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2002년 5월 평양에서 만난 박근혜 대표와 김정일 국방위원장. 두 사람의 회동에서는 남북 화해와 협력, 한반도 평화의 메시지가 화두를 이뤘다고 한다. | ||
DJ정부 시절인 지난 2002년 5월13일 저녁 평양의 국빈급 숙소인 백화원초대소. 만찬장에는 정장 차림의 중년 여성과 인민복 차림의 한 사내가 마주 앉았다. 박근혜 당시 한국미래연합 창당 준비위원장(현 한나라당 대표)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었다. 박 대표의 제안에 김 위원장은 호탕한 웃음을 보이며 “아주 좋은 말씀입니다. 박근혜 선생한테 많은 기대를 해 보겠습니다”라고 받아넘겼다. 냉전시기 남북간 체제 대결의 맨 앞에 섰던 박정희-김일성 두 사람의 2세간의 만남에서는 아이로니컬하게도 남북 화해와 협력, 한반도 평화의 메시지가 화두를 이뤘다.
세간의 관심에서 잊혀졌던 2년 전의 만남이 17대 총선을 계기로 재조명 받게 됐다. 박근혜 대표가 이끄는 한나라당의 대북정책 노선이 급선회 하는 양상을 보이면서 총선 이후 정치판도에 남북관계가 어떤 변수로 작용할지 정치권의 주요 관심사로 급부상하고 있기 때문이다.
DJ정부 때부터 대북지원과 남북 경제협력에 비판적인 입장을 취해온 한나라당은 박 대표 체제의 출범으로 대북정책에서 예상 밖의 변신을 시도하고 있다. 박 대표의 이런 발걸음이 총선 득표전략이나 단기적인 변신이 아닌 보다 근본적인 체질개선을 예고하고 있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박 대표는 지난 8일 외신기자클럽 초청 토론회에서 “총선 이후 야당 대표 자격으로 북한을 방문하겠다”고 밝혔다. 그는 또 “대북 정책은 어느 한 정권의 전유물이 되거나 당리당략에 좌우돼서는 안된다”며 “총선 이후 여야와 정부가 함께 참여하고 협력하는 초당적 대북기구 설치를 추진하겠다”고 말했다.
남북 접경지구에 평화구역을 설치해 이산가족 면회소를 만들겠다는 구상에서 더 나아가 한나라당이 제동을 걸어온 개성공단 개발을 적극 지원하겠다는 의향도 분명히 했다. 정부 당국자는 이를 두고 “한나라당으로서는 ‘상전벽해’의 태도 변화를 보이고 있는 것”이라고 풀이했다.
물론 이런 ‘박근혜 구상’이 구체적으로 어떤 모양새를 갖추게 될지는 총선 이후 17대 국회의 정치지형과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다. 한나라당이 총선에서 얼마만큼의 국민 지지를 이끌어 내느냐에 따라 박 대표의 대북정책에 붙을 힘이 결정된다는 점에서다.
우선 열린우리당이 총선에서 압도적인 지지를 받아 과반수 이상으로 안정적인 지지기반을 확보할 경우다. 정국 주도권을 잡게 될 여당은 각종 개혁입법 추진 등 국정개혁 구상을 실행에 옮기게 된다. 이 과정에서 한나라당은 총선 패배에 따른 내홍에 흔들릴 수밖에 없다.
탄핵정국으로 워낙 지지율이 빠진 상태에서 출범했다는 점에서 박근혜 대표에 대한 본격적인 책임론을 제기하기는 어렵다해도 힘이 빠질 수밖에 없다.
무엇보다 대북 문제에서 참여정부와 열린우리당이 주도권을 확보하게 된다는 점에서 박 대표의 입지는 좁아질 수밖에 없다. 북한으로서도 김대중 정부의 대북 화해협력 정책 계승을 표방하고 있는 참여정부와 더욱 적극적으로 대화에 나설 공산이 크다. 여기에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탄핵안이 헌재에서 부결될 경우 열린우리당과 정부의 대북 접근에는 힘이 급격하게 쏠릴 수 있다.
