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난 1977년 현대조선소를 방문한 박정희 박근혜 부녀(맨 위). 박근혜 대표는 지난 4월18일 삼성지구대를(가운데), 22일엔 남동공단을 방문해 부친의 ‘현장정치’를 계승했다(맨 아래). 국회사진기자단 | ||
이런 박 대표의 행동을 두고 정치권에서는 ‘벌써 그가 대권행보를 시작한 것이 아니냐’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하지만 주변의 이런 추측에도 박 대표의 발걸음은 멈출 줄 모른다. 문제는 박 대표의 이런 서민적 행보가 아버지 박정희 전 대통령의 이미지를 떠올리게 한다는 것이다. 일부에서는 ‘유신독재의 망령이 되살아난다’며 악평을 하고 있지만 박 대표가 마치 박 대통령의 ‘현신’인 양 그의 일거수일투족에 관심을 보이는 이들도 적지 않다. 박 대표의 ‘부전여전’ 이미지 메이킹을 따라가 봤다.
“박근혜 대표를 보면 한번쯤은 아버지 박정희 대통령과 너무 닮았다는 생각이 든다. 박 대표는 지방에 갈 때마다 많은 사람들을 만나는데 그들이 민원을 제기할 경우 이를 수첩에 꼼꼼하게 기록한다. 그리고 나중에 꼭 다시 비서진을 통해 민원 처리 사항을 확인한다. 그런데 박 대표의 이런 행동은 옛날에 박정희 대통령이 아무리 작은 민원이라도 자신이 직접 들은 것은 끝까지 챙겼다는 것과 너무 닮았다.”
최근 한나라당의 한 당직자가 박 대표에 관한 이야기를 하면서 소개한 일화다. 4·15 총선에서 한나라당이 그나마 선전할 수 있었던 것이 ‘박풍’ 때문이었다는 말을 하면서 나온 얘기였지만 당내 분위기는 확실히 총선 뒤 박 대표에게 후한 점수를 주고 있다.
비록 박 대표가 유세기간 동안 아버지를 직접 언급한 적은 없었지만 박 전 대통령을 간접적으로 떠올리게 하는 ‘지능적’인 전략을 구사한 것은 사실이었다. 먼저 그는 당 대표 경선을 하는 전당대회에서 한나라당의 위기 상황을 언급하며 “아직도 12척의 배가 남았다”던 충무공의 장계를 인용했다. 박 전 대통령이 가장 존경했던 인물로 국가적인 ‘영웅 만들기’의 대상이 됐던 이가 충무공이었기에 그의 연설에서 아버지의 흔적이 자연스럽게 묻어났다. 유세 지역을 순회하면서도 그는 “이 지역은 아버지가 각별하게 생각했던 곳”이라며 슬쩍 박 전 대통령을 떠올리게 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것은 모두 박 전 대통령과 직접 관련시키는 것이 아니라 간접적인 연상을 하게 함으로써 오히려 더 호소력이 커졌다는 평가다. 또한 이러한 이미지 메이킹은 어머니 육영수 여사의 헤어스타일과 어우러지며 옛 시절에 대한 향수를 더욱 자극하는 효과를 자아냈다. 어쨌든 이번 총선을 통해 박 전 대통령의 이미지가 다시 살아났고 그것이 표로도 연결되었다는 점에서 그 잠재력을 무시할 수는 없게 됐다. 박 대표의 이러한 이미지 메이킹에 대해서는 여러 논란이 있지만 이는 논외로 하고 그가 어떻게 박정희 전 대통령을 벤치마킹하고 있는지 보다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먼저 박 대표의 정치행보 중 큰 특징의 하나는 ‘현장성’이다. 그는 지난 4월22일 인천 남동공단 방문을 시작으로 5월 중순까지 경기·충청·강원·호남·영남 등 전국을 돌며 주요 공단과 시장, 시·도당사 등을 찾는 현장 방문에 들어갔다. 이번 민생투어의 특징은 전국의 재래시장과 공단 등 철저하게 민생과 직결된 곳만 방문한다는 데 있다. 박 대표측은 “이런 현장방문 일정은 총선 기간 쏟아낸 공약의 실천을 위해서 필수적”이라고 전한다. 자신이 내뱉은 정책들을 현장방문을 통해 실현 여부를 판단하고 이를 입법과정에 적극 반영하겠다는 뜻이 담겨 있다는 것.
이는 예전 박정희 전 대통령의 ‘현장방문’정치와 맥이 닿아 있다. 박 전 대통령은 경부고속도로 건설 당시 헬기를 이용해 수시로 현장을 방문해 꼼꼼하게 진척도를 살폈다. 강변북로 등 주요 간선도로를 만들 때도 박 전 대통령의 ‘불시 방문’ 때문에 관계자들이 늘 비상 근무를 서야만 했다는 일화도 있다. 박 대표는 이 부분에 대해 이렇게 밝히고 있다.
“아버지는 이루고 말겠다는 의지가 정말 대단하셔서 한번 시작한 일은 끝까지 챙기셨다. 경부고속도로를 건설하기로 결심한 후에는 자나깨나 고속도로 생각을 하면서 길을 어느 쪽으로 내는 것이 좋을까를 결정하기 위해 직접 헬리콥터를 타고 몇 번이나 현장을 순시하셨다. 고속도로의 인터체인지의 구조는 어떻게 할까 종이에다 여러 가지 방향으로 직접 그려보시기도 했다. 공업단지를 지정할 때도 반드시 직접 사전답사와 현장확인을 하신 후 결정하셨다.”
