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때 그 장면 지난 97년 11월3일, DJP연합서명 식 직후 김대중 당시 국민회의 대통령 후보(왼 쪽)와 김종필 자민련 후보가 포옹하고 있다. 이 를 발판으로 DJ는 청와대에 입성할 수 있었다. | ||
역사는 반복되는 것일까. 97년 대선을 꼭 한달 앞두고 있던 97년 11월 상황도 최근 상황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의원들의 탈당과 입당 등 이합집산이 본격적으로 이뤄졌고, DJP 연대 등 대선 후보간 합종연횡이 이뤄지면서 대선은 급속히 양강 대결국면으로 재편됐다. 97년 11월의 상황과 2002년 11월의 상황을 비교해본다.
▶11월 첫째주(11월1일~11월7일)
97년
대선을 약 40여일 앞둔 97년 10월 말과 11월 초에는 의원들의 탈당과 입당이 활발히 이뤄졌다. 여기에 대선후보 진영간 합종연횡 시도도 활발히 전개됐다. 10월31일 당시 신한국당 소속이던 서석재 김운환 한이헌 의원 등이 탈당한데 이어, 11월2일에는 박범진 이용삼 김학원 원유철 의원 등이 신한국당을 탈당했다.
이들은 당시 이인제 의원 주도로 11월4일 창당한 국민신당에 합류했다. 몇몇 의원들의 탈당러시로 거대여당 신한국당이 분당위기에 직면한 가운데, 대선구도는 이인제 의원 중심의 국민신당이 출범함으로써 신한국당 이회창, 국민회의 김대중, 국민신당 이인제 후보 등 3자 대결구도가 형성됐다.
한편, 이 같은 3자 대결구도 속에서 대선후보간 합종연횡도 본격적으로 진행됐다. 먼저 국민회의 김대중 후보와 자민련 김종필 후보간 내각제를 매개로 DJP연합에 합의, 11월3일 공식 서명식을 가졌다.
이에 맞서 신한국당 이회창 후보는 민주당 조순 후보와 연대 논의에 돌입, 11월5일 이회창-조순 연대를 공식 표명했다. DJP연합 이후, 국민회의 김대중 후보는 박태준 의원을 포함한 DJT연대를 11월6일 공식 선언하기에 이른다.
11월7일에는 신한국당과 민주당이 통합에 합의함으로써 대선구도는 3파전이 완성됐고, 이날 김영삼 당시 대통령은 신한국당 탈당을 선언했다.
2002년
1일 강성구 김명섭 의원 탈당, 3일 이근진 김윤식 의원 탈당, 4일 김영배 김원길 박종우 설송웅 의원 등 민주당 의원 11명 대거 탈당 등 11월 들어 민주당은 분당 위기에 직면했다.
의원들의 탈당행렬로만 보면 97년 11월 신한국당의 의원 탈당러시와 유사하다. 또한, 11월5일 정몽준 의원이 국민통합21을 공식 출범시킴으로써 대선구도가 3자 대결구도로 재편된 점도 97년 상황과 거의 일치한다.
조금 다른 점이 있다면, 97년 신한국당에서 탈당한 의원들이 대거 국민신당에 합류한데 반해, 2002년 민주당 탈당 의원들은 무소속으로 잔류했다는 점이다. 한편, 민주당 노무현 후보와 국민통합21 정몽준 후보가 ‘후보 단일화’ 논의에 돌입한 점은 97년 DJP연합와 이회창-조순 연대 상황과 유사한 측면이 있다.
▲ 똑같네… 지난 16일 노무현 민주당 대통령 후보 와 정몽준 국민통합21 후보가 단일화 방안에 합 의한 뒤 포옹하고 있다. 임준선 기자 kjlim@ilyo.co.kr | ||
97년
대선구도가 이회창 김대중 이인제 후보 등 3파전으로 확정된 이후에는 후보간 지지율에 조금씩 변동이 시작됐다. 97년 7월 신한국당 대선후보로 선출된 직후, 한때 50%대 지지율을 기록했던 이회창 후보는 두 아들의 고의감량 병역면제 의혹이 제기된 이후 지지율이 10%대로 곤두박질쳤다.
그러나 이 후보는 11월 들어 신한국-민주 합당을 성사시킨 이후 조금씩 지지율을 회복, 11월10일 비로소 20%대 지지율을 회복하게 된다. 이에 반해 30%대 지지율로 1, 2위를 기록하던 국민신당 이인제 후보는 ‘YS 2백억원 지원설’ 등으로 지지율이 하락세로 돌아서 20%대로 떨어졌다.
