국가안보실장을 경질하면서도 박 대통령이 김 실장을 경질하지 못하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다는 얘기였다.
그 이유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은 청와대 인사위원장을 맡고 있는 김 실장을 경질할 경우 총리와 장관 등 내각 개편, 청와대 참모진 개편 등 박 대통령의 인적쇄신 구상을 실행에 옮길 방법이 없다는 것이었다. 모든 내각 인사와 청와대 참모들이 인적쇄신 대상으로 낙인찍힌 상황에서 김 실장마저 사라지면 누가 박 대통령을 돕겠느냐는 논리였다.
지난 10일 세월호 국회특위에 희생자 유가족들이 많이 참석한 가운데 김기춘 실장을 비롯한 청와대 비서진들이 증언하고 있는 모습. 이종현 기자 jhlee@ilyo.co.kr
청와대 참모진 개편 때 박 대통령의 복심으로 불렸던 이정현 전 홍보수석까지 교체된 걸 보면 이런 주장이 아예 근거 없는 얘기는 아니라는 점을 알 수 있다. 하지만 뒤집어 보면 청와대 참모진 개편은 물론 2기 내각 출범까지 일단락된 지금 상황에서는 ‘김기춘 실장이 반드시 남아 있어야 할 이유’는 사라졌다고 볼 수 있다.
김 실장의 존재가 박 대통령에게 득보다 실이 되고 있고, 이런 상황은 시간이 갈수록 더 심해질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는 것도 무시 못 할 변화다. 우선 2기 내각이 출범했지만, 이 과정에서 되풀이된 인사 참사에 대한 책임론은 여전하다. 총리 후보자 2명이 연쇄 낙마한 것도 모자라 사회부총리를 겸하기로 돼 있던 김명수 전 교육부 장관 후보자는 현 정부 최초로 인사권자인 대통령의 지명철회라는 불명예스런 방식으로 물러났다.
아울러 정성근 전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후보자의 거취를 두고는 청와대 기류가 불과 하루 사이에 임명 강행 쪽에서 자진 사퇴로 널뛰기를 하면서 혼란과 비판을 자초했다. 청와대의 인사검증 능력, 정무적 판단력, 여론 민감성 등이 모두 도마 위에 올랐지만 박 대통령의 사과 한 마디 없었고, 책임지는 사람도 없었다. 인사위원장이자 대통령 보좌를 총괄하는 김 실장이 다시 집중 타깃이 될 수밖에 없다.
새누리당뿐 아니라 청와대 내에서도 김 실장을 무능과 혼선의 책임자로 지목하는 목소리가 나오는 것도 이전과 달라진 상황이다. 세월호 참사 수습 과정에서 박 대통령이 ‘콘크리트 지지율’이 무너질 정도로 극도의 무능력과 혼선을 드러내면서 그동안 입안에만 맴돌고 있던 목소리들이 스멀스멀 흘러나오기 시작했는데, 김 실장 교체 필요성을 거론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한 청와대 관계자는 “세월호 참사를 겪으면서 우리 자신부터 근본적으로 변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공감대가 청와대 참모진 사이에도 형성됐다”며 “과연 김기춘 체제로 이런 시대적인 변화 요구를 충족시킬 수 있을지에 대해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지금 국민들이 청와대에 바라는 것은 ‘대통령 혼자 결정하지 말고 국민들의 목소리를 들어라’, ‘참모나 장·차관들은 받아쓰기만 하지 말고 대통령과 토론하라’는 것 아니냐”며 “일사불란함과 효율성을 강조하는 김 실장의 스타일로는 이런 요구에 응답하기 어렵다”고 강조했다.
이런 반응은 이미 청와대 내에서 ‘기류’를 형성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지난 7월 16일 오전 김기춘 실장 주재로 열린 수석비서관 회의에서도 대부분의 수석들이 정성근 전 후보자 임명을 강행해선 안 된다는 의견을 냈던 것으로 전해졌다. 박 대통령이 전날 정 전 후보자 임명을 강행하겠다는 사인을 내놨는데도 수석들이 반기를 들었다는 얘기다.
한 청와대 행정관은 “수석들이 새누리당 내부 기류까지 전달하면서 워낙 강하게 얘기하는 바람에 김 실장이 대통령에게 이런 분위기를 전달했고, 그게 정성근 전 후보자의 자진 사퇴를 유도하는 데 중요한 이유가 된 것으로 안다”며 “윗선의 결정 사항에 대해 참모들이 집단적으로 반대 의견을 낸 것은 이전에는 없었던 일”이라고 전했다.
김무성 대표를 정점으로 한 비박근혜 성향의 새 지도부가 새누리당에 들어서면서 여당 내의 ‘김기춘 비토’ 기류가 더 강해졌다는 것도 김 실장의 입지를 축소시키는 요인으로 분석된다. 김 대표는 당대표 경선 과정과 당선 후 발언 등을 통해 박 대통령에게 할 말은 하겠다는 의지를 여러 차례 밝혔다. 박 대통령의 독주가 여당에게 부담이 되는 상황을 방치하지 않겠다는 뜻이다. 여당의 특성상 대통령과 직접 충돌하는 모습은 피해야 하는 만큼 김 대표 등의 비판의 칼날은 김 실장을 향할 수밖에 없다. 더욱이 김 대표는 김 실장과 구원이 있다. 김 대표는 전당대회 전 <일요신문> 인터뷰에서 “정권이 시작된 후 김 실장 등이 박근혜 대통령과 내 사이를 갈라놨다”고 목소리를 높인 바 있다.
이런 전반적인 상황과 환경의 변화와 별개로 김 실장 스스로 자신의 거취를 정리할 가능성도 제기되고 있다. 김 실장은 지난해 8월 취임 당시부터 청와대 직원들에게 “대통령을 도우러 왔지 무슨 욕심이 있는 게 아니다. 오랫동안 일할 생각이 없다”는 얘기를 하곤 했다고 한다. 박근혜 정부가 출범 때부터 정부조직 개편 논란과 인사 참사에 휘청거리자 박 대통령의 국정운영이 안정될 수 있도록 돕겠다는 순수한 마음으로 비서실장을 맡았다는 얘기다.
김 실장을 오랫동안 지켜봐 온 한 여권 인사는 “밖에서는 김 실장을 ‘기춘대원군’이라고 부르면서 국정농단의 주범 취급하고 있지만, 실제 김 실장은 때가 되면 알아서 자기 문제를 정리할 사람”이라고 말했다.
박공헌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