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탄핵정국의 주역인 홍사덕 의원은 선거 패배 후 닷새 동안 소백산에 들어가 향후 거취를 구상했다. 그의 ‘이라크 발언’ 해법은 무엇일까. | ||
16대 국회의원 가운데 이번 총선에 다시 출마해 당선된 사람은 전체의 29.4%인 88명에 불과하다. 무려 70%에 달하는 16대 의원들이 금배지를 떼야 하는 신세다. 특히 이번 총선에선 여야 중진급 의원들의 무더기 낙선이 눈에 띈다. 이들은 짧게는 8년, 길게는 40여년 동안 문턱을 넘나들던 의원회관 사무실과도 이제 작별을 고해야 한다.
낙선한 중진 가운데는 78세의 김종필(JP) 전 자민련 총재처럼 아예 정계를 은퇴하는 경우가 있다. 반면 와신상담해서 올 10월 실시될 국회의원 재·보궐선거를 통해 재기하려는 중진들도 적지 않다. 또 일부는 개인 사무실을 차려놓고 향후 거취를 고민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43년간 정계에 몸담아왔고 이제 완전히 연소돼 재가 됐다”며 지난 19일 전격 정계 은퇴를 선언한 JP. ‘자식’과도 같은 자민련이 충남에서 4석을 얻는 데 그쳤고, 자신 또한 10선의 고비를 넘지 못한 현실이 결국 그에게 막다른 선택을 강요했는지도 모른다.
JP는 조만간 일본으로 출국해 당분간 휴식을 취할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서울 청구동 자택 관계자는 26일 이와 관련해 “아직 일본 여행 등 향후 일정에 대해 결정된 게 아무 것도 없다”고 말했다. 다만 JP는 정계 은퇴 선언 이후 두문불출하며 독서와 명상으로 소일하고 있다고 한다. 지금으로선 별도의 개인 사무실을 운영할 계획도 없다는 게 한 측근의 설명이다.
우여곡절 끝에 민주당 선대위원장을 맡아 광주에서 3보1배로 호남민심을 되돌려보려 했던 추미애 의원도 3선의 문턱에서 좌절했다. 선거기간 동안 다른 후보들의 지원유세에 몰입하다 자신의 지역구(서울 광진을) 관리에 소홀했던 것도 패배의 한 요인. 낙선한 추 의원은 지난 19일 선대위 해단식 이후 ‘묵언의 정치’에 들어갔다.
추 의원의 한 측근은 “‘민주당이 총선에서 참패했는데, 무슨 말이 필요하겠느냐’는 게 추 의원의 생각”이라며 “매스컴에 자신과 관련한 기사가 나오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차기 지도자’ 반열에 올라 있는 추 의원이 이번 총선에서 패배했다 해서 정치권과 등을 질 것으로 보는 시각은 전무하다.
추 의원과 가까운 한 정치권 인사는 “추 의원이 비록 지금은 ‘묵언 정치’를 하고 있지만 앞으로 민주당의 구심점으로 다시 돌아올 것”이라면서 “오는 6월에 열릴 예정인 민주당 전당대회를 통해 다시 전면에 나설 것으로 본다”고 전했다. 당 일각에서는 오는 10월 말 실시될 국회의원 재·보궐선거에 출마할 것이라는 전망도 나오고 있다.
요즘 추 의원은 총선 기간 동안 지친 몸과 마음을 추스르며, 외출은 가급적 삼간 채 서울 구의동 자택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고 있다고 한다. 한때 몇몇 주위사람들이 변호사 사무실 개설도 권유했지만 아직 아무런 결정을 내리지 않은 상태로 알려진다.
추미애 선대위원장과 이른바 ‘옥새전쟁’까지 벌인 직후 불모지인 대구 수성갑에 내려갔으나, 3위로 낙선한 조순형 전 대표의 향후 거취도 궁금증을 낳고 있다. 조 전 대표는 총선 다음날인 16일 총선 참패의 책임을 지고 당 대표직을 사퇴한 이후 주로 자택에서 부인 김금지 여사 등 가족들과 시간을 보내고 있다.
▲ 김종필 전 총재(왼쪽), 추미애 의원 | ||
그렇지만 오는 10월 예정인 국회의원 재·보궐선거에는 출마하지 않을 것 같다고 덧붙였다. 따라서 조 전 대표가 20년 동안의 의정 활동을 끝으로 정계 은퇴 수순에 들어간 것이 아니냐는 관측을 낳고 있다.
탄핵정국의 주역으로 경기 고양 일산갑에 출마해 열린우리당 한명숙 후보에게 패한 한나라당 홍사덕 의원은 총선 다음날 보좌진에게 의원회관 사무실을 정리할 것을 지시했다. 그리고 홍 의원 자신은 선거 패배의 충격에서 벗어나기 위해 혼자서 고향인 경북 영주 부근의 소백산에 들어가 20일까지 닷새동안 향후 거취를 구상했다.
소백산에 다녀온 다음에도 그는 현 정국과 관련해서는 일절 입을 열지 않고 있다고 한다. 그렇다고 해서 정계를 은퇴할 계획은 없는 것으로 안다는 게 측근들의 설명이다.
그렇지만 홍 의원이 재기에 나선다 해도 일단은 ‘이라크 발언’에 대한 매듭을 지은 다음에나 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홍 의원이 지난해부터 여러 차례에 걸쳐 ‘이라크 파병부대와 동참해서 한 달 정도 사병으로 근무하겠다’고 밝혔기 때문에 우선 이 ‘약속’부터 지키려 할 것으로 보인다.
홍 의원의 측근도 “홍 의원은 ‘일단 약속을 했으니까 지켜야 한다’는 소신을 갖고 있다”고 밝혔다. 그의 성격상 어떤 형태로든 ‘이라크행’을 결행한 이후 재·보궐선거 등을 통해 재기에 나설 것이라는 게 주위의 대체적인 관측이다.
이밖에 개인 연구소나 사무실을 차려놓고 일단 정계에서 발을 뺀 다음 ‘후일’을 도모하는 중진들도 적지 않다. 민주당 박상천 전 대표는 전남 고흥·보성에서 5선에 도전했으나, 고배를 마셨다. 그는 요즘 서울 여의도 자택과 의원회관 사무실을 오가면서 16년 동안의 의정활동을 정리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측근에 따르면 조만간 여의도 63빌딩 근처에 개인사무실을 열고 독서와 집필활동에 들어갈 예정이다.
민주당의 대표적인 중진인 김상현 의원도 광주 북구갑에서 7선에 도전했으나, 서울 서대문갑에서 출마했던 셋째아들 영호씨와 함께 동시에 낙선하는 불운을 겪었다. 김 의원도 박 전 대표와 마찬가지로 환경 관련 개인 연구소를 차릴 것이라고 측근들은 전했다. 또 4선에 도전했던 김옥두 의원(전남 장흥·영암)도 개인 사무실을 열 예정인 것으로 전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