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9월 8일 삼성 라이온즈 배영섭이 LG 투수 리즈의 헤드샷을 맞고 그라운드에 쓰러지는 모습. 사진제공=삼성 라이온즈
# 타격은 ‘두려움’과의 싸움
메이저리그 명예의 전당에 오른 야구기자 레너드 코페트는 유명한 저서 <야구란 무엇인가>(The Thinking Fan’s Guide to Baseball)의 첫 장을 ‘무서움’이라는 단어로 시작한다. 이유는 간단하다. 투수의 볼이 몸을 향해 날아오면 누구나 무의식적으로 피하기 마련이다. ‘맞으면 아프다, 다칠 수 있다, 피해야 한다.’ 이게 일반적인 의식의 흐름이다. 그러나 타자들은 다르다. 인간의 본능과 늘 맞선다. 날아오는 공을 피하는 대신, 눈을 똑바로 뜨고 정면으로 바라봐야 한다. 그래서 코페트도 “인간의 마음에 내재돼 있는 무서움이야말로 야구를 설명하는 첫 번째 화두가 돼야 한다”고 쓴 것이다. 한 야구 관계자는 제구력의 기복이 심하지만 빠른 공을 던지는 투수가 꾸준히 1군에 머무는 이유에 대해 “제구가 잘 되는 날은 빠른 공이 컨트롤까지 잘 되니 좋고, 제구가 잘 안 되는 날은 적어도 타자에게 ‘이 빠른 공이 어디로 날아올지 모른다’는 심리적인 불안감을 안길 수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삼성의 박석민이 롯데의 사도스키로부터 사구를 맞고 있는 장면. 사진제공=삼성 라이온즈
타자들의 공포는 절대로 ‘엄살’이 아니다. 실제로 머리에 공을 맞아 사망한 사례가 있다. 1955년 선린상고 야구부 소속이던 최운식이 비운의 주인공이다. 당시 한 일간지 보도에 따르면, 최운식은 경기고와의 경기 도중 3회 타석에서 머리 뒤쪽에 공을 맞고 졸도했다. 그러나 잠시 후 다시 일어나 6회까지 경기를 뛰었다. 학교 측도 주전 선수였던 최운식의 투지를 굳이 말리지 않았다. 최운식은 결국 6회가 끝난 뒤 다시 기절했고, 깨어나지 못한 채 다음 날 세상을 떠났다. 처음 쓰러졌을 때 병원에 보내지 않고 방치했던 학교 측에 비난이 쏟아졌던 것은 물론이다.
메이저리그에서도 1920년 레이 채프먼이 빈볼에 맞아 두개골 골절로 숨진 전례가 있다. 당시 타자들은 타석에서 헬멧을 쓰지 않아 피해가 더 컸다. 한 스포츠심리학 교수는 “인간이 느끼는 공포의 수치를 1에서 10까지로 규정한다면 사구는 10에 가까운 극도의 공포를 유발한다. 사구를 경험한 선수들이 다시 타석에 섰을 때는 살해 위협을 당한 것과 맞먹는 공포를 체험하기도 한다”고 역설했다.
# ‘검투사 헬멧’ 이렇게 탄생했다
사구로 인한 사고는 끊임없이 반복됐다. 이제는 은퇴한 KIA의 레전드 이종범을 비롯해 SK 김상현, KIA 김선빈, NC 이종욱, 삼성 조동찬 등이 모두 공에 얼굴을 맞아 큰 부상을 경험했던 선수다. 그 가운데서도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 ‘헤라클레스’ 심정수다. 그는 현대 소속이던 2001년 롯데 강민영의 직구에 맞아 광대뼈가 함몰됐다. 한동안 경기에 나서지 못했다. 이때 그 유명한 ‘검투사 헬멧’이 탄생했다. 당시 현대 운영팀 과장이던 염경엽 넥센 감독이 얼굴 아랫부분을 덮는 헬멧을 직접 제작해 심정수에게 씌웠다. 미국과 일본에서도 볼 수 없었던 사실상의 특허품. 이후 얼굴에 공을 맞았던 다른 타자들도 비슷한 헬멧을 착용하고 복귀해 화제가 됐다. 심정수는 2년 뒤 다시 한번 얼굴에 공을 맞는 불운을 겪었는데, 염 감독은 “심정수가 곧바로 다음 경기에 나가겠다는 투지를 보이는 바람에 밤을 새워 수작업으로 헬멧을 다시 제작해 주기도 했다”고 귀띔했다.
