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아시안게임 야구 대표팀을 지휘하는 류중일 감독. 박은숙 기자 espark@ilyo.co.kr
#선수 선발도 ‘전쟁’
국가대표 야구선수를 선정하는 기준은 당연히 ‘실력’이다. 국민의 금빛 기대를 저버리고 싶은 감독은 세상에 아무도 없다. 최고의 전력을 이끌고 전장에 나서는 게 국가대표 감독의 권리이자 의무다. 그러나 아시안게임 대표팀을 구성할 때는 실력 외에도 비중 있게 고려할 수밖에 없는 부분이 있다. 인천아시안게임 대표선수 선발에 관여했던 한 야구 관계자는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과 달리 아시안게임은 병역 필자와 미필자의 안배가 중요하게 여겨진다. 더 이상 올림픽에서 야구가 정식 종목이 아닌 탓에, 프로야구 주요 선수들이 군 대체복무 혜택을 받을 기회가 아시안게임밖에 없기 때문”이라며 “두 선수가 엇비슷한 기량을 가졌을 때 어느 쪽을 선택하느냐를 결정하는 게 무척 어렵다. 포지션 분배는 물론 각 구단의 입장도 무의식중에 염두에 두게 된다”고 했다.
대표팀 투수 안지만이 막바지 훈련을 하고 있는 모습. 사진제공=삼성 라이온즈
국가대표급 실력을 인정받은 군 미필 선수들은 이 몇 자리를 놓고 치열하게 경쟁한다. 그럴 수밖에 없다. 프로야구 선수들에게 20대 시절의 군복무 2년은 엄청난 몸값과 시간의 희생을 필요로 한다. 무엇보다 구단도 이들을 잡아 두고 싶어 한다. 대표팀에 뽑힐 만한 선수라면 팀에서는 당연히 10년 주전감이다. 선수층이 두꺼운 팀이 아니라면, 주전 선수의 2년의 공백은 뼈아프다. 한 지방구단 관계자는 “국가대표팀을 실력대로 뽑아야 한다는 데에는 동의하지만, 특정팀에서 유독 군 미필 선수가 많이 선발되고 반대로 우리 팀에서 중요한 미필 선수가 제외되면 내심 섭섭한 게 사실”이라고 토로했다.
특히 이번 대회는 경쟁이 더 치열했다. 앞으로 아시안게임에서도 야구가 정식 종목에서 제외될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이 커지고 있어서다. 게다가 다음 아시안게임은 4년이 아닌 5년 후에 열린다. 축구 최대의 축제인 월드컵과 같은 해에 열리는 것을 피하기 위해 조직위원회에서 개최년도를 변경하기로 결정했다. 태극마크의 꿈은 3년 후 WBC에서도 도전할 수 있지만, 병역 대체복무 혜택도 얻고 싶은 군 미필 선수들에게 5년은 너무 긴 시간이다.
2010년 열린 광저우아시안게임에서 한국 야구 대표팀이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당연히 에피소드도 많았다. A 선수는 삼성과의 경기 때 대표팀 사령탑인 류중일 감독을 찾아가 그라운드에서 갑자기 큰절을 했다. 그 모습을 본 같은 팀의 B 선수도 얼른 달려와 함께 넙죽 엎드렸다. 당연히 더그아웃에는 폭소가 터졌다. 주전 선수 한 명을 꼭 아시안게임에 보내고 싶었던 C 감독은 A 선수와 B 선수의 얘기를 전해들은 뒤 “그렇다면 우리는 내가 직접 가서 절을 하겠다”는 농담을 던지기도 했다. 평소 활발한 성격의 D 선수는 취재진에게 끊임없이 “여러모로 내가 대표팀에 뽑히는 게 유리하다”며 ‘셀프 홍보’를 했고, 숫기가 별로 없는 E 선수도 엔트리 확정 날짜가 다가오자 “아무래도 어제 꾼 꿈이 심상치 않다”며 조심스럽게 기대를 표현했다. 올해 깜짝 스타가 된 투수 F가 최종 엔트리 발표 전 마지막 등판에서 극도의 긴장감과 스트레스로 인해 코피를 흘린 일화도 빼놓을 수 없다.