이와 관련해 눈길을 끄는 것은 김정일 위원장의 서울 답방과 제2차 남북정상회담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는 점이다. 정보 당국과 서울의 외교가에서는 벌써부터 총선 이후 남북관계에서 뭔가 획기적인 일이 구상되고 있다는 관측이 그럴듯하게 나온다. 총선 승리와 탄핵안 부결이 이뤄질 경우 그 여세를 몰아간다는 시나리오다. 서울 답방설과 함께 장소가 블라디보스톡이나 중국의 남방지역, 또는 제주도가 될 수 있다는 설도 있다.
진보적 계층의 지지를 받고 있는 노무현 대통령과 여권이 국가보안법을 손질하는 등 준비과정을 거쳐 김 위원장과 제2의 6·15공동선언이랄 수 있는 ‘서울 평화선언’을 도출할 것이란 얘기와 함께 이미 남북한이 비밀리에 중장기적인 준비작업을 벌이고 있다는 관망도 쏟아진다. 6·15공동선언에서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위원장이 ‘공통점이 있다’고 인정한 남한의 연합제와 북한의 낮은 단계의 연방제를 하나로 묶어 통일방안을 내놓는 방안이 추진중이라는 것도 이런 이야기 중 하나다.
열린우리당이 과반수 확보에 실패하고 원내 1당을 차지하는 데 머물 경우 상황은 복잡해진다. 원내 세 번째 의석으로 힘겨운 입장에 있던 것과 비교하면 장족의 발전을 했다고 할 수 있지만 총선 올인 전략의 실패라는 측면에서 탄력이 예상만큼 붙지는 못한다는 얘기다. 이럴 경우 열린우리당은 한나라당과의 ‘긴장속의 여야관계’ 속에서도 적절한 공존의 틀을 마련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럴 경우 박근혜 대표의 대북접근 프로젝트가 하나의 모델이 될 수 있다. 북한은 사실 노무현 정부가 DJ정부 시절 대북 화해협력 정책을 계승한다는 점에 기대를 걸고 있으나 조바심을 내고 있는 측면도 드러낸다. 지난 2월 13차 남북장관급 회담 때 북측 김영성 단장이 “노무현 정부가 1년 동안 개성공단이나 철도·도로 연결이다 부산하게 말을 많이 했지만 벽돌 한 장, 시멘트 한 포 들여온 게 있느냐”며 불만을 표시한 것도 이런 배경에서다.
DJ정부 때 정상회담 2주년을 앞둔 시점에서 남북관계의 ‘모멘텀’(추진력)이 약화되자 방북을 통해 매듭을 풀었던 박 대표가 마찬가지의 역할을 노무현 정부에서도 해낼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대북정책에서 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의 적절한 역할 분담이 이뤄져야 한다는 전제가 있다.
한나라당이 원내 1당 자리를 차지할 경우는 사정이 크게 달라진다. 위기에서 당을 구한 박 대표에게 힘이 쏠리면서 이전 이회창 총재 시절의 탄탄한 단일지도체제가 구축될 수 있다는 점에서다. 민주당과 자민련까지 가세해 한나라당의 전향적 대북접근에 뒷심을 보탤 경우 판세가 달라질 수 있다. 북한도 박근혜 체제의 한나라당에 러브콜을 보낼 수 있다.
흥미로운 사실은 북한의 언론들이 지난 3월23일 박근혜 대표의 선출 사실에 대해 3주가 넘도록 침묵하고 있다는 것이다. 정보 당국 관계자는 “<노동신문>과 평양방송은 아직도 ‘한나라당 대표 최병렬을 타도하자’는 식으로 보도한다”며 “북한의 대남부서 담당자들이 박근혜 대표 체제의 한나라당에 대해 어떤 입장을 취해야 할지 우왕좌왕하고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김정일 위원장과 직접 만났고 각별한 소회를 나눴던 박 대표에 대해 비난의 직격탄을 날릴 수 없어 아직 입장정리 조차 안됐다는 측면에서다.
총선 결과 의석 분배를 놓고 북한이 ‘뉴한나라당’과의 관계 설정을 어떻게 할지, 또 박근혜 대표의 대북접근 구상에 대해 어떤 점수를 매길지는 향후 남북관계에 주요한 풍향계가 될 것임에 틀림없다.
이길재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