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5월20일 청와대에서 열린 열린우리당 지도부 초청만찬에 참석한 노무현 대통령(맨 왼쪽)과 정동영 전 의장, 김근태 전 원내대표(오른쪽부터) 등 참석자들. 청와대사진기자단 | ||
최근 만난 열린우리당 고위 관계자는 차기 대권주자로 거론되는 ‘정·김’ 두 사람에 대한 불만을 이렇게 표출했다. 이어지는 그의 분석.
“대통령은 탄핵기각으로 업무에 복귀하면서 뭔가 의욕적인 개혁 드라이브를 시도하려고 했다. 그런데 초반부터 두 사람이 입각문제를 놓고 티격태격하는 모습을 보였고, 이로 인해 6·5 재선에도 영향을 미쳤다.”
물론 열린우리당의 6·5 재보선 패인이 비단 ‘정·김’의 통일부장관 쟁탈전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당내에선 두 사람의 치열한 입각 갈등을 참패의 한 요인으로 꼽는다. 국민들에게 여당 지도부의 불안한 모습을 노출했다는 것이다. 이를 지켜보던 청와대도 두 사람에게 간접적인 경로를 통해 ‘경고 메시지’를 전달하기도 했다. 급기야 지난 8일 노 대통령은 ‘이해찬 총리 카드’까지 빼들면서 ‘정·김’ 두 잠룡(潛龍)에 대한 불편한 심기의 일단을 드러냈다는 게 정가의 대체적인 시각이다. 심지어 정계 일각에선 “‘정·김’ 두 사람의 입각은 물 건너갔다”는 관측까지 나오고 있는 상황이다.
노 대통령이 탄핵 정국으로 손발이 꽁꽁 묶여있는 상황에서 치러진 총선에서 열린우리당이 과반수(1백52석)를 차지하는 압승을 거뒀다. 이에 노 대통령도 정동영 당시 당의장과 김근태 원내대표의 노고를 높이 치하했다. 그러면서 노 대통령은 자신이 해양수산부장관을 역임했던 것처럼 차기 대권을 꿈꾸는 두 사람에게 행정경험을 쌓게 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던 것 같다. 그래서인지 총선이 끝난 4월 말 노 대통령은 김 전 대표와 정 전 의장을 차례로 청와대로 불러 입각을 제의했다. 여기에는 ‘정·김’에게 국정운영 경험을 쌓게 하고, 동시에 차기를 겨냥한 조기경쟁으로 인한 ‘상처’를 예방하겠다는 ‘순수한’ 정치적 배려가 깔려 있다고 풀이된다.
그런데 여기에 덧붙여 ‘집권 2기’ 개혁 드라이브를 가동하려는 노 대통령의 정치적 이해도 맞물렸다는 게 정치권의 해석. 노 대통령으로선 ‘정·김’ 등 차기 대권주자군을 입각시킴으로써 차기 대권 경쟁이 조기에 가시화되는 것을 차단하는 효과를 겨냥했던 것이다. 차기 대권레이스의 조기 가시화가 자칫 노 대통령의 조기 레임덕(권력누수현상)을 가져올 수도 있기에 이를 차단하기 위한 방책인 셈이다. ‘입각 제의’가 언론에 보도되면서 청와대 관계자들은 “장관직을 경험하는 것은 조직과 정책 능력을 높일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입을 모았다. 두 사람의 입각이 기정 사실화되는 분위기였다. 정 전 의장은 입각에 대해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하지만 김 전 대표는 내심 당에 잔류하고 싶어했으나, “대통령의 뜻에 따르겠다”고 밝혔다.
그런데 지난 5월초 ‘정동영-과학기술부 또는 정보통신부 장관, 김근태-통일부 장관 입각 가능성 높다’는 언론 보도가 나왔다. 그러면서 ‘정·김’은 통일부 장관 자리를 놓고 ‘보이지 않는 기 싸움’에 돌입했다. 이에 대해 청와대는 불쾌감을 감추지 않았다. “대통령 탄핵 기간인데 벌써부터 장관 자리를 거론하느냐”며 양 진영에 경고했던 것. 그럼에도 ‘정·김’ 양 진영은 상대편을 겨냥해 “언론플레이를 하고 있다”는 볼썽사나운 모습을 드러내기도 했다.
열린우리당의 한 중진 의원은 “노 대통령은 탄핵정국 당시 수립한 ‘집권2기’ 구상에 ‘정·김 입각’이 포함돼 있었다”고 말했다. 그는 “다만 탄핵기각이 확정(5월14일)되기도 전부터 구체적인 입각설이 나돌면서 두 사람간의 (통일부장관) 자리다툼이 조기에 과열됐고, 이것이 노 대통령을 자극했던 것 같다”고 밝혔다. 부총리에 해당하는 통일부장관에 누가 오를 것이냐를 놓고 ‘정·김’ 양 진영이 치열한 신경전이 벌였고, 이것이 노 대통령의 이맛살을 찌푸리게 했다는 얘기다.
이에 노 대통령의 최측근으로 누구보다도 대통령의 의중을 꿰뚫고 있는 문희상 의원은 대통령 정치특보였던 5월 중순 <시사저널>과의 인터뷰를 통해 “조직의 생리상 두 대권 주자는 갈등의 핵이 될 수 있다. 두 사람은 앞으로 1, 2년 당에서 뽑아내야지 안 그러면 서로 싸우다 둘 다 후보가 못될 수 있다”고 경고했다. 문 의원의 발언을 당내에선 ‘노심(盧心)’으로 받아들였다.
