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대통령이 지난 7월 24일 정부세종청사에서 주재한 확대경제관계장관회의. 박 대통령은 이날 제1차 규제개혁장관회의 때와 마찬가지로 ‘규제개혁’을 강조했다. 사진제공=청와대
박근혜 대통령이 규제개혁에 소극적인 공무원들의 복지부동 행태를 질책하며 공식 회의석상에서 쏟아냈던 말들이다. 두 회의 사이에는 거의 5개월의 시차가 있었지만 내용은 사실상 ‘동어반복’이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로 비슷했다. 박 대통령은 지난 7월 24일 확대경제장관회의를 주재한 자리에서도 이와 같은 동어반복을 했다. 3월 20일 회의 당시 지적했던 온라인 공인인증서, 액티브X 관련 규제가 몇 달이 지나도록 해소되지 않고 있다는 지적이었다.
박 대통령이 기회가 있을 때마다 ‘정책은 수립이 10%, 집행이 90%’라고 말해 온 점을 되돌아보면 말만 무성하고 성과는 없는 정책에 대해 거듭 추궁하는 이런 모습은 전혀 이상할 게 없어 보인다. 하지만 최근 박 대통령의 동어반복은 청와대와 정부 부처 관계자들 모두를 긴장하게 만들고 있다. 동어반복의 주제가 다름 아닌 규제개혁이기 때문이다.
규제개혁은 박 대통령이 집권 2년차를 맞은 2014년 경제 활성화를 위해 가장 의욕적으로 밀어붙여 온 주제다. 박 대통령이 가장 역점을 둬 온 분야에서 기대치와 실제 간의 심각한 괴리가 동어반복으로 나타나고 있는 셈이다. 이런 심각한 괴리가 청와대와 정부 관계자들에게 ‘발등의 불’로 각인된 것은 지난 8월 20일로 예정됐던 제2차 규제개혁장관회의가 불과 사흘 전에 돌연 연기되면서부터다.
청와대는 민경욱 대변인을 통해 “국민과 언론의 관심과 기대에 부응하는 내실 있는 콘텐츠를 준비하기 위해 더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는 결론에 이르러 부득이 회의 일정을 늦추게 됐다”고 발표했다. 정부 부처들이 아직 국민과 언론의 관심과 기대에 부응할 만한 내실 있는 콘텐츠를 만들지 못했다는 사실을 청와대가 공식 발표를 통해 인정한 셈이다. 더욱이 언제 회의를 열지에 대해 청와대는 아무런 설명도 내놓지 않았다.
청와대 관계자들 사이에서는 박 대통령이 단단히 화가 났다는 얘기가 흘러 나왔다. 청와대 참모들과 규제 업무를 담당하고 있는 정부 부처 관계자들의 전언을 종합하면 이번 회의 준비상황을 보고받은 박 대통령은 적잖은 충격을 받았고, 그게 결국 무기한 회의 연기로 이어졌을 것이라는 추론에 이르게 된다.
한 청와대 관계자는 “정부 부처들이 번지수를 완전히 잘못 짚었다”고 잘라 말했다. 이번 회의는 지난 3월 20일 1차 규제개혁회의 때 국민들에게 풀겠다고 약속했던 규제들이 실제로 얼마나 해소됐는지 다시 보고하고, 미진한 부분에 대해서는 앞으로 언제까지 어떻게 해결할 것인지 전략을 논의하기 위한 장이 돼야 했다. 그러나 정부 부처들은 전혀 다른 접근을 하고 있었다는 지적이었다.
청와대와 정부 부처 간의 이런 생각의 차이는 회의 진행방식에 대한 이견으로도 표출됐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청와대는 1차 회의 때처럼 이번에도 TV로 생중계되는 가운데 정부뿐 아니라 민간 기업, 중소 상공인, 창업 예정자 등이 끝장토론을 벌이는 형식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고 한다.
반면 정부 쪽에서는 대통령의 모두발언만 공개하는 일반적인 정부 회의 형식을 생각했던 것으로 전해졌다. 한 경제부처 관계자는 “청와대 쪽에서 비공개 회의를 TV로 생중계되는 회의로 바꾸자고 강하게 주장해 그렇게 하기로 돼 있었는데, 결국 회의 자체가 연기돼 버렸다”며 “청와대가 ‘지금의 준비상태로 TV 생중계는 어렵다’고 판단했기 때문인 것 같다”고 말했다.
2차 규제개혁회의가 이런 혼선 속에 무기한 연기되는 바람에 박 대통령의 구상도 차질을 빚게 됐다. 박 대통령은 ‘확대경제관계장관회의(7월 24일)→무역투자진흥회의(8월 12일)→규제개혁장관회의(8월 20일)→국민경제자문회의(8월 26일)’ 순으로 일련의 경제 관련 회의를 이어가면서 추석 연휴(9월 6~10일) 전까지 ‘경제 올인’ 행보를 이어가려 했다.
이보다 더 큰 문제는 2차 규제개혁회의를 연기하게 된 근본 원인이 단기간에 해소되기 어렵다는 데 있다. ‘성과를 가져오라’는 대통령의 질책이 떨어졌지만 정부 부처들이 당장 내놓을 만한 규제개혁 성과가 마땅치 않다는 얘기다. 한 정부 부처의 규제개혁 담당자는 “규제개혁이라는 건 기본적으로 국회의 입법 과정과 연동될 수밖에 없는데 개점휴업 상태인 국회는 제쳐두고 부처들만 닦달하는 것은 잘못된 처방”이라며 “규제개혁 담당자들이 다들 패닉에 빠져 있다”고 분위기를 전했다.
청와대와 새누리당에선 “어떻게 5개월 동안 내놓을 만한 성과 하나 만들지 못하느냐”는 불만의 목소리가 나온다. 새누리당 출신의 한 청와대 관계자는 “1차 규제개혁회의 때 장장 7시간 동안 국민들에게 규제를 풀겠다고 약속을 했는데, 이제껏 제대로 된 성과가 안 나오는 걸 보면 과연 공무원들이 움직이고 있는지 의심케 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부처 공무원들과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규제개혁을 다루는 박 대통령과 여권 수뇌부의 접근법이 잘못됐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한 경제부처 고위 관계자는 “규제개혁이 성과가 있으려면 ‘덩어리 규제’를 풀어야 하는데, 이를 위해선 영리의료법인 허용처럼 사회적 논쟁 소지가 있는 사안들을 먼저 정리해줘야 한다”며 “정치로 풀어야 할 것을 공무원들에게 풀라고 하면 누구도 해답을 내놓기 어렵다”고 말했다. 규제개혁을 둘러싼 혼선이 여권과 정부 부처 간의 불협화음으로 이어질 수도 있음을 시사하는 대목이다.
박공헌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