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찰은 데커가 목매달아 자살했다고 생각했지만 검시관은 “자살 증거가 없다. 사고사로 봐야 한다”고 말해 그의 죽음을 미궁으로 빠트렸다.
앨버트 데커의 꿈은 정신 분석가였고, 명문대인 보든 칼리지에 다니며 학업에 열중했다. 하지만 우연한 기회에 무대의 짜릿함을 맛본 그는 1927년, 22세의 나이에 연극배우가 되었고, 10년 동안 브로드웨이 생활을 한 후 서른두 살인 1937년에 할리우드로 간다. 당시는 수려한 외모와 카리스마가 스타의 조건이던 스튜디오 시대. 메이저 영화의 주연을 할 순 없었지만, 그는 연극에서 쌓은 탄탄한 연기력과 개성적인 외모로 곧 조연급 캐릭터 배우로 이곳저곳에서 출연 제의를 받는다. <킬러스>(1946)나 <키스 미 데들리>(1955) 같은 누아르는 그가 가장 돋보였던 장르였다. 그레고리 펙의 <신사협정>(1947), 제임스 딘의 <에덴의 동쪽>(1955), 엘리자베스 테일러와 몽고메리 클리프트의 <지난 여름 갑자기>(1959) 등에선 당대 최고의 스타들과 함께했다. B급 SF인 <닥터 사이클롭스>(1940)에선 광기에 사로잡힌 과학자 역으로 강한 인상을 남겼다. 그는 그렇게 70여 편의 영화와 30여 편의 TV 드라마에 출연했으며 꾸준히 연극 무대에 섰던, 부지런한 배우였다.
이렇게 바쁜 와중에도 그는 새로운 도전을 감행했다. 1944년 민주당 소속으로 캘리포니아 하원의원으로 당선된 그는 1945년부터 1947년까지 의정 활동을 했다. 그의 가장 큰 업적은, 당시 ‘빨갱이 사냥’에 열을 올리던 공화당의 조셉 매카시 의원에 맞서 맹렬히 싸운 것이었다. 하지만 그 결과 앨버트 데커는 매카시의 블랙리스트에 올랐고, 한 동안 할리우드에서 활동하지 못해 뉴욕의 연극 무대로 돌아가기도 했다.
다시 영화계에 복귀해 활발한 활동을 펼치던 1957년, 그는 큰 비극을 겪는다. 애거서 크리스티 원작의 연극 <검찰 측 증인>에 출연하기 위해 플로리다에 머물 때였다. 그의 아들 잔 데커가 죽은 채 발견된 것이다. 뉴욕의 집 침실. 데커의 아들은 22구경 칼리버 라이플의 소음기를 조립하다가 갑자기 발사된 총알에 오른쪽 눈을 관통당했고 즉사했다. 왜 16세 소년이 그 총을 가지고 있었을까? 의문은 남지만 경찰은 사고사로 결론을 내렸다. 이후 데커는 아내 에스터와 이혼했고, 새로운 인생을 계획하고 있었다. 제럴딘 손더스라는 여성은 그 동반자였고, 그들은 1968년 여름에 결혼할 계획이었다.
앨버트 데커는 70여 편의 영화와 30여 편의 TV 드라마에 출연했을 정도로 부지런한 배우였다.
큰 문제 없어 보였다. 외부에서 침입한 흔적도 없었다. 하지만 화장실 문이 열리지 않았다. 안에서 체인 도어락을 걸어 놓았기 때문이었다. 결국 문을 부수고 들어갔을 때, 손더스와 관리인은 평생 잊지 못할 광경을 목격했다. 앨버트 데커는 벌거벗은 채 욕조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다. 목은 올가미로 죄어진 상태. 샤워실의 커튼 거는 막대기에 올가미는 묶여 있었다. 현장에 가장 먼저 도착했던 수사관 대니얼 K 스튜어트에 의하면, 매우 복잡한 매듭으로 만들어진 올가미였다. 사체의 양손엔 수갑이 채워져 있었고, 팔엔 피하주사기가 꽂혀 있었다. 데커의 온몸은 붉은 립스틱으로 쓴 온갖 음란한 단어들로 뒤덮인 상태였고, 입엔 재갈이 물려 있었으며, 눈은 천으로 가린 상태였다. 경찰은 데커의 옷장에서 여자 옷과 채찍과 체인을 발견했고, 돈과 카메라 등을 도난당한 사실을 알게 되었다.
경찰은 데커가 목매달아 자살했다고 생각했지만, 검시관이었던 허버트 맥로이는 “나는 데커가 자살했다는 그 어떤 증거도 얻지 못했다. 이 사건은 사고사로 봐야 한다”고 말해 데커의 죽음을 미궁으로 빠트렸다. 도난당한 물건이 있기에 강도에 의해 살해되었다는 의견도 제시되었지만, 외부 침입 흔적이 없을뿐더러 강도가 살해 후 이토록 기괴한 장면을 연출할 이유가 없다는 의견이 더 설득력 있었다. 자살도 타살도 아닌 죽음. 시간이 지난 후 조심스레 그가 ‘오토에로틱 애스픽시아’(autoerotic asphyxia), 즉 ‘자위 질식’을 즐긴 건 아니냐는 주장이 나왔다. 이것은 자위를 할 때 뇌에 산소 공급을 줄여 성적 쾌감을 높이는 것으로, 그런 이유로 그가 목에 올가미를 걸어 스스로를 조금씩 질식 상태로 몰고 갔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누군가의 도움을 받지 않은 상태에서(화장실 문은 안에서 체인 도어락으로 잠겨 있었다) 수갑을 차고, 올가미를 걸어 묶고, 몸에 바늘을 꽂고, 입에 재갈을 물고, 온몸에 글씨를 쓰는 게 가능할까? 결국 그의 죽음은 미스터리로 남아 있으며, 아마도 영원히 그 진실을 알 수 없을 듯하다.
김형석 영화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