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천정배 원내대표를 비롯한 당권파가 문희상 의원에 대해 정면으로 각을 세우고 나섰다. | ||
열린우리당 지도부의 양 축이었던 정동영 전 의장과 김근태 전 원내대표 간의 신경전이 차기 대권을 향한 포석이었다면 현 당 지도부와 문희상 의원 간의 갈등 국면은 정동영·김근태가 물러난 열린우리당의 향후 주도권 다툼 양상으로 해석되고 있다. 상대 견제를 위한 각자 세력화까지 시도하고 있는 당 지도부와 문 의원 간의 대결 국면은 이제 시작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라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당 지도부와 문희상 의원 간의 갈등구도는 일부 소장파가 문 의원에 대한 비판을 하고 나서면서 시작됐다. 안영근 의원을 비롯한 일부 소장파 의원들이 청와대의 김혁규 전 지사 총리 지명 강행 움직임과 관련해 “당의장이나 원내대표가 대통령과 직접 대화할 수 있는 채널이 마련돼야 한다”라며 대통령 정치특보였던 문 의원의 역할에 대해 문제제기를 한 것이다.
그러나 다수 의원들은 이 같은 문 의원 역할에 대한 논란에 대해 ‘심각하게 거론된 사안이 아니다’는 반응을 보였다. 김현미 대변인은 “전체 소장파 의견이 아닌 일부 소장파 의원들의 언론플레이”라 일축했다. 이어서 대통령 정치특보였던 문 의원이 “대통령 고유 인사권에 대한 논란은 본질적인 선을 넘어서는 안되며 ‘김혁규 총리’ 문제는 여당 지도부의 시험대”라며 조기 전당대회 개최 가능성까지 들고 나오자 김 전 지사 총리 지명과 문 의원 역할론에 대한 논란이 어느 정도 수그러드는 듯했다.
그러나 당 지도부의 한 축인 천정배 원내대표가 문 의원을 향해 포문을 열면서 갈등의 불씨가 재점화됐다.
천 대표가 지난 2일 기자들과 만나 문 의원 역할에 대해 ‘당과 청와대 간의 연락 창구만 하면 된다’는 식의 발언을 한 것이다. 이날 천 대표는 문 의원이 거론했던 민주당과의 통합론에 대해서도 “지금 거론할 시기가 전혀 아니다”고 못박으며 불쾌감을 드러내기도 했다. 같은 날 신 의장도 기자들과 만나 “당·청 관계에서 당의 위상을 확고히 해달라는 당내 의견들을 남김없이 청와대에 전달하겠다”며 천 대표를 지원사격했다.
이처럼 당 지도부가 문 의원에 대해 정면으로 각을 세우고 나선 배경으로 일부 의원들은 ‘신임 당 지도부의 위상 다지기 포석’이란 해석을 내놓고 있다. 신 의장이나 천 대표가 직전 지도부인 정동영 전 의장이나 김근태 전 원내대표만큼 당을 장악하지 못하고 있는 것을 타개할 한 방편으로 문 의원에 대한 ‘정면대응론’이 불거져 나왔다는 해석이다.
신기남 의장과 천정배 대표 등과 함께 민주당 시절부터 행보를 같이 해온 한 3선의원은 “정동영 전 의장이나 김근태 전 대표는 일찍부터 당내 대권주자로 인정받았으며 당이 두 사람을 지지하는 세력으로 양분 양상까지 보일 정도였다. 청와대도 두 사람에게 입각을 적극 권유하는 등 각별한 신경을 썼다.
그러나 원내 과반을 차지한 실세 여당이 된 후 취임한 신 의장과 천 대표는 정 전 의장이나 김 전 대표에 비해 당내 장악력이나 청와대의 대우가 못 미치는 것이 사실”이라 밝혔다. 이 의원은 “전당대회 없이 의장직을 승계한 신 의장이 의장 취임 이후 청와대를 방문했을 때 노무현 대통령이 ‘축하합니다’란 인사성 멘트 외에 별다른 말을 전해주지 않은 것에 대해 서운해했다”라며 “과거 ‘정보 권력을 독점한다’라며 청와대 참모진을 강력 비난했던 천 대표에게도 청와대 참모진들이 과거 정 전 의장이나 김 전 대표에게 했던 것 같은 예우를 해주지 않는다고 한다”고 덧붙였다.
