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11월 29일 오후 서울지방검찰청 1003호 검사실. 고석홍 검사는 윤태식 사건 당시 안기부 해외공작국장을 불러 14년 전의 일을 묻고 있었다.
“학력이나 경력을 먼저 말씀해 주시죠.”
검사가 사무적으로 물었다.
“Y대 정외과를 졸업한 후 재무부 사무관으로 출발해서 대통령 비서관을 거쳐 외무부에 특채됐습니다. 프랑스 공사, 미얀마 대사로 근무하다가 안전기획부 해외공작국장이 됐습니다.”
해외공작국장은 침착하게 말했다.
“1987년 1월 9일 당시 홍콩에서 납북될 뻔했다던 상사원 윤태식의 기자회견을 기억하십니까? 나중에 허위로 판명됐죠.”
“어렴풋이 기억은 하고 있습니다.”
“당시 보도 상황을 보면 1월 8일부터 10일까지 KBS의 경우 9시 뉴스에 첫 회 28분, 그리고 매일 20분씩 상당히 중요한 사건으로 다루어졌는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검사가 의미 있는 어조로 물었다.
“저도 1회의 뉴스에서 한 사건에 그렇게 오랫동안 보도를 했다는 사실을 알고 놀랐습니다.”
“허위의 사실을 그렇게 부풀려 방송할 수 있으려면 그 배경이 어느 정도여야 할까요? 권력의 핵심에 계셨으니까 대충 아신다고 생각합니다만….”
검사의 어조 속에는 신사답게 인정할 건 인정하자는 채근이 담겨 있었다. 해외담당국장도 그걸 눈치 챈 것 같았다.
“제 경험으로 짐작할 때 상당히 조직적인 강력한 힘이 필요할 겁니다. 방송이나 기자들도 바보가 아니니까요.”
“87년 1월 6일경 싱가포르 요원이 보낸 전문을 결재하셨죠?”
“기억이 확실치 않습니다. 그 무렵 저는 수시로 특명을 받고 해외출장을 나갔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당시 온 전문들은 대신 부국장이 결재를 해서 위에 보고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 말에 검사는 출입국사실증명서를 내밀었다.
“저희가 알아본 바로는 윤태식에 관련된 전문이 온 날짜와 시각에 국장께서는 해외출장 중이 아니었는데 그렇다면 직접 그 전문들을 처리하신 게 아닙니까?”
“당시 온 전문이 한두 장도 아니고 출장도 여러 번 갔습니다. 출장 일자까지 하나하나 정확히 기억할 수는 없겠죠. 제가 국내에 있었다면 직접 결재하고 처리했겠죠.”
“당시 싱가포르 요원들이 타전한 전문들은 어떤 내용이었죠?”
“상사원 한 명이 북한 공관원과 접촉한 사안이었습니다.”
“해외요원들이 타전한 전문들은 대개 해외담당국장 선에서 종결된다던데 어떻습니까?”
“아닙니다. 냉전시대인 당시로서 그건 에이(A)급 정보였죠. 차장을 거쳐 부장까지 정식으로 보고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부장에게 보고된 그 사안이 대통령에게도 보고됐습니까?”
“그 여부는 저로서는 알 수 없습니다. 각 국에서 올라오는 보고내용 가운데 중요한 사항에 대해서는 안기부장이 선정해서 대통령에게 보고합니다. 그렇지만 대통령을 독대해서 보고하기 때문에 정확히는 제가 알 수 없습니다.”
“윤태식의 납북미수 건은 대통령에게 보고됐을 가능성이 있다는 말씀입니까?”
“중요사항이니까 보고됐을 가능성은 높다고 봅니다. 그 일 이외에도 최은희·신상옥의 납북이 언론에 대대적으로 보도된 게 제가 있을 때 발생한 사건입니다. 또 북한에서 김만철 가족이 넘어온 사건도 제가 처리했던 것이고요. 저희 해외파트는 윤태식의 경우도 비행기 안에서 대공수사국 요원들에게 넘겨주면 임무가 끝나기 때문에 그 이후의 일들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고 책임도 없습니다.”
“당시 윤태식의 기자회견은 안기부에서 고의적으로 허위사실을 보도하게 한 건데 어떻게 생각하시죠?”
“그건 대공 사건입니다. 제가 보기에는 관련 부서인 대공수사국에서 공작 차원의 호재로 봐서 기자회견을 건의해 윗선에서 결심을 받았을 수도 있습니다. 그쪽에 물어 보십시오. 그리고 이 말은 단순한 저의 추측일 뿐이라는 걸 말씀드립니다.”
▲ 1987년 1월 8일자 <중앙일보> 1면 상단 왼쪽에 ‘북괴 한국 상사원 납치 기도’라는 제목으로 윤태식 관련 기사가 났다. | ||
“당시 국내 정치상황에서 공안정국을 이끌어 나가는 파트는 대공수사국이었습니다. 그 쪽에서 공안정국 조성 차원에서 기자회견을 건의하고 그 결심을 받아냈을 겁니다.”
“당시 공안정국을 조성할 만큼 정치상황이 어려웠나요?”
“정부 쪽에서는 대통령 간접선거를 유지하려는 호헌 분위기였고 재야나 야당 측에서는 직선제를 위해 개헌을 해야 한다는 분위기가 고조되어 정국이 불안했습니다. 그래서 개헌논의를 잠재울 필요가 있었을 것으로 짐작됩니다.”
“김포공항으로 들어오기 이전에 이미 방콕에서 해외 특파원과 윤태식이 허위 인터뷰를 하게 했던데 아십니까?”
검사가 당시 <연합뉴스>를 받아 보도한 기사를 제시했다.
