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헌절 기념식에 참석한 안철수, 김한길 새정치연합 대표,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왼쪽부터). 이날 정 의장의 선거구제 개편 제안에 여야가 의외의 반응을 보여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이종현 기자 jhlee@ilyo.co.kr
지난 5월 취임한 정의화 국회의장이 요즘 공식석상에서 가장 자주 언급하는 내용은 선거구제 개혁안이다. 현재의 소선거구제를 폐지하고 중·대선거구제를 도입하자는 것이 그가 주장하는 개혁안의 요지다.
가장 가까운 7월 17일 제헌절 공식 연설을 통해서도 정 의장은 “승자 독식의 현행 선거제도가 앞으로도 계속돼야 하는지, 우리의 미래에 과연 합당한지 본격적인 논의를 시작해야 한다”며 “논의를 시작하는 시기는 차기 총선을 실질적으로 1년 6개월 남짓 앞둔 지금이 적절하다”고 중·대선거구제 도입 논의를 여야 지도부에 주문했다.
지난 14일 선출된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 역시 최근 여러 공식석상과 인터뷰 등을 통해 “정 의장의 뜻에 동감한다”며 “다만 중·대선거구제의 단점을 보완하기 위해 ‘석패율제’를 함께 도입하는 것이 좋다”는 뜻을 밝혔다.
김태호 새누리당 최고위원은 지난 전당대회 출마 당시, 아예 ‘대통령 중임제 및 부통령제 검토’와 함께 ‘중·대선거구제 도입’을 자신의 공약으로 내세우기까지 했다. 바야흐로 제19대 국회 하반기 시작과 함께 여당 핵심부가 ‘선거구제 개혁 논의’에 불을 지피고 있는 것이다.
이에 대한 야권의 반응도 흥미롭다. 일단 진보 소수정당인 정의당은 ‘격한 환영’ 의사를 표했다. 김제남 정의당 대변인은 제헌절 연설에서 언급한 정의화 의장의 선거구제 개혁 의사에 “박수와 동감을 보내드린다”고 환영 의사를 밝혔다. 정치권에선 드문 ‘특급칭찬’이었다. 이에 앞서 천호선 정의당 대표 역시 한 인터넷라디오 방송을 통해 중·대선거구제 도입을 주장하기도 했다. 양당제 공고화를 부추기며 제3정당 원내 진출을 방해하는 현재의 ‘소선거구제’를 바라보는 소수정당 대표의 당연한 반응인 셈이다.
정의화 의장이 제헌절 공식연설을 통해 선거구제 개혁에 불씨를 당겼다. 이종현 기자 jhlee@ilyo.co.kr
도대체 야권의 속마음은 무엇일까. 이에 대한 답을 얻으려면 선거구제 개혁이 가진 성격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규정대로라면 선거구제 개혁은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다. 중앙선관위의 한 관계자는 “원칙적으로 놓고 보자면, 공직선거법 24조와 25조에 의거해 선거구획정위원회(국회의장이 교섭단체대표와 협의하여 11인 이내의 위원으로 구성)를 구성해 선거구제를 개편하면 그만”이라며 “규정대로라면 어렵진 않은 일”이라고 지적했다.
하지만 이러한 규정과 다르게 정치권 안팎에선 선거구제 개혁을 두고 헌법 개정과 동일선상에 놓고 파악하는 경우가 많다. 한 정치평론가는 “규정과 현실은 다르다. 규정대로 국회 내부에서 협의 하에 선거구제 개편이 이뤄지기 어렵다. 이는 여야 이해관계는 물론 유권자들과 직접 연결되는 고차원의 문제이기 때문”이라며 “이 논의는 개헌과 마찬가지로 의회를 넘어 국민투표까지 갈 수 있는 문제다. 의회 차원에서 논의가 이뤄지더라도 여야 간 게리맨더링에 빠질 공산이 크다”고 지적했다.
여기에 여권의 의도가 숨겨져 있다는 것이 야권 일각의 반응이다. 새정치연합의 한 핵심 당직자는 “정 의장은 논의의 ‘적기’라 표현했지만, 현실적으로 20대 총선에 이를 도입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실제 도입 여부를 떠나, 여권 입장에선 앞서의 ‘경제민주화’ 이후 국정 하반기 의제의 하나로 선거구제 개혁을 공론화시킬 의도가 더 많은 것 같다. 그 진정성이 의심스럽다”라며 “사실 우리 입장에서 지난 대선 패배의 패착 중 하나가 개혁 의제 선점 실패 아니었나. 선뜻 내민 패를 받아들이긴 어렵다”고 답했다.
