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뱅크이미지
이선실이 월북하게 된 결정적 계기는 그의 이복동생 이창하의 죽음 때문이다. 이창하는 1948년 제주에서 발발한 4·3 사건으로 억울한 죽음을 당한다. 사건 직후 정부에 환멸을 느낀 이선실은 남로당에 가입했고, 부산 등지에서 여맹(북한 최대의 여성조직) 활동을 이어갔다. 그리고 상황이 여의치 않자, 한국전쟁 발발 직전 자신의 남편과 양녀를 남겨두고 월북한다.
월북 후 그는 사상 학습기관인 ‘금강학원’에서 수학했고, 당 경공업위원회 과장, 평양 여맹 부위원장 등 요직을 거치며 능력을 인정받았다. 하지만 항상 아쉬움을 느꼈다. 그가 일반 당직에서 벗어나 간첩이 되고자 했던 것은 순전히 본인의 의도였다. 1963년 김일성에게 직접 ‘공작원이 되고 싶다’는 탄원서를 제출해 간첩이 됐던 것이다. 북한의 공작원 양성소로 유명한 ‘695 정치대학’을 거친 이선실은 1966년 부산으로 파견돼 1973년까지 현지 공작원으로 활동했다. 7년간 기초적인 공작활동을 통해 능력을 인정받은 이선실은 북으로부터 새로운 지령을 받는다. 신분 세탁 후 본격적으로 남한 내 지하당 조직을 꾀하는 것.
이선실은 북에서 자신과 비슷한 또래인 북송 재일교포 신순녀를 만난다. 이선실은 신순녀로부터 모든 기억을 전달받고, ‘완벽한 신순녀’로 다시 태어난다. 1974년 도일한 이선실은 실제 신순녀의 가족을 찾아가 자신이 진짜 신순녀임을 연기한다. 그의 탁월한 연기 덕에 가족들은 감쪽같이 속았다. 이선실은 일본서 현지 가족들의 보증을 받아 신순녀의 이름으로 일본의 국민등록증을 받아내고야 만다. 물론 현지에서도 이선실은 꾸준히 사람들과 접촉, 포섭해 북으로 보내는 활동을 꾀했다.
이선실은 1978년, 신순녀라는 재일교포 신분으로 다시 한국에 들어온다. 그리고 전북 전주에 기거하는 또 다른 신순녀 가족(신순녀의 언니 신양근)을 찾아가 다시금 연기에 돌입한다. 여기서도 가족들은 이선실을 철석같이 신순녀로 믿게 된다. 그리고 이선실은 일본서 만든 재일교포 국민증을 토대로 한국에 주민등록을 한다. 1980년의 일이다. 북한과 일본을 오가며 두 차례에 걸쳐 신분을 세탁해 완벽한 대한민국 국민으로 태어난 셈이다.
이후 10년간 활동이 익히 알려진 중부지역당 사건이다. 당시 벌써 70대에 접어든 이선실은 서울 대방동에 아지트를 마련하고 황인오, 손병선 등을 포섭해 자금을 지원해가며 지하조직 확장을 꾀했으며 민중당을 통해 정계 진입을 시도했다. 민중당 행사에 관여했던 이선실은 이때 본인의 분신인 ‘신순녀’와 북에서 쓰던 ‘이선실’이란 이름 대신 자신의 본명을 앞뒤로 바꾼 ‘이선화’라는 이름을 사용했다. 그리고 그는 앞서의 포섭한 인물들에 뒤를 맡기고 1990년 10월 17일경 강화도 루트를 통해 북에 넘어가며 공작원으로서의 30년 활동을 화려하게 마무리했다.
국가안전기획부(현 국가정보원)는 이선실이 북으로 영구 복귀하고 2년이 지난 1992년에서야 그의 존재를 파악했다. 앞선 포섭자들의 중부지역당 사건을 수사하면서다. 당시 사건은 평민당 대선후보였던 김대중 전 대통령의 비서가 관여했다는 의혹을 제기하면서 김 전 대통령 낙선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사건이야 어찌됐건 1990년 북에 복귀한 이선실은 ‘영웅’이었다. 이선실은 북에 복귀 직후 자신의 30년 공작원 세월을 뒤돌아 봤는지 평양 김일성 동상 앞에 서서 한동안 깊은 눈물을 흘렸다는 후문이다.
그는 권력자이기도 했다. 당시 안기부에서 파악한 바에 따르면 이선실은 당 권력 22순위에 해당했으며, 당 정치국 후보위원인 것으로 확인됐다. 남한에서 활동하는 남파간첩을 총 지휘하는 이른 바 ‘거물급 간첩’이었던 셈. 이 때문에 그가 KAL기 폭파사고 당시 관여했다는 의혹도 있었다.
