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5월17일 당 의장직 사퇴 기자회견을 하는 정동영 전 의장(가운데)과 천정배 원내대표(왼쪽) 신기남 의장(오른쪽). 당권파를 대표하며 당을 이끌어온 이들 세 사람의 위상이 최근 잇단 악재로 급격히 흔들리고 있다. 이종현 기자 jhlee@ilyo.co.kr | ||
지난 1월11일 전당대회 이후 당권파를 대표하며 당을 이끌어 온 세 사람이 최근 당청(黨靑)-당정(黨政) 갈등과 6·5 재보선 참패, 차기 총리 지명-개각 논란을 거치면서 여권 내 위상이 급격히 흔들리고 있기 때문이다. “`천-신-정 천하(天下)’는 이제 끝났다”는 얘기가 열린우리당 내에서 공공연히 나오는가 하면, 당권파도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최근의 상황에 우려를 표시하고 있는 실정이다.
`천-신-정’의 위기는 열린우리당에 대한 지지율 급락에서 단적으로 확인되고 있다. 5월 중순만 해도 40%대 중반을 웃돌던 당 지지율이 이달 들어선 한국사회여론연구소-TNS 소프레스 조사(8일), MBC-코리아 리서치 조사(9일)에서 각각 32%, 32.5%로 급격히 하향곡선을 그리고 있다. 특히 10% 후반에 머물던 한나라당의 지지율이 두 기관의 조사에서 29.7%, 28.7%로 급등했고, 특히 서울에서는 열린우리당을 추월한 것으로 나타나 충격을 던져주고 있다.
지지율 폭락은 당장 열린우리당의 `투톱’인 신기남 의장-천정배 원내대표의 입지를 뒤흔들어 놓았다. 특히 노무현 대통령이 6월 들어 ▲‘김혁규 총리’ 카드에 대한 여당 내 반발 ▲열린우리당 소장파들의 당청 관계 재정립 요구 ▲아파트 분양 원가 공개를 둘러싼 당정간 혼선 등을 소재로 당 지도부를 연이어 질타하면서 두 사람의 위기가 본격화됐다. 여기에 6·5 재보선 광역단체장 선거에서 `4전(4戰)4패(敗)’란 참담한 성적을 거둔 것과, 비당권파인 이해찬 의원에 대한 전격적인 총리 지명(8일)도 신 의장과 천 대표에겐 적지않은 충격이었다는 평가다.
지난달 중순 `자의반, 타의반’으로 의장직에서 물러난 정동영 전 의장에게도 시련이 계속되고 있다. 개각 논란 과정에서 김근태 전 원내대표와 통일부 장관직을 놓고 `볼썽사나운’ 암투를 벌여 여권 안팎에서 곱지않은 시선을 받아온 정 전 의장은 최근 들어 당내 지지세력 이탈이 가속화되고 있어 고민이 깊어지고 있다.
특히 서울대 문리대 동기(72학번)인 이해찬 의원이 차기 총리에 지명되면서 입각도 불투명해져 원외인 정 전 의장이 자칫하면 당분간 여권내에서 `미아(迷兒)’의 신세가 될 것이란 예측이 나오고 있는 형편이다. 확산일로에 있는 `천-신-정 위기설’의 실체를 추적해 봤다.
우선 6·5 재보선 참패로 퇴진 위기에 몰렸던 신 의장은 지난 10일 열린우리당 중앙위원회에서 일단 재신임을 받아 의장직을 당분간 유지하게 됐다. 중앙위가 비당권파의 `현 지도부 사퇴-7~8월 전당대회’ 요구 대신 `현 지도부 유지-내년 1월 전대’ 제안을 채택했기 때문이다. 5월15일 당 의장에 취임했던 신 의장으로선 `한 달 천하’로 막을 내리는 불명예스러운 상황은 일단 피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신기남 체제’ 유지로 결론을 내린 이후에도 여권 내에서 신 의장의 리더십에 대한 문제제기는 좀처럼 가라앉지 않고 있다. 특히 신 의장이 재보선 참패 이후 당내 위상 강화를 위해 내놓은 `당 발전위원회’ 구성 제안이 당내 반발로 사실상 폐기되면서 지도력에 손상만 불러왔다는 평가다.