6월 18일 SK 레이예스가 삼성의 박석민에게 고의성 짙은 헤드샷을 던져 퇴장당했다. 방송캡처
# 조성환 사구와의 악연
2010년 8월 24일 롯데 조성환이 기아 윤석민의 공에 머리를 맞아 쓰러졌다. 연합뉴스
두려움은 기본적으로 무의식의 깊은 곳에서 나온다. 몸쪽으로 공이 날아오면, 머리로는 ‘안 맞는다’는 걸 알면서도 몸이 먼저 뒤로 물러나거나 반대로 경직된다. 조성환은 2010년에도 타석에서 KIA 윤석민의 볼에 다시 머리를 맞아 뇌진탕 증세를 겪었는데, “평소 같으면 충분히 피할 수 있는 공이었는데 마음과 다르게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고 회상했다.
그렇다면 조성환은 어떻게 사구의 공포를 이겨내고 올해까지 선수 생활을 했을까. 그는 “이상한 얘기 같겠지만, 상대 투수를 믿는 게 최선”이라고 했다. ‘상대 투수가 나를 절대 맞힐 리 없다’는 굳은 믿음이 필요하다는 얘기다. 끊임없는 마인드 컨트롤의 연속이다. 그는 또 “타석에 서는 순간마다 늘 두려웠지만, 우리 팀 팬들은 물론 상대 팀 팬들까지 박수로 응원해주는 모습을 보면서 용기를 얻고 힘을 냈다”고 덧붙였다. 몸으로 얻은 병을 마음으로 치유한 셈이다.
배영은 스포츠동아 기자 yeb@donga.com
사구 안 맞아도 문제? KS서 몸사린 강동우 역적 아닌 역적 됐다 현대와 삼성은 2004년 한국시리즈에서 세 차례의 무승부 끝에 9차전까지 이어지는 혈투를 펼쳤다. 프로야구 포스트시즌 역사에서 손에 꼽히는 명승부였다. 그러나 한 선수는 이때 잘못 피한 공 하나 때문에 두고두고 상처를 받았다. 빈볼을 피해 논란을 겪은 바 있는 강동우(위)와 이여상. 강동우는 한동안 그 일로 팬들의 거센 비난을 받았다. 1년 뒤에는 다른 팀으로 트레이드까지 됐다. 그러나 강동우가 1998년 무릎에 큰 부상을 당해 몇 년간 후유증에 시달렸던 사실을 아는 동료들은 쉽게 그를 손가락질하지 못했다. 한 베테랑 선수는 “투수의 공이 날아오는 찰나의 순간, 머리보다 몸이 먼저 반응할 수밖에 없다”고 옹호했다. 2011년에도 한화 이여상이 비슷한 경험을 했다. 동점으로 맞선 9회말 만루 상황에서 무심코 몸쪽으로 날아오는 공을 피했다. 그대로 서 있었다면 배에 맞았을 공이었다. 이여상 스스로도 자신이 피했다는 사실에 놀랐다. 배트로 헬멧을 내리치며 아쉬워했다. 그러나 당시 한화 사령탑이던 한대화 감독은 이여상을 감쌌다. “이여상이 충분히 팀에 미안해하고 자책하는 모습을 보였다”며 “그런 상황에서 공을 피한 뒤 당당하게 ‘왜 내가 맞아야 하느냐’는 태도를 보이는 선수는 솔직히 좋아 보이지 않는다. 그렇지만 날아오는 공을 피한 것 자체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한화의 한 선수도 “본능적으로 공을 피한 당사자는 굉장히 미안하겠지만, 타석에 서본 사람은 누구도 그를 비난할 수는 없다”며 “사실 용감하게 공에 맞는 선수도 ‘맞겠다’고 처음부터 작정한 게 아니다. 마찬가지로 피한 선수도 피하려고 작정했던 게 아니라는 걸 모두 알고 있다”고 했다. [은] |
