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7월 22일 오전 한 청와대 인사는 이날치 조간신문을 보며 허탈감 섞인 웃음만 지었다. 이날치 신문들은 지난 6월 12일 순천의 한 매실밭에서 발견된 변사체가 세월호 참사의 실질적 원인 제공자로 지목됐던 유병언 전 세모그룹 회장의 변사체로 확인됐다는 소식으로 온통 도배돼 있었다. 이 사실은 40일이 지난 23일까지 청와대에 보고조차 되지 않았다고 한다. “오늘이 2기 내각 첫 국무회의 날인데…”라며 말을 잇지 못하는 이 인사의 한숨 속에는 이번 사태의 파장이 어디까지 미칠지에 대한 초조함이 묻어났다.
박근혜정부가 2기 내각을 출범시키며 ‘경제 활성화’에 올인하겠다고 선언했지만, 유병언 전 회장의 사망 파장으로 ‘세월호 프레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7월 24일 오전 정부세종청사에서 열린 박근혜 대통령 주재 경제관계장관회의. 사진제공=청와대
이후 진행된 과정을 보면 이 인사의 불안한 예감은 정확히 맞아 들어가는 분위기다. 박근혜 대통령은 22일 국무회의를 주재하면서 장관들에게 “금융·재정을 비롯한 정부가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써서 경제 살리기 총력전을 펼치라”고 지시했다. 2기 내각 첫 국무회의에 맞춰 박 대통령이 작심하고 내놓은 것으로, 증시를 출렁이게 하고도 남을 만한 메시지였다. 아울러 박 대통령이 세월호 참사의 충격에서 벗어나 그야말로 경제 활성화에 ‘올인’하겠다는 선언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렇게 중요한 의미가 담긴 박 대통령의 메시지도 ‘유병언 사체’에 완전히 묻혔고 이러한 ‘사태’는 연일 지속됐다. ‘22일 2기 내각 첫 국무회의→24일 확대경제관계장관회의와 새 경제팀의 경제정책 방향 발표→25일 장·차관급 후속인사 발표와 시장·도지사 초청 간담회’ 순으로 굵직굵직한 일정을 이어가며 ‘경제 올인 체제’에 시동을 걸려던 박 대통령의 구상은 시작부터 예기치 못했던 외생변수로 인해 김이 새 버린 것이다.
강력한 경제 드라이브로 ‘세월호 프레임’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박 대통령의 하반기 정국 구상도 제동이 걸렸다. 특히 전 국민적인 허탈감을 자아낸 유 전 회장 사망 확인 과정은 단발성 사건으로 끝나지 않고 두고두고 박 대통령에게 부담이 될 가능성이 높다. 죽은 유병언이 박 대통령의 발목을 잡는 형국으로, 가히 ‘유병언의 저주’라 부를 만하다.
무엇보다도 이제 막 첫 발을 뗀 박근혜 정부 2기 내각이 다시 흔들리게 된 것은 박 대통령에게 큰 타격이다. 청와대는 대외적으로 신중한 입장을 견지하고 있지만, 여권에서는 박 대통령이 황교안 장관과 검·경 수뇌부를 계속 감싸고 갈 수는 없을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하다. 부실수사 책임을 지고 최재경 전 인천지검장이 사퇴했고, 정순도 전남지방경찰청장과 우형호 순천경찰서장 등이 직위해제됐지만 이 정도로 넘어갈 수 있는 사안이 아니라는 것이다.
실제로 지난 24일 열린 새누리당 비공개 최고위원회의에서는 부실수사 책임을 어디까지 물어야 하는지를 둘러싸고 난상토론이 벌어졌다. 회의에 참석했던 한 관계자는 “김무성 대표가 거의 20분 동안 부실수사를 질타하면서 책임자를 문책해야 한다는 뜻을 밝혔다”며 “다른 참석자들도 대부분 문책인사는 불가피하다는 데 인식을 같이 했다”고 전했다. 이 관계자는 “김진태 총장, 이성한 청장 경질은 당연시되고 있고, 다만 법무부 장관을 교체해야 할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엇갈렸다”고 덧붙였다.
검찰총장·경찰청장은 장관급이 아니지만 장관과 마찬가지로 국회 인사청문회를 거쳐야 하는 자리다. 2기 내각을 구성하며 국무총리 후보자 2명, 부총리 후보자 1명, 장관 후보자 1명, 총 4명이 줄줄이 낙마하는 인사 참사의 악몽에서 이제 막 벗어난 박 대통령이 다시 한 번 깊은 ‘인사 수렁’을 각오해야 하는 상황인 셈이다. 청와대 일각에서는 이런 이유 때문에 “당장 욕을 먹을 것을 각오하고 정면돌파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하지만 최근 인사 참사를 통해 아무리 대통령이라고 해도 민심을 거스를 수는 없다는 점은 분명히 확인됐다는 게 중론이다. 한 여권 고위 관계자는 “2기 내각 구성 때 이미 청와대가 황교안 장관 교체를 검토했었다”며 “쇄신하지 않아서 더 큰 부담이 된다면 박 대통령으로서도 당연히 결단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단지 수뇌부 경질 차원이 아니라 검·경 조직에 대한 근본적 개혁 필요성이 확인된 것도 박 대통령에게 큰 부담이다. 세월호 참사와 사후 대처 과정에서 해양수산부, 안전행정부, 해양경찰청 등의 한심한 행태가 국민적 공분을 자아냈었는데, 이번엔 유병언 전 회장 추적과 수사 과정에서 검·경도 ‘밑바닥’을 드러냈다. 설상가상으로 검·경은 304명이라는 어마어마한 희생(실종)자가 발생한 상황에서도 수사공조를 제대로 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무능력, 무사안일주의의 극치를 보여줬다.
