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근태 전 원내대표 | ||
정치권의 중진급 인사들은 “시대가 바뀐 건 사실이지만 여당 주요 인사들이 대통령에게 공개적으로 맞각을 세우는 최근의 상황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상상도 할 수 없던 일”이라 보고 있다. 과연 열린우리당 주요 인사들이 공개적으로 ‘노무현 대통령 때리기’에 나선 내막은 무엇일까.
지난 14일 김근태 전 대표가 공공주택 분양원가 공개를 요구하며 “계급장을 떼고 치열하게 논쟁하자”고 밝혀 파문을 일으켰다. 여권 내에서는 ‘계급장을 떼자’는 대상이 원가공개에 부정적인 노무현 대통령을 지칭한 것이라는 추측이 수그러들지 않고 있다.
노무현 대통령은 지난 9일 민주노동당 고위인사들과의 청와대 회동 자리에서 ‘공공주택 분양원가 공개는 시장 논리에 맞지 않다’는 입장을 피력했다. 분양원가 공개는 지난 총선 당시 열린우리당의 공약 사항이었지만 노 대통령의 이 같은 발언은 분양원가 공개에 대한 노 대통령의 부정적 시각을 어느 정도 드러냈다는 평이다. 지난 12일 청와대와 열린우리당 간의 고위 당·청 회의에서도 논란이 있었지만 분양원가 공개를 하지 않는 방향으로 논의가 흘러갔다는 것이 대체적인 관측이었다.
그러나 김 전 대표의 ‘계급장 발언’이 나오면서 ‘천정배-문희상 갈등’ 이후 다시 한번 당·청, 당·정 간 갈등이 불거질 기류가 흐르게 됐다.
‘계급장 발언’ 파문 하루 뒤인 지난 15일 김 전 대표는 청와대측에 자신의 진의가 왜곡됐다는 뜻을 전한 것으로 알려졌다. 김 전 대표와 가까운 한 의원은 “국정 현안에 대해 당·청·정 간 활발한 토론이 필요하고 당이 총선 공약으로 내세운 분양원가 공개 사안이 공개적 논의 없이 폐기되면 국민들에게 당의 개혁성이 후퇴하는 것으로 비칠 수도 있었기 때문에 원가공개를 촉구하는 발언을 하게 된 것”이라 설명했다.
그러나 당내 다수 인사들은 김 전 대표의 이번 발언을 청와대측에 대한 일종의 ‘정면 대응’인 것으로 받아들이는 분위기다. ‘계급장 발언’이 있기 며칠 전 김 전 대표는 자신을 따르는 일부 초선 의원들과 참모진들과 함께 한 자리에서 분양원가 공개 촉구를 위한 입장 표명 의사를 밝혔다고 한다. 이 자리에 참석했던 한 인사는 “지금은 이라크 추가파병 문제나 행정수도 이전 논란 등으로 여권 내에 노 대통령을 도와줘야 한다는 의견이 나오는 상황이다. 이렇게 민감할 때 노 대통령이 부정적으로 표현한 분양원가 공개를 적극 촉구하고 나선다면 노 대통령과 정면충돌하는 것으로 비칠 수 있다는 입장을 자리에 참석한 인사들이 김 전 대표에게 전했지만 김 전 대표의 의지는 확고해 보였다”고 전했다.
김 전 대표는 ‘계급장 발언’ 이틀 전인 12일 국회의원 동산에서 팬클럽 ‘희망(www.gtclub.org)’ 주최 행사에 참석해 노 대통령과 나눈 대화를 소개했다고 한다. 이날 참석자들 앞에서 김 전 대표가 ‘당초 노 대통령으로부터 제의를 받은 분야 중 통일부와 문화관광부에 관심이 많다는 의사를 전달했고 사실상 합의에 이르렀다고 기억한다’고 밝힌 것이 뒤늦게 알려진 것이다.
이에 대해 열린우리당의 한 재선의원은 “김 전 대표가 정동영 전 의장과의 동반입각 구도에서 원했던 통일부가 아닌 보건복지부 장관직에 낙점된 점이나 자신의 재야후배인 이해찬 의원이 총리 후보자로 지명된 점 등이 김 전 대표로 하여금 ‘성질을 돋구게’ 만든 것 아니겠나”라 밝혔다. 입각 파동과 ‘이해찬 총리 카드’를 통해 정치적 입지가 축소되는 것에 대해 김 전 대표가 노 대통령을 정면으로 ‘치받음’으로서 차기 주자다운 면모를 보여주려 했다는 분석이다.