여기까지 이선실의 삶은 분명 본인 입장에서 만큼은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듯싶었다. 이후의 삶은 베일에 가려져 있었다. 그런데 최근 대북학술기관 NK지식인연대에 따르면 그의 말로가 결코 평탄하지 못했다. 박건하 NK지식인연대 사무국장은 “이선실 역시 심화조 사건 당시 채문덕의 광풍을 피할 수 없었다”고 말했다. 이선실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이선실은 북으로 복귀 후, 통일전선부 대남연락소에 근무하며 공작원 양성에 나섰다. 자신의 공작원 생활 30년 노하우와 특기를 십분 살린 셈이다.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런데 그는 돌연 자신의 전공과는 거리가 먼 당 경공업부로 배치된다. 최소한 이선실에게 있어선 좌천성 인사였다. 경공업부 책임자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여동생 김경희였다. 이선실의 불행은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김정일과 여동생 김경희. 이선실은 경공업부로 좌천된 후 당시 경공업부 책임자인 김경희의 눈 밖에 나 심화조 사건 때 고문 중 숨졌다는 후문이다. 연합뉴스
하지만 이러한 그의 행보는 김경희를 비롯한 지도부의 눈에는 곱게 받아들여질 리 만무했다. 때마침 북한에 ‘심화조 사건’이 터졌다. 심화조 사건이란 1996~1999년 사이 발생한 사상 검증 대학살 사건이다. 중국의 온건파 당 지도부 인사가 학살당한 ‘문화 혁명’에 비견된다.
심화조 사건은 단순한 사상검증 사건이 아니었다. 해당 기간 동안 당의 본류에 벗어난다는 명목으로 당 인사 2만 5000명이 제거된 사상 초유의 사건이다. 이는 김일성 사후 김정일로 권력이 이양되는 혼란기, 공포를 통해 권력을 안정시킬 목적으로 기획됐다. 주동자는 공교롭게도 김정은 권력이양 시기 죽음을 당한 장성택 당시 당 부부장. 장성택은 자신의 최측근 채문덕 사회안전성 정치국장을 앞세워 이러한 광란의 살육을 자행했다. 게다가 당시 ‘심화조’를 만들어 무소불위의 권력을 갖게 된 채문덕은 본인의 ‘업’에 취했다. 본분(?)을 넘어 자신의 개인적 원한까지 잣대로 내세워 학살에 앞장섰다.
앞서 박건하 사무국장이 말했듯, 개혁 성향이 강했던 이선실 역시 이러한 광풍에 휘말렸다는 것. 앞서 단체의 소식통에 따르면 이선실은 심화조 사건 말미였던 1999년 ‘간첩’ 혐의로 체포됐다.
‘미제의 간첩으로 남한의 지하조직을 파괴하고 내부(북한)를 와해시키기 위한 임무를 띠고 침투된 자.’
완벽한 아이러니였다. 일평생 공화국을 위해 남한의 지하조직을 공고히 한 공으로 영웅이 된 그의 혐의 치고는 퍽 놀라웠다. 이선실은 당시 여든을 훌쩍 넘긴 노파였다. 처형이 아닌 고문 중 사망했다는 후문이다.
그의 입장에선 불행 중 다행일까. 이선실이 죽은 후 1년 뒤, 도를 넘은 살육에 앞장선 채문덕이 체포됐다. 아무런 구분 없이 본인의 원한을 내세워 혁명 열사들까지 처형했다는 죄목이었다. 채문덕은 2000년 7월 사형을 당했고, 이선실은 다시금 복권돼 ‘애국열사릉’에 안치됐다.
한병관 기자 wlimodu@ilyo.co.kr
70대 노파가 어떻게 최고 간첩이 됐을까 그의 무기는 비주얼 아닌 연기력 이선실은 북한은 물론 남한에서도 ‘가장 완벽한 공작원’으로 회자된다. 혹자는 그를 두고 20세기 세계 첩보사에 길이 남을 만한 인물로 평가하기도 한다. 김정일은 이선실 사후 그를 두고 ‘적후를 수없이 드나들면서도 단 한 번의 실수도 없이 맡겨진 임무를 훌륭히 수행해 낸 혁명의 동지’로 추앙했다. 그런 이선실의 가장 큰 무기는 미모가 아닌 마음에 있었다. 이는 ‘연기력’으로 포장한 인공적인 힘이었지만, 30년 공작원 생활 속에서 가장 큰 밑바탕이 됐다. ‘신순녀’로 분한 이선실이 아무리 신순녀의 옛 기억들을 학습했을지라도 ‘친화력’이 없었다면 일본과 한국의 친척들이 혹해 넘어가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신순녀의 일부 친척들은 이선실이 북에 넘어가고 한참 후에도 ‘절대 이모(이선실)가 간첩일 리는 없다’고 주장했다는 후문. 게다가 의심의 눈초리를 피하기 위해 주변에 형편이 안 좋은 일반인들을 ‘아지트’로 들여와 취식을 제공하고, 주말이면 인근 교회에 나가 신자들과 깊은 교류를 나눴다. 그는 언제나 마음씨 좋고, 정겨운 할머니였다. 심지어 자신의 수하에 있는 남파간첩들도 이선실을 두고 ‘할머니’라고 불렀을 정도. 여기에 공화국과 당에 대한 충심, 이에 반하는 개인의 사사로운 감정 따위는 무섭도록 제쳐뒀다. 1950년 월북 후 약 20년 뒤 남한에 남겨진 남편과 수양딸이 일본을 통해 입북했지만, 이선실은 한사코 만남을 거절했다고 한다. 또 남한에서 공작활동을 한 기간에도 90세가 넘도록 장수한 어머니와 단 한 번도 만나지 않았다. 본업에 있어선 그만큼 냉정했다. [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