신 의장은 당초 중진그룹과 개혁당, 신당추진위 등 각 계파 대표들이 참여하는 당 발전위를 발족시켜 당 체제정비와 기간 당원 확보 등 당 개혁작업을 주도한다는 계획이었다. 당 안팎에서 불거졌던 ‘당권파 독주’ 논란을 잠재우고, 멤버들의 잇딴 사퇴로 지도력이 급격히 떨어진 상임중앙위원회를 보완하려는 게 목적이었다.
하지만 비당권파들은 당 발전위 구상이 신 의장 등 당권파들이 내년 1월 전대 당권경쟁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하기 위한 `꼼수’라 비판하며 참여하지 않겠다는 뜻을 분명히 하고 나섰다. 비당권파 한 의원은 “10일 중앙위 결정은 신 의장이 과도기 당 대표로서 내년 1월 전대 준비에 전념하라는 뜻이었다. 만약 신 의장이 `비당권파 포용’이란 명분으로 당 발전위를 만들어 과도기 지도부로서의 본분을 잊고 `세(勢) 확산’에 나서려 한다면 좌시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신 의장측도 당내 상황이 자신의 의도와 정반대로 흐르자 당 발전위 카드를 포기한 상태다. 김부겸 당 의장 비서실장은 “당내 분위기상 당 발전위 구성은 어렵게 됐다. 대신 중진들이 당 운영에 참여할 수 있는 다른 틀을 고민중이다”고 말했다.
당헌-당규상 결원이 생긴 상임중앙위원회의 보충이 어려운 상황에서 당 발전위 구상까지 무산되면서 `신기남 체제’는 앞으로도 대표성 논란에서 벗어나기 어렵게 됐다.
노 대통령과의 껄끄러운 관계도 신 의장의 주요 고민거리다. 특히 노 대통령이 신 의장이 두 번이나 요청한 대통령-당 의장, 원내대표간 정례회동을 거절함은 물론 “(나도) 열린우리당과 국회의 운영에 간섭하지 않을테니, 당도 청와대 운영에 간섭말라”고 일갈하면서 당청간 불협화음은 위험수위에 다다른 상태다. 노 대통령은 또 이해찬 총리 지명도 여당 지도부와의 만찬(8일) 직후 발표토록 해 외형상 `배려’하는 모양새를 취했지만, 내용상으론 당과 사전협의 없이 결과를 일방통보해 신 의장을 곤혹스럽게 만들었다.
신 의장도 노 대통령과의 관계가 `난기류’라는 분석이 확산되는데 부담을 느끼는 기색이 역력하다. 그는 13일 당 홈페이지 게시판에 “요즘 저보고 대통령 생각을 잘 모르는 것 아니냐고 걱정하시는 분들이 있지만 신기하게도 제 생각과 결론이 대통령의 그것과 다른 적이 없고 가장 일치한다고 들어왔다”고 밝혔지만, 여권내에선 그의 주장에 고개를 갸웃거리는 분위기다.
천정배 원내대표도 당청-당정 갈등의 중심에 놓여 있는데다 대야 관계가 꼬이면서 얼굴에 수심이 가득하다. 천 대표는 우선 `원내 사령탑’이란 위상에도 불구하고, 현안에 대한 당내 이견을 매끄럽게 조정하지 못하면서 신 의장과 마찬가지로 `리더십 부재’라는 꼬리표를 달게 됐다. 특히 일부 개혁성향 초재선들의 `돌출 행보’에 발끈한 노 대통령이 “당이 국회에서 일사불란하게 대통령을 지원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대통령도 국회에서 패배를 받아들일 준비가 돼 있다”(4일)는 `폭탄 선언’을 하면서 천 대표는 급격히 코너에 몰리기 시작했다.
