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노인 폄하 발언’으로 총선 승리가 위태로워지자 정동영 열린우리당 의장이 지난 12일 선대위원장직 전격 사퇴를 발표하고, 탄핵세력 축출을 위한 단식에 들어갔다. 이종현 기자 jhlee@ilyo.co.kr | ||
선거를 불과 한 달 앞두고 터진 ‘탄핵풍’이란 ‘초대형 호재(好材)’를 타고 애초 ‘2백 석 이상, 최소 1백50석(원내 과반) 이상’을 기대했던 정 의장이다. 그러나 선거일이 가까워질수록 판세가 급격히 악화되면서 자칫하면 원내 1당을 한나라당에 뺏길 상황에까지 내몰리게 되자 결국 최후의 카드나 다름없는 ‘사퇴’를 선언한 것.
최근 선대위 핵심 관계자들 입에선 “예상 의석수가 하루에 4~5석씩 떨어지고 있는 상황” “도대체 어쩌다 이 지경이 됐나”라는 아우성이 터져 나왔던 게 사실이다. “이대로 가다간 한나라당이 다시 원내 과반 의석을 차지할 수도 있다는 생각에 등골이 오싹하다”(신기남 선대본부장)는 얘기도 더 이상 ‘엄살’이 아닌 ‘실제상황’으로 받아들여지는 분위기였다.
열린우리당 지지율 하향세 배경으론 여러 요인들이 거론됐다. 외부 요인으론 한나라당 박근혜 대표의 등장으로 불기 시작한 ‘박풍(朴風)’과 야권의 지역주의 조장, ‘눈물과 치마폭’으로 대표되는 감성 정치의 효력 등이 꼽혔다.
그러나 정작 정 의장이 고민했던 것은 ‘내재적 요인’이었다. 열린우리당이 급작스런 하락세로 반전한 중심에 정 의장이 존재했기 때문. 총선 전략의 부재와 당 지도부의 무사안일, ‘공천잡음’ 등 모든 요인들이 정 의장과 직·간접적인 연관을 맺고 있다는 것을 부인하기 어려운 까닭이었다.
그러나 정 의장을 가장 괴롭혀온 것은 역시 “60∼70대는 투표 안해도 된다”는 ‘노인 폄하’ 발언이다. 지난 3월26일 대구에서 <국민일보> 대학생 기자단과의 인터뷰 과정에서 나온 정 의장의 이 ‘실언’은 이른바 ‘노풍’(老風)으로 ‘확대 재생산’되면서, 지난 2일 공식 선거운동 돌입 이후 선거 막판까지 열린우리당에 ‘악재 중의 악재’가 됐다.
열린우리당은 당초 탄핵정국 돌입 이후 영남권에서 당 지지율이 한나라당의 두 배 이상 앞서자 과반 이상 의석 확보에 대한 기대를 표명했다. 당장 정 의장 자신이 문제의 ‘노풍’ 발언이 있던 3월26일 대구 그랜드호텔에서 가진 기자회견에서 “(TK에서) 절반 의석을 얻었으면 좋겠다는 ‘현실적 희망’을 갖고 있다”고 밝힌 바 있다. 비슷한 시기 부산의 한 일간지와의 회견에서도 “전국정당·국민통합정당으로 태어나느냐 못하느냐의 차원에서 열린우리당이 PK에서 과반 이상의 의석을 획득하는 것이 더 중요하고 의미있다”며 자신감을 피력하기도 했다.
그러나 3월23일 한나라당 전당대회 이후 불기 시작한 ‘박풍’으로 TK권이 흔들리기 시작하더니, 정 의장의 `실언이 보도되기 시작한 4월2일 이후부터는 PK권에서도 ‘지각변동’이라 할 만한 판도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부산의 한 후보는 “공식 선거운동 돌입 직전까지만 해도 한나라당 후보를 15% 이상 여유 있게 앞서 가던 것이 ‘노풍’(老風)이 불기 시작하면서 불과 일주일여 사이에 지지도 격차가 없어져 버렸다. 하루종일 노년층을 상대로 정 의장 실언을 해명하러 다녀도 효과가 없었다”고 하소연했다.
실제 부산의 18개 선거구는 물론 경남 17개 선거구와 울산 6개 선거구 중 많아야 4∼5명을 빼고는 대부분 열린우리당 후보들이 ‘절대 우위’ 상황에서 ‘경합’ 또는 ‘열세’로 선거 막판 급작스레 돌아서게 됐다. 영남권 사정이 이처럼 악화되면서 ‘정 의장 책임론’을 펴는 목소리도 점점 커졌다. 급기야 권기홍(경북 경산·청도) 이영탁(경북 영주) 윤덕홍(대구 수성을) 윤용희(대구 달성) 서중현(대구 서) 등 TK지역 후보 5인은 12일 정 의장의 사퇴를 공식 요구하기까지 했다.
