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심재륜 변호사 | ||
“고검장님, 변호사로 개업하시더니 변하신 겁니까. 왜 범죄자를 두둔하고 그러십니까. (주)부영이 불법 대선자금을 줬다는 단서를 우리는 갖고 있습니다. 부영 이중근 회장을 구속수감한 뒤 본격적으로 불법자금 제공 여부를 캘 것입니다.”
17대 총선을 앞두고 막바지 불법 대선자금 수사가 한창이던 지난달 초. 대검찰청 중앙수사부 10층 남기춘 중수1과장실에서는 고성이 오갔다. 중견 건설업체 부영의 변호인으로 선임된 부산고검장 출신의 심재륜 변호사와 남 과장 사이에서 설전이 오간 것이다.
둘 사이의 언성은 계속 높아졌다.
심 변호사는 가정 형편이 어려운 학생들을 위해 전국의 중·고등학교에 기숙사나 강당·도서관을 지어주는 등 10여년 동안 사회사업을 해온 점을 들며 이 회장을 적극 변호했다.
그러나 남 과장은 이 회장의 사회사업에 대한 평가를 백팔십도 달리했다. 겉으로는 사회사업을 하면서 안에서는 횡령, 탈세 등 비리를 저지른 인물이라는 것이다.
관점이 완전히 달랐다. 두 사람은 결국 견해차를 좁히지 못하고 평행선만 달리다 헤어졌다. 두 사람의 가슴 속에는 생채기가 났을 듯싶다.
그날 심 변호사는 지인들과 폭탄주를 마신 것으로 알려졌다. 심 변호사는 술을 마시면서도 “남 과장이 어떻게 나한테 그럴 수 있느냐”면서 분을 삭이지 못했다고 한다. 이 회장에 대한 변호가 제대로 먹혀들지 않아서라기보다는 남 과장에 대한 인간적인 서운함이 더 배어 있었다는 것이 심 변호사 주변 인사들의 전언이다. 이번 일로 심 변호사와 남 과장은 완전히 틀어져 다시는 만나지 않을 것이라고 전망하는 사람들이 많다. 사실상의 절연(絶緣)인 셈이다.
지난 89년 서울지검 특수1부와 강력부 검사들이 주축이 된 이른바 ‘심재륜 사단’의 막내격인 남 과장과 심 변호사를 단순히 검찰 선후배로 설명하기에는 부족하다. 남 과장이 이번 불법 대선자금 수사에서 보여줬던 타협할 줄 모르는 ‘독기’는 사실 89년 서울지검 강력부 말석검사로 재직할 때 당시 부장검사였던 심 변호사에게 전수받은 것이나 다름없다. 심 변호사도 남 과장의 타고난 오기와 근성을 매우 높이 샀다고 한다.
▲ 이중근 부영 회장 | ||
99년 1월27일 오후 대구고검장이었던 심 변호사가 대검 기자실을 찾아와 검찰 수뇌부의 퇴진을 요구한 항명파동 때 대구고검 검사였던 남 과장은 심 변호사를 따라 서울로 올라왔다. 자칫하면 징계나 인사상 불이익을 받을 수 있었지만 남 과장은 과감히 서울행을 택했다. 이때 일로 남 과장은 다음날인 1월28일 대검 감찰부에서 조사를 받기도 했다.
심 변호사가 남 과장에 대해 배신감(?)을 느낀 것은 부영 사건과 관련해 자신의 말을 듣지 않았기 때문은 아니라고 법조계 인사들은 평가하고 있다.
대검 중수부가 지난 1월 말 부영에 대해 압수수색을 한 뒤 두 달이 넘도록 불법 자금 제공에 대한 진술을 확보하지 못했다면 확실한 단서나 첩보가 추가로 나올 때까지는 수사를 접는 것이 원칙이라고 심 변호사는 생각한 것으로 보인다. 때문에 심 변호사 입장에서는 남 과장이 이중근 회장으로부터 의미있는 진술을 이끌어내지 못하자 탈세 및 횡령 등 개인 비리로 신병을 일단 구속한 뒤 ‘무조건 불어’식의 수사를 한다고 오해를 한 것으로 주변에서는 해석한다.
하지만 남 과장은 불법 대선자금 제공 사실을 순순히 시인할 정치인은 없는 만큼 시간을 갖고 계좌추적과 채권추적을 하다보면 확실한 물증을 찾을 수 있을 것으로 확신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심 변호사가 ‘수사의 정도’를 운운하자 남 과장도 기분이 상했던 것이다.
남 과장의 심기를 불편하게 한 데는 이중근 회장의 진술 태도도 영향을 미친 것으로 알려졌다.
이 회장에 대한 수사 일화 한 가지. 남 과장은 이 회장이 현금 대신 채권으로 각종 로비를 하거나 불법 정치자금을 줬을 것으로 보고 이 회장이 사고판 채권을 추적해나갔다. 그 결과 이 회장이 사간 채권 중 일부를 봉태열 전 서울지방국세청장이 현금화한 것을 확인했다.
▲ 남기춘 중수1과장 | ||
문제는 봉 전 청장은 뇌물을 받은 사실을 시인했는데도 뇌물을 준 이중근 회장은 혐의 사실을 부인했다는 데 있다. 남 과장은 이 회장의 ‘모르쇠 작전’에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이 회장은 지난달 8일 구속수감되기 전이나 후에도 전혀 입을 열고 있지 않다. 남 과장 입장에서는 이 회장이 수사에는 전혀 협조하지 않으면서 자신과 인간적으로 친한 변호사를 통해 수사를 적당히 무마하려고 한다고 오해할 수 있는 대목이다.
물론 심 변호사와 남 과장이 틀어진 결정적인 계기는 부영 사건이지만 그 이전에도 불법 대선자금을 제공한 삼성의 기업인 처리를 놓고도 마찰을 빚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심 변호사는 삼성측의 변호인 가운데 한 명이고 남 과장은 삼성과 부영의 주임검사였던 것이다. 때문에 심 변호사는 부영 사건 이전에도 삼성 수사를 놓고도 부딪힐 수밖에 없었던 상황.
심 변호사는 삼성이 갖는 상징성을 감안, 관련자들의 선처를 언급했다. 하지만 남 과장은 삼성의 경우는 불법 대선자금 제공 액수가 3백억원이 넘는 등 죄질이 불량해 강도 높게 처리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틈이 벌어지기 시작한 것으로 전해졌다.
불법 대선자금 수사는 사실상 이번주로 끝난다. 남 과장은 지난해 말부터 노무현 대통령 측근비리 수사를 통해 측근들의 불법자금 수수 비리를 철저히 파헤졌다. 국내 ‘대표기업’인 삼성의 상상을 초월하는 대선자금도 샅샅히 밝혀내는 엄청난 성과를 거뒀다.
호사다마(好事多魔)라고나 할까. 남 과장은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대선자금 수사를 마무리했지만 15년이 넘도록 모신 ‘스승’을 잃게 됐다.
이진기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