박 대표는 최근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도 “아버지에게 배운 점이 많다. 특히 어떤 일을 지시하시면 그걸로 끝나는 게 아니라 체크하고 끝까지 챙겨서 완성될 때까지 정확하게 하신 것이 좋은 교훈이 됐다. 그냥 말만 툭 던져 놓고 끝나는 게 아니라 확인을 계속하는 것이다. 그걸 보면서 ‘아, 정치는 저렇게 하는구나’, ‘이렇게 해야 올바른 삶이구나’ 이런 것들을 느꼈다”고 말한 적이 있다.
박 대표는 민생투어를 할 때 손바닥만한 회색 수첩을 가지고 다니면서 면담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경청하고 이를 기록한 뒤 수시로 확인을 하고 있다고 한다. 항상 현장에서 듣고, 그리고 끝까지 확인하는 것이 박 대표의 첫 번째 벤치마킹인 셈이다.
두 번째는 ‘구체성’이다. 박 대표는 뜬구름 잡는 얘기를 싫어한다. 지키지도 못할 약속이나 공약은 처음부터 하지 말자는 것이다. 그가 지난 4월22일 인천 용현동의 재래시장을 방문했을 때 그를 수행하던 윤상현 전 후보가 “약 1조원가량을 재래시장을 위한 예산으로 확보하겠다”고 얘기하자 이를 제지하면서 “(약속은) 상인들이 피부에 와닿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박 대표는 또한 “미혼 남성 근로자들이 장가가기 힘들다고 하는데 그런 문제까지도 해결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이런 구체적이고 상세한 지적 또한 아버지의 일 처리 과정과 닮았다는 평가다.
다음은 박 대표의 계속되는 회상.
“아버지는 실용적이고 실질적인 것을 좋아하셨다. 말만 앞세우는 것을 싫어하셨다. 과학자, 기술자, 기능공들이 국가발전에 얼마나 중요한지 잘 알고 계셨기 때문에 과학과 기술을 중시하는 사회 기풍을 만들려고 노력하셨다. 각종 연구소들은 그때 설립되었다.”
박 전 대통령은 재임 시절 수출신장에 상당한 공을 들였다. 그는 수출진흥회의를 만들어 관계장관들과 경제4단체장을 참석시켜 매달 수출문제 전반을 검토케 했다. 65년 1월 첫 회의가 열렸는데 79년 10월 사망 때까지 이 회의를 한 번도 거른 적이 없었다고 한다. 그는 집무실에 기업별 수출현황을 막대그래프로 그려놓게 해 수출실적을 매달 체크하고 목표에 미달하면 관계부처와 기업을 독려했다.
청와대에서 경제수석을 역임한 오원철씨는 “박 대통령은 국력의 척도를 수출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수출목표만큼은 손수 책정했다. 64년 1억달러 수출 때도 그랬고, 71년 10억달러 수출 때도 박 대통령이 직접 지시했다”고 밝혔다. 한 나라의 대통령이 구체적인 수출 액수까지 제시하면서 독려했던 것이다. 지시만 하고 확인은 하지 않는 지도자의 마인드였다면 이런 구체적인 리더십은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박 대표가 이런 아버지의 장점을 받아들여 그대로 실천하고 있는 셈이다.
마지막으로 ‘서민성’을 들 수 있다. 박 대표는 지난해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아버지는 근검절약이 몸에 배서 청와대에서도 불필요한 전등은 모두 끄셨다. 더운 날씨는 부채로 이겼으며 종이를 아끼기 위해 이면지를 쓰도록 하셨다”고 밝히면서 “‘인생의 반은 습관을 만드는 시기고, 나머지 반은 자기가 만든 습관에 따라서 사는 때’라고 생각한다. 어렵지만 하나하나 좋은 습관을 형성해 나가는 것이 자기를 바르게 하는 것의 시작이다. 나는 아버지로부터 여러 가지 좋은 습관을 배운 것 같다”고 말하고 있다. 그가 비록 청와대라는 권력의 최정점에서 살긴 했지만 서민적인 관습에 익숙해지려고 애썼음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박 대표의 옷은 심플한 디자인에 화려한 장신구가 거의 없다. 이런 패션도 예전 박정희 대통령의 ‘새마을 신사복’을 연상시킨다. 사람들은 박 대표가 재래시장을 방문해 서민들의 손을 잡는 모습을 보면서 ‘농부들과 막걸리를 마시며 즐거워하던’ 박정희의 이미지를 떠올리고 있는 셈이다. 또한 박 대표가 요즘 가장 강조하는 단어도 ‘민생’이다. 서민들의 눈높이로 경제를 생각하고 이를 적극 의정활동에 반영시키겠다는 의지의 표현인 것이다.
박 대표는 지난 4월15일 총선을 마치고 사흘 뒤 주목할 만한 행보를 보였다. 일요일인 이날 자신이 살고 있는 서울 삼성동 자택 인근의 삼성지구대를 방문해 휴일 근무중인 경찰관들에게 최근 치안사정과 근무여건 등을 묻고 노고를 격려했다. 그리고 이어 자신이 자주 이용하던 인근 점포에 들러 상인들이 느끼는 체감경기에 대해 듣고 앞으로 경제 살리기에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얼핏 보기에 이는 대통령의 불시 현장방문을 연상시키는 행보라고도 할 수 있다. 이 하나의 이벤트를 통해 박 대표는 지금까지 살펴본 이미지 메이킹 ‘3박자’를 고루 보여준 셈이다. 여기에 박 대표가 추구하는 현장성(경찰서가 아닌 파출소), 구체성(동네 상인들의 체감 경기 수집), 서민성(동네 슈퍼 방문)의 이미지가 모두 녹아들어 있기 때문이다.
정가에서 ‘박정희 벤치마킹’으로 읽혀지는 박 대표의 최근 행보. 과연 아버지 박 전 대통령의 ‘유산’은 박 대표의 큰 꿈 앞에 어떤 빛과 그림자를 드리우게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