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노무현 대통령이 지난 6월23일 오전 김선일씨 피살과 관련해 대국민담화를 발표하는 모습. 최근의 위기는 집권 1년차 때의 ‘난조’와는 그 차원이 다르다는 분석이다. 임준선 기자 kjlim@ilyo.co.kr | ||
헌법재판소 탄핵안 기각 결정-직무복귀(5월14일)를 계기로 ‘힘있는 대통령’으로 강력한 리더십을 구사할 것이란 당초 예상과 달리 대내외 악재가 연발하면서 정권의 기반이 흔들리고 있기 때문이다. 4·15 총선에서 열린우리당이 원내 과반 1당이 되자 향후 국정운용에 아무런 거칠 것이 없으리란 예상과는 그야말로 백팔십도 다른 상황이 전개되고 있는 것이다.
실제 대통령의 권능을 회복한 5월 중순 이후 노 대통령에겐 모든 일이 꼬이기만 할 뿐 제대로 풀리는 일이 하나 없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총리 지명과 개각을 둘러싼 여권 내 불협화음을 시작으로 아파트 분양원가 공개와 검찰개혁 등을 둘러싼 당청(黨靑)-당정(黨政)-청검(靑檢) 갈등, 6·5 재보선 참패에 행정수도 이전 논란 등이 겹쳐지면서 그야말로 ‘바람 잘 날 없는’ 나날이 계속됐다.
대외적으로도 노 대통령의 발목을 잡는 일들이 계속되고 있다. 우선 헌재의 탄핵안 기각결정이 내려지자 마자 미국 정부가 주한 미 2사단 병력 4천 명을 이라크로 차출하겠다고 통보해 오면서 주한 미군 감축-안보 공백 논란이 불거졌다. 이어 이라크 현지 사정이 악화되면서 파병에 대한 찬반 격론이 가열되더니 급기야 6월23일 미군 군납업체인 가나무역 직원 김선일씨가 무장단체에 의해 피살되면서 정권을 궁지에 모는 상황이 벌어졌다.
일련의 과정을 통해 노 대통령이 치른 대가는 엄청났다. 여권 내 난맥상이 두드러지면서 열린우리당의 지지율은 30%대 초반으로 급락했고, 한때 40%를 넘나들던 노 대통령의 국정수행 지지율은 20%대(28.2%, MBC-코리아리서치 6월25일 조사)로 떨어졌다. 여권 한 관계자는 이를 두고 “기나긴 ‘악재의 터널’에서 언제쯤 벗어날 수 있을지 가늠할 수조차 없을 정도”라며 한숨을 내쉬었다.
특히 김선일씨 피살 사건이 발생한 후 위기는 급격히 심화됐다. 노 대통령의 핵심 지지세력인 노사모에서까지 탈퇴자가 속출하는 등 네티즌들 사이에서 ‘반(反) 노무현’ 정서가 급격히 확산되는 전례없는 일들이 발생하기 시작한 것이다. 여기에 탄핵정국에서 ‘우군’ 역할을 해 왔던 시민단체들과 노동계도 ‘파병 반대’를 고리로 노무현 정권에 대한 지지철회 움직임을 보여 여권 핵심부를 긴장하게 만들고 있다.
문제는 노 대통령이 맞고 있는 최근의 위기가 집권 1년차 때의 ‘난조’와는 그 원인과 성격이 크게 다르다는 점이다. 2003년 2월 취임 후 3·12 탄핵사태까지의 과정이 ‘공룡 야당’ 한나라당과 일부 보수언론이 공동전선을 형성해 줄곧 ‘노무현 흔들기’를 한 것이 주요 측면이었다면, 이번 위기는 정권의 내재적 문제점에 한미 관계, 이라크 파병 등 대외분야에서의 ‘핫 이슈’가 겹치면서 발생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정이 이런 만큼 이 모든 현안 해결의 부담은 고스란히 노 대통령이 짊어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타고난 승부사’란 평가를 받아온 노 대통령도 이번엔 정면돌파를 고집하기가 여의치 않아 보인다. 정계 입문 이래 줄곧 정치적 적대 세력과의 대립구도를 명확히 그려냄으로써 위기를 기회로 반전시켜온 노 대통령이었지만, 작금의 상황은 그가 이제껏 경험하지 못한 새로운 시련이기 때문이다.
우선 노 대통령을 둘러싼 대내외 여건은 그야말로 ‘최악’이다. 가장 최근의 악재인 김선일씨 피살 사건과 관련해선 정부의 정보력-협상력 부재에 대한 비판 차원을 넘어, 외교-안보라인의 은폐 의혹 등 도덕성의 문제로까지 파문이 확산된 상태다. 특히 외교부가 6월 초 AP통신이 김씨 피랍사실에 대해 문의한 사실에 적절하게 대응하지 못한 사실이 뒤늦게 확인되면서 정권의 기반이 뒤흔들리고 있다는 평가가 나오고 있다. 열린우리당 한 중진은 “잘못하면 외교부가 정권 전체를 말아먹게 생겼다”며 탄식할 정도다.
