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2002년 4월16일 서울지검에 소환되는 최규선씨. 그는 최성규 전 총경에게 수사를 부탁하고 1억2천만원 상당의 금품을 건넸다. | ||
경찰청 특수수사과장으로서 만만치 않은 권세를 누렸던 최 전 총경. 그는 결국 미국에서 송환된 지 21일 만인 지난 7일 검찰의 구속 기소로 미국 유치장에서 보낸 3백여 일보다 몇 곱절이나 긴 세월을 구치소와 교도소에서 보낼 운명이다. 검찰이 작성한 공소장에는 최 전 총경이 DJ정부 당시 막강한 수사권을 악용해 저질렀던 최규선씨와의 동반 비리행각이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다.
최 전 총경과 최규선씨의 ‘잘못된 만남’은 지난 1998년 9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경찰청 특수수사과 1팀장으로 근무하던 최 전 총경은 미국의 유명 팝가수 마이클 잭슨의 내한 공연 유치 사기사건에 연루된 최씨를 조사한 것을 계기로 최씨와 친분을 맺게 됐다.
두 사람의 ‘유착관계’는 최 전 총경이 2000년 1월 특수수사과장으로 승진하면서 본격화했다. 최 전 총경은 당시 김대중 대통령의 3남 홍걸씨를 앞세워 각종 이권에 개입하던 최씨에게 업무상 취득한 대통령 및 친인척 동향 등 청와대 관련 고급 정보들을 알려주는가 하면, 최씨를 못마땅하게 여기던 민주당 인사들에게 최씨에 대한 ‘선처’를 부탁하는 등 후견인 노릇을 하게 된다.
무엇보다 놀라운 사실은 그가 최씨의 부탁을 받고 부하 직원들을 동원한 ‘청부 수사’까지 서슴지 않았다는 것. 그 ‘첫 번째 작품’은 나중에 ‘최규선 게이트’를 통해 전모가 드러난 체육복표사업 비리와 연관된 것이었다.
2001년 1월경 최 총경은 체육복표사업에 도전한 한국타이거풀스측으로부터 로비를 받고 타이거풀스의 사업권 획득을 위해 백방으로 뛰던 최씨로부터 ‘지원 사격’을 요청받게 된다.
그 요지는 “타이거풀스가 경쟁업체인 한국전자복권에 비해 기술력이나 자금력이 앞서는데도 복표사업을 주관하는 국민체육진흥공단의 불공정한 업무처리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 공단측은 2000년 12월 이미 타이거풀스를 우선협상대상자로 선정하고도 한국전자복권측 로비로 최종 계약을 하지 않고 있다. 그러니 공단에서 타이거풀스가 사업자로 선정되는 것을 방해하지 못하도록 공단측 비리를 수사할 것처럼 폼만 잡아달라”는 것이었다.
최 총경이 최씨의 부탁을 흔쾌히 수용했음은 물론이다. 그는 즉시 부하인 C경감에게 “공단의 체육복표 사업자 선정과정에 비리나 의혹이 많다고 하니 수사관들을 공단에 보내 내사를 한 번 해보라”고 지시했다.
이어 1월15일 경찰청 특수수사과 수사관 3명이 서울 송파구 방이동 공단 사무실에 들이닥쳤다. 이들은 공단측에 “비리 첩보가 있으니 복표사업 관련 자료들을 모두 제출하라”고 윽박질러 복표사업 추진현황 및 향후 계획 등이 담긴 서류들을 받아갔다.
벌집 쑤신 듯이 발칵 뒤집힌 공단측은 여러 경로를 통해 사건의 내막을 전해들었고, 불과 사흘 뒤인 1월18일 타이거풀스를 당시만 해도 연간 5천억대의 시장을 형성하는 ‘황금알을 낳는 거위’로 인식됐던 체육복표 위탁사업자로 확정했다.
비슷한 시기 최씨는 최 총경에게 또다른 ‘청부 수사’를 의뢰했다.
최씨는 “내가 잘 아는 S건설 손아무개 회장이 JP 특보 행세를 하고 다니는 최아무개 일당에게 군 공사 수주 명목으로 10억원이 넘는 돈을 줬다가 사기를 당했으니, 최씨 등을 구속해달라”고 했다.
이번에도 최 총경은 즉각 부하인 H경감에게 최씨 등에 대한 수사 착수를 지시했고, 최씨는 며칠 지나지 않아 사기 혐의로 구속됐다. 최 총경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최씨에게 “손 회장과 어서 합의를 하는 게 신상에 좋다”며 합의 종용까지 한 것으로 검찰 수사에서 드러났다.
최씨가 한마디하면 최 총경이 즉시 실행에 옮기는 ‘청부 수사’는 2001년 2월 서울 강남 C병원의 의약품 납품 관련 리베이트 수수 사건에서 더 극명하게 드러난다.
당시 최씨는 김희완 전 서울시 정무부시장를 통해 소개받은 C병원의 실제 소유주 차아무개씨로부터 “경찰청 특수수사과에서 의약품 리베이트 사건을 수사중인데 금품수수 혐의가 포착된 우리 병원 의사들이 선처받을 수 있게 도와달라”는 청탁을 받고, 최 총경을 사무실로 찾아갔다.
