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년 만에 강간살인범 누명을 벗은 정원섭 씨는 국가가 한 푼도 배상할 수 없다는 대법원 판결을 받았다. 박은숙 기자 espark@ilyo.co.kr
1972년 조작된 증거와 고문에 의한 허위진술로 하루아침에 강간살인범이 된 정 씨는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국가는 정 씨 아들을 이용해 허위증거를 만들어냈다. 또 정 씨가 운영하던 만화가게 여 종업원을 7일간 가두고 협박해 살인사건 현장에서 발견된 연필과 빗이 정 씨의 것이라는 허위진술을 받아냈다.
당시 10월 10일까지 범인을 잡지 못하면 책임자들을 문책할 것이라는 내무부 장관의 ‘시한부 체포명령’에 정 씨를 범인으로 만들기 위한 작업이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결국 시한부 체포명령 기한 하루 전인 10월 9일 정 씨는 강간살인범으로 신문에 발표됐고, 내무부 장관은 정 씨를 검거한 수사 경찰관을 특진시켰다.
정 씨의 아내는 막둥이를 출산한 지 사흘도 안 된 몸으로 살인자의 아내라 손가락질 받으며 4명의 아이들을 데리고 마을을 도망치다시피 떠나야 했다. 아내는 막노동을 하며 아이들을 키웠지만 교통사고로 한 쪽 다리를 잃었다. 일을 할 수 없게 된 아내 대신 큰아들은 중학교를 마치자마자 노동판에 뛰어들어 생계를 책임졌다.
무기징역으로 복역한 정 씨는 살아서 교소도를 나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교도소 안에서 3번이나 자살시도를 했다. 5년이 지난 후 20년으로 형이 감형됐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다시 살기로 마음먹은 정 씨는 모범적으로 수형생활을 해나갔다. 나가면 자신의 무죄를 밝힐 심정으로 형법책을 공부하며 한 장씩 씹어 넘겼다.
교도소에 복역한 지 15년이 지난 1987년 12월 정 씨는 크리스마스 특사로 가석방돼 출소했다. 태어난 지 사흘 만에 떨어져야 했던 막내아들은 생활고에 고등학교를 갈까 말까 망설이고 있는 중학생으로 자라있었다.
재심을 준비하는 과정은 쉽지 않았다. 정 씨는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민변)’의 도움으로 1999년이 돼서야 처음으로 재심을 청구할 수 있었다. 민변의 변호사들은 당시 중요 증인 두 사람이 정 씨를 범인으로 만드는 위증을 했다는 고백을 받아냈다. 하지만 당시 법원은 “오랜 시일이 경과한 뒤인 현재의 기억보다 30년 전의 증언이 경험 직후에 이루어진 것이므로 더 구체적이고 정확할 것으로 보인다”는 이유로 재심 신청을 기각했다.
정 씨는 포기할 수 없었다. 이미 생의 반 이상이 무죄를 입증하기 위해 살아온 세월이었다. 정 씨는 마지막 희망을 걸고 그간 모아둔 자료를 가지고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를 찾았다. 그리고 2007년 11월 마침내 진실화해위의 진실규명 결정이 내려졌다. 정 씨는 그날의 ‘자기 생의 최고의 날’이라고 회상했다.
하지만 해피엔딩은 오래 가지 못했다. 정 씨는 2012년 11월 28일 국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청구소송을 냈다. 2013년 7월 1심에서 서울중앙지법은 국가는 정 씨에게 26억여 원을 손해배상하라는 판결을 내렸다. 그런데 2014년 1월 23일 2심에서 1심판결이 뒤집혔다.
2심이 진행 중이던 2013년 12월 12일, 대법원이 재심 무죄 선고를 받은 과거사 피해자들이 낸 손해배상청구 소송을 제기할 수 있는 기간을 민법상 3년에서 ‘형사보상 결정 확정일로부터 6개월’로 축소했기 때문이었다. 형사보상금은 손해배상금과 별도로 불법구금기간에 대해주는 일당이다.
바뀐 소멸시효에 따르면 정 씨의 형사보상 결정 확정일은 2012년 5월 18일로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 있는 기간은 2012년 11월 18일까지였다. 결국 정 씨가 소를 제기한 11월 28일은 소멸시효에서 ‘10일’ 지난 시점이 돼버렸다.
결과적으로 정 씨는 소멸시효를 10일 넘겼다는 이유로 손해배상금을 한 푼도 받지 못하게 된 것이다. 지난 5월 대법원은 이 같은 2심의 논리를 받아들여 판결했다.
대법원은 이를 ‘권리 위에 잠자는 자를 보호하지 않는다’로 설명했다. 오랫동안 자신의 권리를 행사하지 않았다면 권리를 행사할 명분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정 씨가 오랫동안 권리를 행사하지 못하게 만든 주체도 국가였다. 형사보상금은 법원에서 확정판결이 나면 검찰에서 10일 내에 주기로 돼 있지만 검찰은 이를 5개월 동안 4번씩 나눠서 지불한 것. 이 때문에 정 씨는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 있는 기간이 4개월 이상 늦어졌다. 하지만 국가는 이러한 책임은 뒤로한 채 정 씨의 잃어버린 세월을 다시 외면하고 있다.
정 씨는 “죽을 고비를 수차례 넘기고도 살아있는 이유가 이 때문이 아닌가 생각한다. 법은 최소한의 도덕인데 국가가 도덕적이지 못하다면 어떤 의미인가”라며 “앞으로 인혁당 사건, 민청학련 등 과거사 피해자들이 이 같은 2차 피해를 당하게 될 것이다. 진실은 밟아도 살아있다는 것을 몸소 배웠다. 피해자에 대한 가해자의 진정한 사과를 원할 뿐이다. 이제부터 시작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남원=배해경 기자 ilyohk@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