국민회의 김대중 후보는 DJT연대 성사 이후, 30%대 지지율을 유지하며 안정적인 1위 굳히기에 들어갔다. 또한, DJT연대 이후 통추(국민통합추진회의) 주요 인사들을 접촉, 입당에 합의함으로써 외연확대에도 적극 나섰다. 통추 출신인사들이 국민회의에 대거 입당한 11월13일, 신한국당과 민주당은 후보단일화에 공식 서명했고, 11월14일 DJT는 공동 선대위 발대식을 가졌다.
2002년
11월 둘째주에 들어서도 의원들의 탈당행렬은 계속됐다. 11월8일 민주당 원유철 의원이 탈당한데 이어, 9일에는 유용태 장성원 송영진 의원이 탈당했다. 14일에는 자민련에서 오장섭 이양희 이재선 의원이 탈당했다. 민주당에서 탈당한 의원 가운데 원유철 이근진 김윤식 의원은 11일 한나라당에 입당했고, 자민련을 탈당한 이양희 이재선 의원은 15일 한나라당에 입당했다.
그러나 자민련을 탈당, 한나라당 입당을 추진한 오장섭 의원은 한나라당의 선별 입당방침에 막혀 입당이 좌절됐다. 민주당과 자민련에서 의원 탈당행렬이 계속되는 동안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는 9일 97년 당시 김대중 대통령과 연대했던 박태준 전 총리와 회동, ‘지지 선언’을 이끌어냈고, 10일에는 연초 탈당한 박근혜 한국미래연합 대표와 회동, 복당 의사를 타진했다.
이회창 후보와 회동 이후 박 대표는 사실상 ‘한나라당 복당’을 시사했다. 이회창 후보가 외연확대에 주력하는 동안 지지율이 20%대로 엇비슷해진 민주당 노무현-국민통합21 정몽준 후보 진영은 ‘후보 단일화’를 위한 본격 실무접촉에 나섰다.
▶11월 셋째주(11월15일~11월21일)
97년
대선을 꼭 30여 일 앞둔 11월 셋째주는 대선구도가 급격히 양강구도로 재편되는 과정이었다. 이회창 후보가 각종 대선 여론조사에서 2위에 랭크되며 당시 지지율 1위를 달리고 있던 국민회의 김대중 후보의 대항마로 떠오른 것.
대선국면이 2강구도로 압축되면서 신한국당의 내분사태는 진정국면에 접어들었다. 이회창 후보 지지율이 하락한 이후 줄곧 ‘탈당’을 공언해오던 민주계가 16일 ‘당 잔류’를 선언했고, 17일에는 ‘이회창 후보 지지’를 선언했다. 21일에는 신한국당-민주당 통합에 따른 ‘한나라당’이 공식 출범했다. 한편, 21일 자민련은 박태준 의원을 총재로 선출함으로써 DJT를 완성했다.
2002년
11월 셋째주의 시작은 ‘노무현-정몽준 단일화 합의’로 시작됐다. 16일 새벽 후보 담판을 통해 8개항에 합의함으로써 대선을 30여 일 앞두고 12월 대선이 양자 대결구도로 치러질 것임을 예고했다. 한편, ‘노-정 후보 단일화 합의’ 이후 민주당 내분사태가 진정국면에 접어든 점은 97년 민주계의 ‘당 잔류 선언’과 ‘이회창 후보 지지선언’의 상황과 유사한 측면이 있다.
▶11월 넷째주(11월22일~11월30일)
97년
후보 등록을 앞두고 발표된 각종 대선 여론조사는 대선 결과를 가늠케 하는 지표였다. 각종 매체에 발표된 대선 여론조사 결과는 국민회의 김대중 후보가 1위를 고수하고 있는 가운데,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가 오차 범위 내에 접근했다는 내용이었다.
실제 11월24일 발표된 <동아일보> 여론조사 결과는 김대중 후보 33.8%, 이회창 후보 32.2%, 이인제 후보 21.2%로 12월18일 실제 대선 결과와 큰 차이가 없었다. 한편 후보등록을 하루 앞둔 25일 이부영 의원 등은 한나라당에 합류했다.
2002년
TV토론과 여론조사를 통해 노무현-정몽준 후보 단일화가 성사될 11월 넷째주는 대선 결과를 가늠해볼 수 있는 중요한 시점이다.
누가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에 맞설 대항마로 후보등록을 할 것인가. 그리고 후보등록 직전 발표될 대선 여론조사 결과는 어떻게 나올 것인가. 벌써부터 궁금해지는 대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