“압니다. 다만 개인적인 의견을 참고로 말씀드리면 공작에 이용하려면 해외에서 기자회견을 해서 단서를 만들 필요가 있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수사국 요원이 동행했을 겁니다.”
“방콕의 그 허위 기자회견을 강행하라는 지시 전문을 본부에서 보내신 사실이 있던데 어떻습니까?”
“일상적인 전문은 국장인 제 전결로 발송하는데 그 기자회견 지시 전문은 누구 명의로 발송됐는지 모르겠습니다. 다시 확인해야 할 것 같습니다.”
“안전기획부의 실무자들 말을 들어보면 기자회견같이 중요한 사항은 국장이 윗분들의 결심을 받아 결정되는 형식을 취한다고 하던데 어떻습니까? 방콕의 가짜 기자회견은 그 배경이나 이유를 다 아시는 거 아니겠습니까?”
“물론 정상적이라면 주무 국장인 제가 모를 리가 없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당시 김만철 일가를 귀국시키라는 특명을 받아 그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제가 물리적·시간적으로 윤태식 사건을 챙길 입장은 아니었습니다.”
“하여튼 문제의 핵심은 윤태식으로 하여금 허위 기자회견을 시켰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그 지시 전문을 내려보낸 책임자는 해외공작국장이구요. 그 책임을 빠져 나가시기는 힘들다고 보는데 사실대로 말씀해 주시죠.”
“제 개인적으로 또 상식적으로 판단할 때 허위 기자회견을 하라는 지시는 정신병자가 아니고야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전 거기 관여한 바가 없다는 걸 분명히 말씀드립니다. 그리고 저는 정통 외무 관료지 안기부 요원이 아니라는 걸 분명히 하고 싶습니다. 그런 차원은 안기부 내에서 ‘외인부대’인 제가 관여할 수도 없었습니다.”
“해외공작국장의 위치로는 힘이 없었다는 말씀입니까?”
검사가 물었다.
“그렇습니다. 우선 지휘부에는 정권의 막강한 실세인 장세동 부장과 이학봉 차장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중앙정보부 창설 이래로 커온 노련한 간부들이 있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외부에서 간 저에게 진짜 비밀은 알려주지 않습니다. 다만 저희 부서가 해외로 전문을 발송하고 받고 하니까 그 정도 실무적인 일은 한 셈이죠.”
해외공작국장은 짐작이라면서 약간의 힌트들을 흘렸다. 검사가 그것들을 놓치지 않고 잡아 조립하기 시작했다.
▲ 장세동 | ||
검사가 재차 확인했다.
“맞습니다. 이건 거대한 권력이 하나의 중요사업으로 보고 조직적으로 할 때 나올 수 있는 결과입니다. 그런 점만 보더라도 제가 혼자 나서서 그렇게 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저도 당시 누가 기자회견을 지시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아 어제 아침에 당시 홍콩 요원을 만났습니다. 식사를 하면서 물어보니까 당시 기자회견 건은 국장인 저와 국내담당 부서에서 함께 건의를 하여 결정된 것으로 알고 있다고 했습니다. 제가 펄쩍뛰면서 거기 관여하지 않았다고 하니까 홍콩 요원은 여태까지 자기는 내가 건의해서 결정한 것으로 알았는데 이제 오해가 풀렸다고 했습니다. 또 어제 점심 때 당시 부국장을 만나서 물어봤습니다. 나는 정말 기억이 나지 않는데 당시 누구의 지시로 기자회견이 이루어졌는지 알려달라고 했죠. 부국장 자신도 당시 누구의 지시를 받고 현지에 출장 갔는지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부국장이야 상관이 물어보기 때문에 면전에서 사실대로 얘기하지 못할 수 있는 거 아닌가요?”
“당시야 상관이었지만 지금이야 그렇겠습니까? 하여튼 그 사람들은 기억나지 않는다고 했어요.”
검사의 조사는 한 차례에 그치지 않았다. 당시 안기부 부장에서 수사실무자까지 불러 그들의 말이 정확히 일치하는지 입체적으로 확인하고 있었다. 얼마 후 검사가 그를 다시 불러 물었다.
“장세동 부장 측에 알아봤는데 윤태식 기자회견 사건은 당시 해외공작국장이 독단적으로 결정해서 처리한 거라고 하던데 어떻습니까?”
“주위에서는 제가 독단적으로 한 것처럼 오해하기도 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당시 싱가포르 정부에서도 사실을 확인하고 우리 정부의 기자회견 방침을 못마땅하게 여기고 있던 마당이었습니다. 국가와 국가 간의 이해가 부딪치는 상황이었죠. 그 상황에서 제가 왜 독단적으로 기자회견을 강행하라고 지시하겠습니까? 기자회견 보류 지시를 받을 때도 제가 부장님께 보고하고 그 지시를 받은 거고 솔직히 말씀드려서 강행 지시를 한 것도 부장님입니다.”
“지시는 어떻게 받았죠?”
“전화상으로 받았습니다.”
“잘못된 결정이라면 충언을 해야 했던 게 아닌가요?”
“제가 거역할 위치가 아니었습니다. 장 부장은 당시 실세 중의 실세로 제가 감히 그분 의사도 안 묻고 독자적으로 결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만일 장 부장이 제가 마음대로 했다는 것을 알면 가만히 있을 분이 아닙니다. 제가 옷을 벗거나 무슨 일이 나도 났을 겁니다.”
“그렇다면 부장의 지시였다는 증거가 있습니까?”
“당시 저는 중간에서 오해를 받을 우려가 있었습니다. 싱가포르 거점 요원들의 건의를 무시한 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전문에 기자회견 강행 지시 결정권자가 누구인지를 알 수 있을 흔적을 만들어 놓았습니다.”
엄상익 변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