좀처럼 풀리지 않는 야당과의 관계도 천 대표를 옥죄고 있다. 17대 국회가 지난 5일부터 임기를 시작했지만 아직 국회 상임위원장 배분 문제에 막혀 원(院) 구성 협상을 타결짓지 못하면서 천 대표의 교섭력에 의문부호가 그려지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비당권파는 물론 청와대 내에서도 3선인 천 대표가 산전수전 다겪은 5선 관록의 한나라당 김덕룡 원내대표의 카운터 파트론 역부족이라는 평가가 확산되고 있는 것도 천 대표의 고민을 가중시키고 있다.
비슷한 맥락에서 자신과 원내대표 경선에서 맞붙었던 이해찬 의원이 총리에 지명된 것도 천 대표를 상심하게 만든 요인이다. `이해찬 총리’ 카드의 배경에, 열린우리당 현 지도부에 대한 노 대통령의 불만과 당권파에 대한 견제의 의미가 담겨 있다는 해석이 나오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천 대표와 갈등을 빚었던 문희상 의원을 중심으로 하는 친노 직계그룹이 당내 새로운 파워그룹으로 등장한 것도 마음을 무겁게 만드는 요인이 되고 있다.
그동안 `천-신-정’의 정점이었던 정 전 의장도 좀처럼 침체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특히 `이해찬 총리’ 지명을 계기로 6월 말 개각에서 통일부 장관으로 입각하려던 계획이 수포로 돌아갈 가능성이 커지면서 대권 스케줄 전반에 차질이 빚어질 것이란 우려가 나오고 있는 상황이다. 정 전 의장측은 대외적으론 청와대의 시선을 의식해 “입각 방침에 변화가 없다”고 밝히고 있지만, 내부적으론 “친구인 `이해찬 총리’ 밑에서 `정동영 장관’으로 있는 것이 도움이 되겠느냐. 차라리 정 전 의장이 먼저 입각 포기 뜻을 노 대통령에 밝히고 장기 외유에 나서는 것이 낫다”는 주장이 확산되는 실정이다.
김근태 전 원내대표와 통일부 장관직을 놓고 `정-김 전쟁’으로 불릴 만큼 암투를 벌였던 것도 정 전 의장엔 4·15 총선 기간 `노인 폄하’에 이어 적지않은 데미지를 줬다는 평가다. 특히 원인 제공을 정 전 의장측이 했다는 평가가 우세한 것도 아픈 대목이다. 열린우리당 한 당직자는 “`정-김 전쟁’에서 두 사람 다 피해자지만, 당내에선 정 전 의장이 김 전 대표의 뒤통수를 쳐 자리를 가로채려다 사단이 벌어졌다는 해석이 많다. 정 전 의장이 계속 악수(惡手)만 두는 것 같아 안타깝다”고 말했다.
한때 당내 최대 계파로 평가받던 `정동영계’ 인사들의 이탈이 늘고 있는 것도 정 전 의장측의 고민이다. 총선 직후만 해도 주로 지역구-비례대표 공천을 통해 연을 맺어 `정동영 사람들’로 분류됐던 의원들이 30여 명을 넘었지만, 당 의장직 사퇴 후 정 전 의장의 입지가 약화되면서 지금은 많아봐야 절반 정도라는 것이 분석이다.
정 전 의장측의 `이상 징후’는 대 언론관계에서도 확인된다. 의장직 사퇴 후 5월 중하순 설악산에서 닷새간 칩거형 휴가를 보냈던 정 전 의장은 지난 7일부터는 2주간 일정으로 일본과 미국 방문길에 올랐다. 여권 내에선 다른 어느 정치인들보다 언론과의 활발한 접촉을 통해 정치적 위상을 높여온 정 전 의장이 최근 언론을 `피해다니는’ 상황에서 그의 위기를 감지할 수 있다는 얘기가 나오고 있다.
이준원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