▲ 문희상 의원은 ‘정치특보직’ 폐지에 대해 “대통령이 날 해방시켰다”고 너스레. | ||
문 의원 역할에 대한 논란이 거세지자 결국 노 대통령은 지난 4일 ‘정치특보제’를 폐지했다. 공식적으로 당·청 가교역할을 했던 문 의원의 ‘정치특보’ 직함이 사라진 것이다.
당 지도부와의 갈등국면으로 비화될 조짐이 보이자 지난 3일 문 의원은 천 대표에 대해 ‘만날 용의’가 있음을 밝혔고 천 대표도 환영 의사를 나타냈다.
그러나 당내 인사들은 천 대표에 의해 크게 발전한 ‘정치특보 역할 논란’이 결국 정치특보제 폐지로 이어지면서 천 대표와 문 의원 간에 ‘정동영-김근태’ 관계에 못지 않은 갈등 구도가 형성될 것이란 전망을 하고 있다.
일단 정치특보제 폐지로 인해 외형적으로 당권파와 기싸움에서 밀린 문 의원측이 순순히 물러날 것으로 보는 시각은 거의 없다. 문 의원에 대한 노 대통령의 신임이 여전하고 현 당 지도부가 이전만큼 당을 장악하지 못하고 있는 만큼 당내 주요 의사 결정과정에 적극 관여하는 식으로 목소리를 높일 것이란 전망이다. 열린우리당의 한 중진의원은 “정치특보 직함이 없더라도 노 대통령이 계속 신임한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문 의원의 정치적 위상에는 변함이 없다고 볼 수 있다. 문 의원은 정치권 내 마당발로 불릴 정도로 타 정파와도 우호적 관계를 맺고 있다. 한나라당 김덕룡 원내대표와도 친분이 있다. 야당과의 정무적 역할에서도 천 대표의 활동보다 문 의원의 물밑 활동 비중이 더 커질 수도 있다”고 전망했다.
열린우리당의 한 재선의원은 “이미 ‘천·신·정’ 계보가 주류로 자리잡은 현 당내구도에서 문 의원 역시 자신의 입지를 강화시켜줄 친위부대가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이 의원은 속칭 ‘직계모임’이라 일컬어지는 ‘노무현 정부 1기 관료 출신 모임’에 대해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이 모임은 지난달 20일 문희상 의원과 경제부총리 출신 김진표 의원을 중심으로 노무현 정부 초기에 장·차관을 지냈거나 청와대 참모진을 지낸 인사들 중심으로 짜여져 있다. 이 모임 간사격인 청와대 행정관 출신 백원우 의원은 “정치적 결사체로 보지 말아달라”라 밝혔지만 문 의원을 비롯해 노 대통령이 각별히 신뢰하는 동시에 중량감 있는 인사들로 구성돼 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는 지적이다.
‘직계모임’에는 환경부 장관 출신 한명숙 의원이 적극 참여할 예정이며 청와대 정무비서관 출신 서갑원 의원, 청와대 인사비서관 출신 권선택 의원, 정통부 차관 출신 변재일 의원, 건설교통부 차관 출신 강길부 의원 등도 몇 번 회동을 통해 뜻을 같이한 것으로 알려진다.
정세분석에 밝은 열린우리당의 한 재선 의원은 “지난해 말 천 대표가 청와대 일부 참모진들에 대해 ‘정보와 권력을 독점하는 세력’이라 비판하면서 노무현 정부 1기 청와대 참모진들과 천 대표는 행보를 같이 할 수 없는 사이가 됐다”고 밝혔다. 이 의원은 “노무현 정부 1기 장·차관 출신들과 청와대 참모진 출신들은 최근에도 모임을 갖는 등 각별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주요 당내 결정과정에서 앞으로 신 의장과 천 대표 중심의 당 지도부와 문 의원 중심의 청와대 출신들 간의 암투가 벌어지게 될 것”이라 전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