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의도’가 대량 실직이라는 또다른 후유증을 앓고 있다. 총선을 거치면서 현역 의원들이 대거 물갈이됨에 따라 그에 ‘딸린’ 보좌진들도 새로운 살길을 찾아야 할 신세로 전락한 것이다. | ||
사정이 이렇다 보니 보좌진들의 살아남기 경쟁도 치열하다. 의원들이나 보좌진 동료들과의 개인적 친분을 이용해 다른 의원실로 자리를 옮기는 경우가 가장 많다. ‘주군’의 배려로 다른 직장으로 옮기는 경우도 잘된 편이다. 하지만 이런 경우는 ‘하늘의 별따기’고 대부분 스스로 다른 살길을 찾아야 한다. 여의도에서 불고 있는 보좌진들의 실업 찬바람을 짚어봤다.
17대 총선에서 살아남은 A의원 사무실.
“선거 치르느라 고생했다. 앞으로도 계속 열심히 해주고… B비서관은 내가 다른 의원실의 자리를 알아봐 주겠다.”
요즘 의원회관 사무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마지막’ 미팅 장면이다. A의원은 보좌진들을 모아놓고 2시간 동안 일장연설을 한 다음 B비서관의 ‘해고’를 통보했다. 그동안 보좌활동은 제대로 하지 않고 사적인 일에만 매달렸다는 것이 그 이유. A의원은 그나마 당선이 되었기 때문에 아랫사람을 챙길 여력이라도 있지만 낙선한 의원들의 경우 자신들의 미래도 불투명해 보좌진들에게 변변한 말 한마디 못해주고 짐을 싸게 만든다.
현재 국회의원 1명 밑에서 별정직 공무원 대우를 받으며 정부로부터 보수를 받는 인원은 4급 보좌관 2명, 5급 비서관 1명, 6·7·9급 비서 각 1명 등 총 6명이다. 16대 국회의원 2백71명 중에서 1백59명이 금배지를 상실했기 때문에 이들에 딸린 보좌진 9백54명이 실업자로 전락할 위기에 있다.
한나라당의 경우 현역의원 80여 명이 물갈이돼 4백80명 안팎의 보좌진이 일자리를 잃을 위기에 처해 있다. 이번 총선에서 의원수가 7분의 1로 줄어든 민주당도 상황은 마찬가지다. 현역의원 61명 중 4명만이 살아남아 보좌진 3백42명이 다른 자리를 찾아봐야 할 처지다.
의원수가 대폭 늘어난 열린우리당은 상대적으로 느긋한 편이다. 하지만 당선된 의원들 가운데에서도 ‘중간평가’를 통해 일부 보좌진들을 물갈이하기 때문에 열린우리당도 구조조정의 물결에 휩싸여 있는 게 사실이다.
보좌진들은 별정직 공무원으로 이에 준하는 대우를 받는다. 연봉도 4급 보좌관의 경우 6천여만원에 달하는 등 ‘특급대우’를 받고 있다. 하지만 이는 속 빈 강정에 불과하다. 이들의 미래는 전적으로 의원들의 ‘능력’에 달려 있다. 4선, 5선을 거듭하는 능력있는 의원들을 모신 경우 보좌진들도 10여 년 이상 고액 연봉을 받으면서 비교적 안정된 생활을 한다.
하지만 낙선이 되면 상황은 백팔십도 달라진다. 왜냐하면 이들의 임면권이 전적으로 의원 개인에게 있기 때문이다. 의원의 “해고” 한마디에 직장을 잃을 수 있는 보좌진들은 원칙과 소신을 갖고 일하기보다는 언제나 ‘예스맨’이 될 수밖에 없다. 보좌진들이 자신들의 생사여탈권을 쥔 의원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고 결국 종속적인 관계가 형성되는 것이다.
의원들의 해고 통보 형식도 가지가지. 그동안의 정리 때문에 몇 시간 동안 다독거리며 장황하게 설명하며 완곡하게 해고를 통보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그냥 불러서 “다른 자리를 알아보라”고 간단하게 구두로 통보하는 것도 다반사. 이도 저도 아니면 의원의 개인 사무실이나 연구실에서 일하라며 잠시 보좌진에서 물러나게 한 뒤 자연스럽게 그만두게 하는 경우도 있다. 말로는 해고하지 않는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하는 일이 거의 없기 때문에 할 수 없이 의원 곁을 떠나게 된다고 한다.
의원들에게 해고 통보를 받은 순간부터 보좌진들의 발길은 바빠진다. 먼저 이들은 다시 보좌진으로 채용될 수 있도록 사력을 다한다. 루트는 다양하다. 낙선한 의원이나 그동안 친분이 있던 의원들을 찾아가 보좌진 자리를 알아봐 주도록 ‘읍소 작전’을 불사한다. 아니면 안면 있는 의원실에 슬쩍 이력서를 두고 나오는 경우도 많다.
개인적 친분이 없으면 보좌관협의회를 통해 자리를 알아보기도 한다. 한나라당 보좌관협의회 장재혁 후생복지위원장은 이에 대해 “요즘 하루에도 수십통씩 실직한 보좌관들의 이력서가 들어온다. 이들의 기록을 책자로 만들어 각 의원실에 보내 재취업을 도울 예정이다”라고 밝혔다.
하지만 다시 보좌진 생활을 하기란 쉽지 않다. 한나라당의 경우 3백여 명의 보좌관협의회 가입 회원 중에서 약 2백여 명이 실직한 상태다.
그렇다면 이들은 어디로 가는 것일까. 대부분 기업체의 문을 두드리는데 경기 침체로 이마저도 매우 열악한 상황이다. 운 좋게 대기업에 취업해 정치권 언저리의 정보를 수집하고 로비를 벌이는 보좌진 출신도 있다. 기업에서 높은 연봉을 받기도 하지만 수명은 그리 길지 않은 편이다.
일부는 선거 브로커로 활동하는 경우도 있다. 향우회나 기업협회 등 ‘조직’을 만들어 선거 때마다 후보들에게 접근해 브로커로 활동하기도 한다. 지금은 많이 줄었지만 보좌관 시절의 인맥을 바탕으로 민원해결 브로커를 하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정치권을 돌아다니며 들은 정보를 기업체나 다른 곳에 파는 사람도 있다. 이도 저도 아니면 정치권 언저리를 배회하며 ‘낭인’생활을 하기도 한단다.
이런 불안정한 고용 때문에 보좌진들은 맞벌이를 선호한다. 한나라당 C 보좌관은 “미래가 불안정하니 어쩔 수 없는 선택으로 대부분의 보좌진이 미래에 대비해 맞벌이를 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리고 보좌진 생활을 하는 동안 부지런히 재테크를 하는 경우도 많다. ‘예고된 실업자’들이기 때문에 미래에 대한 대비를 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
16대 국회 당시 정책보좌관(4급)이라는 보좌진 자리가 하나 더 늘어나면서 이번 총선으로 역대 어느 국회보다 보좌진들의 실업률이 높아졌다고 한다. 한나라당 보좌관협의회 장재혁 위원장은 “보좌진은 벤처기업과 같다. 의원이 당선되면 높은 연봉에 좋은 대우를 받지만 그렇지 않으면 바로 실업자로 전락한다. 이런 제도에 대해 부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실력 있는 보좌진들이 자리가 없어 국회를 떠나는 것을 보면 국가적 인력 낭비라는 생각이 든다. 이들의 정치 경험을 살릴 수 있는 제도적 장치가 마련되었으면 좋겠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