#금메달이 ‘본전’이라고? 1등은 늘 어렵다
아시안게임은 19일 막을 올렸다. 이제 ‘류중일 호’도 목표를 향해 본격적으로 달려가고 있다. 국제대회에 나서는 모든 대표팀 감독들이 성적에 대한 부담을 안기 마련이지만, 유독 아시안게임에 대한 압박감은 더 크다. 금메달이 본전으로 여겨져서다. 심지어 은메달이나 동메달을 따면 ‘참사’, 혹은 ‘굴욕’이라는 평가를 들어야 한다. 2010광저우아시안게임 야구대표팀을 이끌었던 조범현 감독은 대회 전 “다들 ‘야구 금메달은 떼어 놓은 당상’이라고 여기니 혹시라도 국민들을 실망시킬까봐 더 걱정스러운 마음이 생긴다”고 토로하기도 했다. 물론 광저우 대회 대표팀은 예상대로 금메달을 목에 걸고 돌아왔다. 메이저리거 추신수와 대한민국 에이스 류현진이 포진한 역대 최정상급 대표팀을 출전시킨 덕분이다.
그렇다고 방심할 수는 없다. 한 야구 관계자는 “우리가 전력에서 한 수 위인데도 이상하게 국제대회에서 대만을 만나면 경기가 꼬이는 일이 많았다. 2002부산아시안게임 결승전에서도 1점차로 간신히 이겼고, 중요할 때 발목을 잡히는 일도 부지기수였다”고 증언했다. 무엇보다 대만이든 일본이든 한국전에는 무조건 팀 내 최고의 투수를 내보낸다. 한국 야구의 아시안게임 역사에 트라우마로 남아 있는 2006 도하아시안게임이 그랬다. 대만은 한국전에 당시 메이저리그와 일본 프로야구에서 활약하던 자국 에이스 두 명을 모두 투입했다. 당연히 타자들이 치기 어려웠다. 대만에 지고 흐름이 꼬이기 시작하자, 이번엔 일본전에서 당대 최고의 투수 류현진과 오승환이 뭔가에 홀린 듯 속절없이 무너졌다. 시즌이 종료된 후 치른 대회라, 한국에서 포스트시즌까지 마치고 온 두 선수는 이미 많이 지쳐 있었다. 류중일 감독을 필두로 한 코칭스태프와 선수단 전체가 긴장을 놓지 않고 고삐를 조이는 이유다.
배영은 스포츠동아 기자 yeb@donga.com
최초 국가대표 야구팀 비화 첫 원정서 야구보다 ‘서양 문물’에 진땀 뺐다 태극마크는 종목을 불문한 모든 운동선수들에게 영광의 상징이다. 특히 일제 강점기와 한국전쟁의 고난을 이겨내야 했던 세대들은 유니폼 가슴에 박힌 태극기를 바라보며 다시 일어나 달릴 수 있는 힘을 얻곤 했다. 제1회 아시아야구 선수권 대회에 참가한 박현식(왼쪽)과 장태영. 100여 년 역사를 자랑하는 한국 야구도 정확히 60년 전인 1954년에 처음으로 사상 최초의 국가대표팀을 꾸리면서 기지개를 켰다. 필리핀 마닐라에서 열린 제1회 아시아야구선수권대회가 역사적인 첫 무대였다. 그해 5월 14일 마닐라에서 아시아야구연맹이 결성됐고, 초대 회원은 한국·일본·필리핀·자유중국(현재의 대만)의 4개국이었다. 한국은 당시 이홍직 대한야구협회장과 이영민 부회장을 대표로 마닐라에 보내 연맹에 가입하게 했다(이 부회장이 바로 현재 고교야구 최고의 타자에게 주어지는 ‘이영민 타격상’의 원조다). 아시아야구연맹은 창립 기념으로 12월 18일부터 23일까지 첫 대회를 개최하기로 합의했다. 고심 끝에 선정한 첫 대표팀은 코칭스태프 2명과 선수 18명으로 구성됐다. 김영석 감독과 오윤환 코치가 팀을 이끌고, 유완식 박현식 김양중 서동준까지 단 4명이 투수로 뽑혔다. 포수 두 자리는 장석화와 김영조가 맡았다. 또 내야수는 김정환 심양섭 박상규 김계현 이기역 강대중 이덕영 등 7명, 외야수는 노정호 허곤 장태영 홍병창 정관칠 등 5명으로 이뤄졌다. 한 야구인은 “투수의 수가 좀 적긴 했지만, 사실 당시 야구 특성상 대부분의 선수가 투수와 야수를 겸업했다. 편의상 주 포지션을 구분해 명단을 제출했을 뿐”이라고 설명했다. 국가대표 선수들이 가장 먼저 찾아간 곳은 바로 이영민 부회장의 묘소였다. 