최씨는 최 총경에게 “의약품 리베이트 수사와 관련해 C병원은 좀 봐줘야겠다”고 부탁해, 최 총경으로부터 협조 약속을 받아냈다. 그러나 최씨는 어찌된 영문인지 얼마 뒤 최 총경에게 “C병원에 의약품을 납품하는 D제약회사에 대해 수사를 좀 해줘야겠다”며 정반대 취지의 청탁을 넣었다.
검찰은 “최씨는 당시 C병원이 강도 높은 경찰 수사를 받게 해 다급해진 차씨로부터 금품을 받아낼 목적이었다”고 최 전 총경의 공소장에서 밝혔다.
최 총경은 역시 이번에도 부하 직원인 C팀장을 시켜 D제약사에 대해 압수수색을 실시하도록 하는 등 ‘청부 수사’를 마다하지 않았다. 그는 보름 동안의 수사를 통해 D제약사가 C병원 의사 6명에게 의약품 선정 관련 리베이트를 제공한 사실을 밝혀낸 뒤 최씨에게 입건 대상인 의사들의 명단과 불구속 수사방침 등을 귀띔해줬다.
최 전 총경이 이러한 ‘청부수사’ 등의 대가로 최씨로부터 건네받은 금품은 일단 이번 공소장에 적시된 것만 1억2천만원 상당이다. 두 차례에 걸쳐 현금 1억원을 받았고, C병원 계열 벤처회사 주식 4만주(2천만원 상당)도 챙겼다. 물론 이들 금품은 최씨가 C병원측으로부터 받은 로비자금의 일부다.
최씨와 C병원 사이에 다리를 놔줬던 김희완 전 부시장 역시 C병원측으로부터 현금 1억5천만원과 7천만원 상당의 주식을 받은 혐의가 ‘최규선 게이트’ 수사 당시 검찰에 포착돼 구속된 바 있다.
그러나 최 전 총경의 금품수수 혐의는 가까운 시일 안에 몇 가지가 더 추가될 것이 확실시되고 있다.
이 사건을 수사중인 서울중앙지검 특수2부는 최 전 총경을 구속기소하면서 “1억2천만원 이외에 추가로 기업인 등 몇 명으로부터 수억원대의 현금과 주식을 받은 사실을 더 밝혀냈다”고 발표했기 때문이다.
최 전 총경의 추가 금품수수 금액은 3억원 안팎이고, 이 중에는 C병원이 1억2천만원과 별도로 건넨 금품도 포함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검찰은 “이들 혐의는 ‘범죄인 인도사유에 적시된 범죄 이외의 범죄에 대해서는 인도 당사국의 동의를 얻어야 처벌할 수 있다는 내용이 담긴 한·미범죄인인도조약에 따라 미국 정부의 동의를 받은 뒤 추가 기소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우리 정부가 애초 미국에 최 전 총경에 대한 신병인도를 요청할 당시에는 1억2천만원 수수 혐의만 드러난 상태였기 때문이다.
금품수수 부분 말고도 최 전 총경에 대한 검찰 수사는 여전히 ‘진행형’이다. 아직 최 전 총경의 미국 도피를 둘러싼 ‘비호 세력’ 존재 여부에 대한 의혹과 최 전 총경이 ‘최규선 게이트’ 당시 청와대 지시를 받아 최씨에게 밀항을 권유했다는 의혹 등은 실체가 드러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 검찰은 조만간 미국 정부에 최 전 총경이 2002년 4월 인도네시아와 홍콩 등을 경유해 미국 뉴욕의 케네디공항에 도착한 뒤 미리 대기중이던 우리 영사관 직원 등을 피해 공항을 빠져나가는 과정에서 누구의 도움을 받았는지 등을 규명하기 위해 사법공조 요청을 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또한 최 전 총경이 당시 청와대 이아무개 비서관 등의 지시를 받아 최씨에게 밀항을 권유했다는 의혹과 관련해, 이 전 비서관 등 관련자들을 총선 이후 차례로 소환조사할 방침이다.
검찰은 최 전 총경이 특수수사통답게 검찰의 추궁을 교묘히 피하거나 아예 입을 다물어 관련 수사가 제대로 진척되지 않는 상황에서 ‘밀항 권유설’ 등에 연루된 DJ정부 시절 공직자 일부가 이번 총선에 출마한 것으로 알려지자 본격 수사 시기를 조율해왔다.
한편 검찰은 이번 수사과정에서 최 전 총경의 도피자금과 재산 실태 등을 일부 확인한 것으로 전해졌다. 검찰에 따르면 최 전 총경은 미국 도피 이후 국내에 있는 자녀들을 통해 자신이 소유하고 있던 주유소와 농경지 등을 처분한 대금 25만달러(한화 3억원 상당)를 수차례에 걸쳐 송금받았다.
그는 이 돈과 경찰청이 지급한 퇴직금 9천8백여만원 등을 합쳐 미국에서의 생활비와 인도재판 변호사 선임료 등으로 썼고, 로스앤젤레스 한인타운에 있는 피아노학원을 권리금 9만달러를 주고 임대해 운영해온 것으로 파악됐다.
검찰은 이 돈 이외에 국내에서 그의 해외도피를 도운 누군가가 도피자금을 대줬을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고 있다.
이에 따라 수사팀은 미국 사법당국에 최 전 총경이 미국에서 개설한 금융계좌의 입출금 내역 등 금융정보를 제공해달라는 내용의 협조요청 공문을 보내기로 했다.
이진기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