▲ 지난 5월11일 원내대표선출 투표장에서 대화하고 있는 정동영 전 의장과 김근태 전 원내대표. | ||
‘정·김’도 “(노 대통령으로부터) 구체적인 자리를 제의 받은 적은 없다”고 말했다. 그럼에도 대통령 의중과는 상관없이 ‘정·김’ 양 진영의 통일부장관 자리다툼은 계속됐다.
당시까지만 해도 노 대통령은 ‘김혁규 총리 카드’를 쥐고 있었다. 김혁규 전 경남지사 휘하에 ‘정·김’을 배치함으로써 대권주자군의 조기 과열 경쟁을 제어할 수 있을 것으로 보았던 것이다. 그렇지만 6·5 재보선 참패를 책임지겠다는 명분으로 김 전 지사가 총리직을 고사했다. 노 대통령의 ‘집권 2기’ 구상의 수정이 불가피해진 것이다.
그리고 지난 8일, 노 대통령은 ‘재야파’인 이해찬 의원을 총리 후보로 전격 지명했다. 그야말로 ‘노무현식 깜짝 인사’였다.
이 의원이 총리로 지명되면서 ‘노심’에 대한 궁금증은 더욱 증폭됐다. 정 전 의장이 이 의원보다 한 살 어리지만 ‘친구’나 마찬가지고, 96년 총선 직전 정 전 의장을 정치권에 영입한 이도 바로 이 의원이었다. 그렇지만 지난 5월 원내대표 경선 당시 정 전 의장은 소위 ‘천·신·정(천정배 신기남 정동영)’으로 불리는 천정배 의원을 지지했다.
반면 김 전 대표는 대표 경선주자로 나선 이 의원을 지지하는 모양새를 띠었다. 당시 천 의원이 ‘실용주의 노선’을, 이 의원은 ‘개혁주의 노선’을 견지했다. 이는 ‘정·김’ 두 사람의 정치 노선을 대변하는 것으로 해석됐다.
그렇다면 노 대통령이 이 의원을 차기 총리 후보로 지명한 까닭은 무엇일까. 열린우리당의 핵심 관계자는 이와 관련해 “무엇보다 이 의원이 차기 대권에 욕심이 없는 것으로 알려졌기 때문에 대통령이 부담 없이 총리로 지명한 것 같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사실 정 전 의장과 김 전 대표는 총선 이후 자의든 타의든 ‘너무 튄다’는 지적을 받았고, 이것이 노 대통령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다. 최근 청와대 관계자가 ‘두 사람의 입각 갈등으로 인해 부담을 느낀 고건 전 총리가 노 대통령의 각료 제청권 요청을 거부했다는 분석도 있다’고 말했다”고 전했다. 그는 한 발 더 나가 “6월 말이나 7월 초로 예정된 개각에서 두 사람 모두 입각하지 못할 수도 있다”고 조심스럽게 내다봤다. 현재 정가에 나도는 일반적 분석과는 다른 새로운 시각이다.
이 관계자의 관측대로 ‘정·김’ 두 사람이 입각하지 못한다면, 향후 이들의 거취는 어떻게 될까. 이에 대해 앞서 언급했던 중진 의원은 “한때 당내에서 두 사람이 당에 잔류하거나 지도부에 다시 입성할 것이라는 관측도 나왔으나, 이것도 이미 물 건너갔다”며 “7·8월 조기 전당대회 개최도 사실상 폐기됐고, 신기남 의장체제가 내년 초까지 연장됨에 따라 두 사람의 운신의 폭이 한동안 좁아질 것”이라고 전망했다.
심지어 정치권 일각에서는 노 대통령이 ‘정·김’ 두 사람을 차기 대권주자군으로 염두에 두고 있는지에 대해서도 의문을 제기한다. 정치권의 한 인사는 “지난 97년 대선 후보 경선 당시 김상현·정대철 두 사람이 김대중(DJ) (국민회의) 총재에게 맞섰으나, 2002년 민주당 대선 후보 경선엔 나서지 못했던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DJ는 의원직이 없던 노무현에게 (해양수산부) 장관직을 주면서 기회 균등의 원칙을 지켰다. 하지만 김상현과 정대철에게는 이렇다 할만한 배려가 없었다. DJ 자신에게 맞섰던 것에 대한 감정이 완전히 소멸됐다고 보기 힘든 대목이다. 그래서 노 대통령도 대선 후보 경선에서 자신과 경쟁했던 ‘정·김’ 두 사람을 과연 차기주자군으로 염두에 두고 있는지도 의문이다”고 말했다. 93년 YS 집권 초기 ‘2인자와 차기주자’로 세력을 키우며 급부상 했던 김덕룡 의원이 그뒤 정권핵심부의 견제를 받아 추락했던 것도 많은 시사점을 던져주고 있다.
어떤 조직이든 ‘넘버 원(one)과 투(two)’는 긴장관계를 유지할 수밖에 없는 생리구조를 갖고 있다. 권력 1인자에게 2인자는 복종을 맹세하면서도 한편으론 1인자의 꿈을 갖기 마련. 노 대통령도 참여정부 ‘집권 2기’를 시작하면서 권력 2인자에 속하는 ‘정·김’에 대한 견제심리를 갖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할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