당시 국가대표 투수였던 야구 원로 김양중 씨는 “이영민 선배는 일제시대에 ‘조선의 4번타자’이자 ‘조선의 에이스’로 불렸고, 조선 선수로는 유일하게 일본 대표팀에 뽑힌 분이었다”며 “우리나라 야구발전을 위해 헌신하다가 하필 그해 8월에 돌아가셨다”고 회상했다. 이어 “이승만 대통령이 대표팀을 초대했지만, 우리는 첫 해외 원정을 앞두고 이영민 선배에게 먼저 인사를 드리고 싶었다. 다들 이영민 선배 묘소 앞에서 술을 한 잔 따르고 출정식을 한 뒤 대통령을 예방했다”고 털어 놓았다. 한국에서 필리핀으로 가는 비행기는 운항되지 않던 시절이다. 정부에서는 대한민국 최초 야구대표팀의 해외 원정을 위해 공군 수송기를 내줬다. 여의도 비행장에서 탑승해 홍콩으로 향한 뒤, 비행기를 갈아타고 필리핀으로 날아갔다. 물론 우여곡절도 많았다. 12월의 한국은 영하 10도, 필리핀은 40도였다. 냉방이 안 되는 찜통 비행기 안에서 땀 때문에 옷의 염색료가 번져 단복이 엉망이 됐고, 결국 홍콩에서 부랴부랴 반팔 티셔츠를 단체로 구입해야 했다. 숙소에서 제공하는 식사는 온통 입맛에 맞지 않는 양식 일색. 밥도 제대로 먹지 못했다. 김양중 씨는 “엘리베이터와 침대 모두 처음 사용해봤고, 무엇보다 호텔에 있는 양변기에 적응을 못해 화장실 문제로 고생들을 많이 했다”며 “불 켜놓고 하는 야간경기도 다들 처음 해보니 우왕좌왕했다”고 회상했다. 그래도 한국은 선전했다. 일본에 0-6, 필리핀에 4-5로 각각 패했지만, 자유중국에 4-2로 승리하면서 야구 국가대표 사상 첫 승리를 일궜다. 당시 우승팀은 3전 전승의 필리핀. 2승 1패의 일본이 2위, 한국이 3위였다. 자유중국은 3전 전패로 최하위가 됐다. 김양중 씨는 “세월이 많이 흘러 당시 출전했던 선수 대부분이 세상을 떠났지만, 그래도 ‘국가대표’였다는 사실은 여전히 가슴에 큰 자랑으로 남아있다”며 “야구가 아니라면 언제 또 국가를 대표해 보겠나. 요즘 선수들도 자긍심을 가져줬으면 좋겠다”고 했다. [은] |
한국 야구 드림팀 원조는? 98년 전원 ‘군 미필’…그래도 최강전력 2006년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 대표팀은 한국 야구 역사에서 가장 화려했던 국가대표 군단으로 꼽힌다. 해외파와 국내파를 총망라해 이름값과 실력 모두 최고를 자랑하는 선수들을 불러 모았다. 이 엄청난 대표팀의 모태가 바로 1998년 방콕아시안게임에 출전했던 제1호 ‘드림팀’이다. 프로야구 선수의 아시안게임 출전이 허용됐던 첫 대회. 1998년 아시안게임 대표팀(위)과 2006년 WBC 대표팀. 결과 역시 기대에 부응했다. 인하대 주성로 감독이 이끌던 대표팀은 A조 1차리그에서 대만을 16-5, 일본을 13-8로 각각 꺾고 2승을 먼저 올렸다. 2차리그 1차전에서도 대만과 살얼음판 승부를 펼치다 마무리 박찬호의 활약 속에 5-4로 극적인 승리를 거뒀고, 일본전에서는 이병규의 만루홈런을 앞세워 9-2로 대승했다. 초대 ‘드림팀’의 명성에 걸맞게 이후의 행보도 거침없었다. 중국과의 준결승에서는 4회 등판한 김병현이 8연속타자 탈삼진쇼를 펼치면서 9-2로 이겼다. 많은 야구관계자들은 “김병현이 애리조나와 계약하고 메이저리그에 진출하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경기였다”고 증언했다. 일본과의 결승전도 싱거웠다. 장단 14안타를 몰아치며 13-1로 7회 콜드게임승리를 따냈다. 대표팀 22명 전원이 가볍게 금메달과 병역 대체복무 혜택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았다. 꿈같은 대표팀이 일궈낸 꿈같은 결과였다. [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