맞힌 투수도 아프다 윤석민 한때 ‘멘붕’으로 2군행 맞은 사람만 아픈 게 아니다. 던진 사람도 마음이 아프다. 자신의 공에 맞은 선수가 크게 다치기라도 하면, 투수 역시 몸쪽 공을 던지는 데 두려움이 생긴다. 해태 출신의 한 코치는 “최고의 투수였던 KIA 선동열 감독도 현역 시절 사구가 나온 후에는 며칠 동안 몸쪽 공을 많이 안 던졌다”고 증언하기도 했다. 실제 사례도 있다. 볼티모어 윤석민은 KIA 시절이던 2010년에 자신이 던진 사구로 인해 한동안 정신적인 공황 상태에 시달렸다. 당시 롯데 소속이던 홍성흔이 윤석민의 공에 왼쪽 손등을 맞아 골절상을 입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조성환이 또 다시 타석에서 머리를 맞았기 때문이다. 조성환이 뇌진탕 증세로 실려 나가는 동안, 마운드에 우두커니 서 있던 윤석민에게 롯데팬들이 물병을 던지기 시작했다. 윤석민이 다시 공을 던지려 하자 “내려가!”라는 야유가 쏟아졌다. 윤석민이 경기 후 롯데 더그아웃과 관중석을 향해 고개 숙여 사과했는데도 소용없었다. 경기가 끝난 뒤에는 롯데팬들이 KIA 선수들에게 달려들었다. 김선빈이 한 팬이 휘두른 물체에 왼쪽 어깨를 맞았고, 격분한 최희섭과 그 팬 사이에 몸싸움이 벌어졌다. 김선빈은 결국 통증으로 다음날 경기에 결장했다. 인터넷에서는 롯데와 KIA 팬들이 지역감정을 운운하며 격한 감정싸움을 펼쳤다. 오히려 공을 맞은 조성환과 당시 롯데 제리 로이스터 감독이 나서서 “경기 중에 충분히 벌어질 수 있는 일이다. 윤석민을 너무 비난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감쌀 정도였다. 윤석민은 자신의 실투 하나로 벌어진 사태들을 보며 점점 더 위축됐다. 결국 스트레스를 이기지 못하고 어지럼증까지 호소했다. 병원에서 심리 치료도 받았다. 1군 엔트리에서 제외돼 한동안 2군에 머물렀다. 윤석민의 어머니가 조성환이 입원한 병원을 직접 찾아가 사과했을 정도로 마음을 썼다. 그러나 윤석민이 상처를 치유하는 데는 시간이 더 필요했다. 결국 그해 6승을 따내는 데 그쳤다. 머리에 공을 맞고 경기 도중 들것에 실려 나온 경험이 있는 C 선수는 “맞은 당시에는 솔직히 원망스러운 마음이 컸지만, 나를 맞힌 투수가 그 이후 한동안 슬럼프에 빠지는 모습을 보고 나 역시 마음이 안 좋았다”며 “투수와 타자 모두에게 안 좋은 기억이 남는 것 같다”고 했다. 또 앞서의 B 투수는 “시즌 막바지라면 비시즌 동안 어느 정도 회복할 여유가 있지만, 시즌 초반에 그런 트라우마가 찾아오면 마음이 약한 선수는 한 시즌 내내 어려움을 겪을 수 있다”며 “특히 이전에 위험한 부위를 맞혔던 당사자가 타석에 나왔을 때 투수의 부담감은 더 커진다”고 귀띔했다. [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