또 한 가지는 야권이 이를 받아들여 극적으로 중·대선거구제 도입을 추진한다하더라도 야권보다는 여권이 더 유리하다는 것이 대체적인 전망이다. 앞서의 평론가는 “중·대선거구제 도입의 핵심은 어쨌든 여야 지역주의의 온상인 영·호남 지역구 개편”이라며 “기본적으로 야권 입장에선 현재의 호남을 포기하기 쉽지 않을 것이다. 또한 실제 선거구 조정이 이뤄지면 영남은 의석수가 늘 공산이 큰 반면, 이에 비해 인구수가 훨씬 적은 호남의 의석수는 지금보다도 줄어들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정치공학적으로 야권이 훨씬 불리하다”고 지적했다.
지난 2월, 김성식 당시 새정추 공동위원장은 <일요신문>과의 인터뷰를 통해 “우리가 주장하는 것이 국회의원 선거 소선거구제 폐지다. 현재의 소선거구제에선 득표율 40%를 기록해도 떨어질 수 있다. 한 지역에선 한 정당밖에 당선 안 된다. 지역 맹주한테 잘 보여야 국회의원 한다. 이거 바뀌어야 한다”며 “지방선거 끝나면 이 캠페인 강력하게 밀어붙일 것”이라고 적극적인 언급을 하기도 했다.
물론 당시 제3당 창당을 통한 원내 진입을 목적으로 했던 입장과 현재 제1 야당의 수장으로서의 그것은 천지차이다. 하지만 ‘새정치’의 기치아래 정치개혁을 주장했던 안 대표로서 현재의 무반응은 당연히 모순적일 수밖에 없다. 이러한 논리대로라면 현재 여권에서 불을 지피고 있는 선거구제 개혁안은 그 실현 여부를 떠나 여권의 성공작으로 남을 공산이 크다.
앞서의 평론가는 “박근혜 정부 초창기 개혁 의제였던 경제민주화는 최소한 정치공학적으로 놓고 본다면 정권 창출과 전반기 국정 운영에 있어서 큰 역할을 했다. 다만 지금은 이미 단물이 다 빠진 상태”라며 “선거구제 개혁은 현 정부의 새로운 개혁 의제로 쓰일 수 있는 훌륭한 재료다. 그 현실화 여부를 떠나 지역주의 타파의 특효약이라는 명분이 민심에 먹힐 수 있다”고 내다봤다.
한병관 기자 wlimodu@ilyo.co.kr
잠깐! 선거구제 용어 풀이 # 소선거구제 : 좁은 범위의 한 선거구에서 한 명의 당선인을 선출하는 한국의 현 선거구제다. 지역에 대한 책임 소재가 확실하고, 간단명료하다는 장점이 있다. 하지만 사표가 많이 발생하고 양당제 공고화 이후 제3 정당 출현이 어렵다는 단점이 있다. 이는 지역주의 공고화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 중·대선거구제 : 넓은 범위의 한 선거구에서 2명 이상의 당선인을 선출하는 선거구제다. 지역 내 당선인이 복수이기 때문에 지역에 대한 책임 소재가 분산된다는 단점이 있지만 사표가 적어 대의 측면에선 장점이 많다. 복수의 당선자가 출현한다는 점에서 제3 정당에게 유리하다. # 석패율제 : 한 지역구에서 아깝게 떨어진 후보자를 구제해 비례대표로 당선시키는 일종의 와일드카드 제도다. 이 때문에 소선거구제의 보완책으로 자주 거론된다. <일요신문>이 확인한 바에 따르면, 해당 제도는 이미 지난 2012년 중앙선관위 차원에서 논의 후 정치권에 제안한 바 있지만, 유야무야됐다. # 게리맨더링 : E. 게리 전 미국 매사추세츠주 주지사의 이름과 도롱뇽(Salamander)의 합성어다. 1812년 게리 전 주지사가 자신의 소속 정당인 공화당에 유리하게 선거구를 임의적으로 분할했는데 그 모양이 도롱뇽과 비슷하다고 조롱해 나온 용어다. 현대 정치에선 특정 정당에 유리하도록 비상식적으로 획정되는 선거구를 의미한다. [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