한 청와대 행정관은 “세월호 참사 후에도 검·경이 각자 자기들끼리 대충대충 일하는 습성을 버리지 못했다는 사실이 만천하에 드러났다”며 “5월 25일 송치재 별장을 급습했던 검찰이 그곳에서 유병언의 흔적을 발견했다는 사실을 즉시 경찰에 알려주고, 그곳을 지키도록 조치했더라면 유병언은 아마 산 채로 검거됐을 것이다. 검찰이 아무 조치도 하지 않았다는 게 그야말로 통탄할 일”이라고 혀를 찼다.
법무부 장관과 검·경 수뇌부에 대한 인적쇄신이든, 조직 전체에 대한 개혁 작업이든 박 대통령의 경제 올인 구상에 걸림돌이 되기는 마찬가지다. 이런 문제들을 둘러싸고 청와대와 야당, 여당과 야당이 충돌할 경우 경제 활성화와 국가 혁신 관련 법안들 처리는 뒷전으로 밀릴 수밖에 없다. 당연히 국민들의 시선도 경제 활성화 등 새로운 이슈로 옮겨가지 못하고 세월호 참사에 고정될 공산이 크다.
국가 개조 수준의 혁신을 약속했던 박 대통령과 청와대의 신뢰도가 다시 한 번 땅에 떨어진 것 역시 두고두고 박 대통령의 발목을 잡을 것으로 보인다. 한 정치평론가는 “유병언 전 회장이 사망한 줄도 모르고 박 대통령은 계속해서 공개적으로 ‘유병언 잡으라’고 닦달한 셈”이라며 “레임덕은 권력의 희화화에서 시작된다는 점에서 이는 결코 그냥 넘길 수 있는 일이 아니다”라고 지적했다.
실제로 유병언 전 회장의 뒤늦은 사망 확인으로 인해 박 대통령의 체면은 깎일 대로 깎였다. 박 대통령이 공개 회의석상에서 유 전 회장을 조속히 검거하라고 강조한 게 5차례다. 가히 ‘기회 있을 때마다 얘기했다’고 할 만하다. 특히 6월 10일 국무회의 발언은 지시라기보다는 질책에 가까웠다. 이날 회의에서 박 대통령은 “지금 유병언 검거를 위해서 검·경이 많은 노력을 하고 있지만 이렇게 못 잡고 있는 것은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한다”며 “지금까지의 검거 방식을 재점검하고 다른 추가적인 방법은 없는지, 모든 수단과 방법을 검토해서 반드시 법의 심판을 받도록 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박 대통령의 강력한 질책은 검·경뿐 아니라 육·해·공군이 총동원되는 검거작전으로 이어졌다. 군 당국은 유 전 회장의 밀항을 막겠다면서 서·남해안에서 초계 활동 중이었던 구축함, 호위함과 P-3 대잠 초계기, 해안 감시 레이더 등 첨단 장비까지 동원했다. 전투 또는 작전과 무관하게 군 당국이 이번처럼 총동원된 사례는 한국전쟁 이후 처음 있는 일이었다. 박 대통령의 지시에서 시작된 이런 추적 활동은 결국 ‘삽질’로 판명됐고, 그 책임은 고스란히 박 대통령에게 돌아가게 됐다.
여권 일각에서는 유병언 전 회장의 사망으로 세월호 참사에 대한 국민적 분노가 박근혜 정부, 청와대로 향하는 것 아니냐는 우려의 목소리도 나온다. ‘악의 근원’으로 여겨졌던 대상이 사라지면서 그동안 책임론의 화살로부터 조금 비껴 있던 청와대와 정부가 심판대에 오르게 될 수 있다는 얘기다.
한 새누리당 관계자는 “세월호 참사 당일 7시간 동안 소재가 밝혀지지 않은 박 대통령의 행적을 두고 각종 루머가 판을 치고 있는 점은 예사롭지 않은 일”이라며 “유병언에게 쏠렸던 관심이 청와대로 향하게 된다면 올 하반기에도 박 대통령이 세월호의 악몽에서 벗어나기 어려울 수도 있다”고 말했다.
박공헌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