이들 5인은 “정 의장의 ‘노인 폄하’ 발언은 계층간 갈등·분열을 초래함으로써 국민통합을 심각하게 저해했으며 전국 정당화의 교두보인 영남에서부터 열린우리당 후보들에 회복할 수 없는 치명적인 피해를 주었다”고 사퇴촉구의 배경을 밝혔다. 이들은 “영남의 열린우리당 후보들이 지역 유권자들로부터 거친 항의를 받고 선거운동을 중단할 정도로 심각한 사태에 직면해 왔으나, 정 의장과 당 지도부는 이러한 현상이 일부 영남지역에만 국한된 것인 양 안이하게 생각하고 민심을 되돌릴 아무런 방안도 내놓지 않았다”고 성토했다. 이들 중 윤덕홍 전 교육부총리는 10일부터 김태일 후보(대구 수성갑)와 함께 “한나라당 싹쓸이는 절대 안된다”며 선거운동을 포기한 채 단식농성에 들어가기도 했다.
PK권에서도 ‘정동영 성토’ 기류는 일파만파로 커져가고 있었다. 부산 연제에 출마한 노혜경 후보는 정 의장 발언 파문이 터진 후 기자들 앞에서 “정 의장의 입을 한 대 쥐어박고 싶다”며 원색적으로 불만을 토로했고, 서구에 출마한 최낙정 후보(전 해양수산부 장관)는 “개인적으론 공인의 책임지는 자세를 감안할 때 지금이라도 정 의장이 최소한 선대위원장은 사퇴해야 한다고 본다”고 주장했다. 김혁규 선대위 공동위원장과 김정길 후보(영도), 조성래 부산시당 위원장 등 PK 핵심인사들도 이들과 비슷한 입장이지만 지도부의 일원이라는 점을 들어 공개적으로 의사표시를 자제했다는 것이 측근들의 전언이다.
노무현 대통령 측근인 경남의 한 후보는 “보수층이 두터운 지역정서에서 ‘노풍’(老風)의 부정적 영향이 너무 컸다. 상황이 이렇게 된 데 대해 여러 원인이 있을 수 있지만 정 의장의 책임이 그 중 80% 이상이다”고 밝혔다.
그러나 영남권을 중심으로 거세게 번져갔던 이 같은 ‘반(反) 정동영’ 기류에 대해 당권파는 마땅한 대응책을 내놓지 못했다. 게다가 서울에서도 ‘뒤집어지는’ 선거구가 늘어나자 당혹감을 감추지 못해왔다.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한 정 의장은 당초 11일 가진 긴급기자회견에서 ‘선대위원장직 사퇴’ 의사를 밝히려 했다는 후문. 기자회견 직전 가진 당직자 회의에서 정 의장은 “내가 물러나 문제가 해결된다면 사퇴할 것”이란 의사를 밝혔지만 유시민 의원 등이 극구 만류해 ‘총선 후 무한책임’으로 결론을 내린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 회견이 영남권의 반발만 더욱 크게 사는 등 ‘역효과’만 내자 이튿날 정 의장은 전격 사퇴를 선언하기에 이른 것이다. 12일 선대위원장직 사퇴 기자회견 직후 유시민 의원은 “내가 가장 앞장서 (사퇴에) 반대했지만 정 의장 스스로 결단을 내렸다. 선거에서 멋지게 이기고 싶었는데 아쉽다”고 밝혔다.
정 의장의 선대위원장직 사퇴에 대해 당내에선 일단 ‘전화위복’의 계기가 될 것으로 받아들이는 분위기다. 노풍의 공격 대상이 일선에서 물러남으로써 야권의 공세가 둔화될 것이고 따라서 원래의 총선 구도인 ‘탄핵 심판’ 쪽으로 방향을 틀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됐다는 시각이다.
민병두 총선기획단장은 “사퇴 기자회견 직후부터 정 의장은 ‘탄핵 세력’ 축출을 위한 단식 투쟁에 들어가며 20여 명의 총선 출마자들도 당사에서 함께 단식 투쟁에 참여한다”고 밝혔다. 민 단장은 “상당수 지역구·비례대표 후보들이 정 의장의 단식투쟁에 동참할 것으로 기대하며 선관위에 문의해 가능하다면 (정 의장의) 비례대표 22번 순번 포기 방법도 찾을 것”이라고 밝혔다. 정 의장은 ‘비례대표’ 포기 의사를 밝힌 상태다.
이러한 당내 결집 효과가 열린우리당의 총선 승리로 이어진다면 정 의장은 ‘노풍 생채기’에도 불구하고 잠재적 대권후보로 계속 자리잡을 수 있을 것으로 전망된다. 그러나 정 의장의 ‘백의종군’에도 불구하고 총선에서 패한다면 대권 행보는 물론 정 의장의 정치적 앞날마저 불투명해질 것으로 보인다.
이준원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