▲ 공공주택 분양원가 공개 논란 등 현안에 대해 김근태 전 원내대표를 비롯한 여당 주요인사들이 공개적으로 대통령과 ‘뜻이 다름’을 피력하고 있다. 사진은 청와대에서 만난 노 대통령과 신기남 의장, 천정배 원내대표(왼쪽부터). 청와대사진기자단 | ||
노 대통령에 대한 ‘정면 충돌’ 기류는 현 당 지도부의 행보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신기남 의장은 지난 16일 방송에 출연해 “공공주택 원가공개를 하는 것이 맞다”는 입장을 밝혔다. 다음날인 지난 17일 천정배 원내대표도 방송기자클럽 초청 토론회에 참석해 “원가공개를 한다고 해서 시장경제 논리를 본질적으로 훼손한다고 보지는 않는다”고 밝혔다. 당내 서열 1~2위인 신 의장과 천 대표가 TV로 생방송되는 자리에서 노 대통령과 ‘뜻이 다름’을 분명히 한 것이다. 김부겸 당의장 비서실장도 “분양원가 공개 공약을 금세 없었던 일로 하면 당이 망가진다”며 당 지도부를 거들었다.
이에 대해 열린우리당의 한 재선의원은 “‘김혁규 총리 카드’문제로 당 지도부와 대통령 정치특보였던 문희상 의원이 갈등을 빚었다. 이후 대통령 정치특보제가 폐지되면서 외형적으로는 당권파가 승리를 거둔 것처럼 보였지만 예상치 못했던 ‘이해찬 총리 카드’가 등장했다. 이해찬 총리 후보 지명자는 현 당 지도부에 비판적이었던 이른바 ‘비 당권파’의 중심 인물이었다. 당 지도부 입장에선 ‘노 대통령이 이해찬 지명자를 통해 당 길들이기를 시도한다’는 극단적 해석도 할 수 있다”라 밝혔다. 이 의원은 “재보선 참패 이후 리더십 부재 현상을 겪고 있는 당 지도부로선 당내 인사들이 ‘공약 이행’을 명분으로 분양원가 공개를 주장하는 것에 힘을 실어주면서 ‘현재 당을 이끌어 가는 것은 대통령이나 총리가 아닌 당의장과 원내대표’라는 것을 보여줄 필요가 있지 않았겠나”란 해석도 덧붙였다.
일각에선 매우 ‘극단적’인 해석까지 나오고 있다. 정치권의 한 관계자는 “대선후보는 누가 던져다 주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스스로 쟁취하는 것이다. 재보선 참패 이후 노무현 정부와 열린우리당에 대한 지지도가 급락하고 있는 시점에서 ‘공약 이행’이란 명분으로 대통령과 정면 충돌을 하게 되면 이는 ‘여론을 대변하기 위해서라면 대통령에게도 맞각을 들이댈 수 있다’는 인상을 심어주면서 설사 현 정권에 대한 지지도가 계속 추락한다해도 정치적 입지를 강화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겠나”라 밝히기도 했다.
정치권에선 현재 분양원가를 둘러싼 논란이 오래 갈 것으로 보지는 않고 있다. 여권의 한 고위관계자는 “노 대통령이 민노당 인사들과의 자리에서 시장경제 원칙을 강조하다가 분양원가 공개에 대한 입장을 보인 것이지 열린우리당 인사들에게 ‘총선 공약을 이행하지 말자’는 식으로 밝힌 것은 절대 아니다”고 밝힌다. 이 관계자는 “신기남 의장이 이라크 추가 파병에 반대하던 당론을 잘 수습해서 노 대통령의 부담을 덜어주지 않았나. 당·청·정 간에 활발한 논의가 오간다면 분양원가 공개에 대한 이견을 금세 좁힐 수 있다”고 덧붙였다. 일각에선 이번 ‘계급장 발언’을 통해 김 전 대표가 입각 포기 수순을 밟는다는 시각도 나온다.
그러나 열린우리당의 한 재선의원은 “일부 초선들이 당·청 관계 재정립을 요구하며 언론플레이를 했던 것은 ‘뭘 몰라서 그런 것’이라 치부될 수 있다. 미숙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김근태 전 대표나 현 당지도부의 노 대통령에 대한 이번 대응은 설사 이번 분양원가 논란이 잘 정리된다 할지라도 당의 고위인사들이 공개석상에서 대통령을 반박할 수 있다는 선례를 남긴 것”이라 밝혔다.
이 의원은 “대권 후보 경쟁이 현재 상황보다 더욱 구체화될 경우 청와대는 조기 대권 경쟁 가열을 막기 위해 애쓸 것이고 당내 잠룡들은 자신들의 정치적 입지를 고려한 행보를 취할 것이다. 이것이 지속적인 당·청 알력다툼 양상으로 번져나갈 경우 결국 현 정권과 여당 지지자들은 이번 재보선에서처럼 등을 돌리게 될 것”이라 우려를 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