여권 핵심부는 외교·정보라인의 도덕성과 능력, 자질 시비가 앞으로 확대 재생산될 것이란 데 곤혹해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노 대통령이 24일 감사원에 AP통신 문의 묵살 사건에 대해 외교부와 국가정보원, 국방부 및 NSC(국가안전보장회의) 사무처에 대한 조사를 요청했지만 논란은 좀처럼 사그라들 조짐을 보이지 않고 있기 때문. 특히 여야가 6월30일부터 한 달간 김선일씨 사건에 대한 국정조사를 실시하기로 함에 따라 앞으로 이번 사태와 관련해 어떤 악재들이 추가로 돌출할지 가늠조차 할 수 없는 형편이다.
▲ 문재인 시민사회수석 | ||
이와 관련, 열린우리당 내 노 대통령의 한 측근 의원은 “노 대통령이 그동안 한나라당 보수세력의 집중적인 문제 제기에도 불구하고 ‘대등한 한미관계’ ‘협력적 남북관계’를 주장해온 이 차장을 중용해 왔는데 이번 사태로 경질 압력이 거세질 것”이라며 “야당은 물론 여권 내에서조차 현재의 외교·안보라인을 전면교체해야 한다는 주장이 적지 않아 노 대통령으로선 고민이 클 것”이라고 말했다.
8월로 시기가 결정된 이라크 파병에 대한 반대 여론이 김선일씨 사건을 계기로 급확산되고 있는 것도 노 대통령 등 여권 핵심부의 마음을 무겁게 하고 있는 사안이다. 실제 MBC-코리아리서치 여론조사(6월25일)에 따르면 이라크 추가파병에 반대하는 의견은 56.5%에 이른 반면 찬성은 40.7%에 그쳤다. 특히 추가파병 반대자 중 14.5%는 김선일씨 사건을 계기로 파병 찬성에서 반대로 돌아선 반면, 파병을 반대하다가 찬성으로 돌아선 의견은 5.8%에 불과해 김씨 사건이 파병 반대 여론에 결정적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입증했다.
여권 핵심부를 더욱 곤혹스럽게 하는 것은 김선일씨 사건-파병 반대론 확산의 과정에 지지세력의 이탈 현상이 두드러지고 있다는 점이다. 이미 총리 지명-개각 논란, 아파트 분양원가 공개를 둘러싼 혼선 등으로 ‘탈(脫) 노무현’ 조짐을 보였던 지지층들이 이번 사건을 계기로 급격히 여권에 등을 돌리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 가운데 노 대통령의 절대지지층의 상징인 노사모 회원 중 탈퇴자가 급증하고 있는 것은 여권에 큰 충격을 던져줬다. 노사모의 홈페이지(www.nosamo.org) 게시판에는 김선일씨가 피랍된 6월21일 이후 매일 많게는 2천여 건에 가까운 의견이 게시되고 있고 이중엔 노 대통령에 대한 실망감을 표시하며 탈퇴를 선언한 이들이 적지 않다.
“노사모가 맹목적 대통령 지지세력이 되는 우를 범하지 말자. 이제는 노무현이 싫어졌다”(golegogi), “아무래도 탈퇴해야 겠다. 더 이상 노무현을 사랑할 수 없다”(youan1)는 등의 글들이 심심찮게 발견되고 있는 상황이다.
여권 핵심부도 김선일씨 사건을 정점으로 한 일련의 악재를 제대로 수습하지 못할 경우 정권의 지지기반이 크게 허물어질 것이란 지적에는 대체로 공감하고 있다. 노 대통령에 대한 국정지지율이 ‘심리적 마지노선’이라는 30%를 하향돌파할 만큼 심각한 상황에 이른 만큼 특단의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져가고 있다.
문제는 여권이 국면 타개를 위해 활용할 카드가 마땅치 않다는 점이다. 당장 개각만 해도 노 대통령이 당장 이달 말 개각을 통일·보건복지·문화관광부 등 3개 부처 장관에 한정하고, 외교·안보라인 교체 여부는 감사원 조사 결과가 나온 뒤에 검토하겠다고 밝혀 ‘국정쇄신용’으로 쓰긴 어렵게 됐다.
청와대 핵심 관계자는 “국면 전환을 위한 개각은 철저히 배제한다는 노 대통령의 생각엔 변함이 없다”고 밝히고 있지만, 여권 일각에선 청와대의 상황인식이 지나치게 안이한 것이 아니냐는 지적이 나오고 있는 상황이다.
열린우리당 내에선 당면한 위기는 결국 개혁 노선의 강화로 풀어야 한다는 주장이 많다. 김선일씨 사건도 결국은 정부 관료들의 무사안일과 기강 해이에서 비롯된 만큼 공직 사회 전반에 개혁 드라이브를 강화해 여권 핵심부가 정부 부처-기관 장악력을 높여야 한다는 논리다. 당장 열린우리당은 ‘외교·안보 시스템 개선 정책기획단’을 구성해 대대적인 문책과 기구 개편 작업을 벌이겠다고 나선 상황이다.
주목되는 것은 여권 핵심그룹 내에서 공직사회 개혁 드라이브와 맞물려 현재의 청와대 비서실을 인적·시스템적으로 전면 개편해야 한다는 공감대가 확산되고 있다는 점이다. 관료화된 청와대가 지금처럼 제어·감독 기능이 없는 상태에서 각 부처에 일방적으로 재량권을 줬다가는 김선일씨 사건처럼 ‘구멍’이 발생할 여지가 높기 때문에 대(對) 정부 장악력을 높이는 방향으로 시스템을 바꿔야 한다는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인적 구조도 현 김우식 비서실장을 중심으로 한 현재의 관리형 체제 대신 노 대통령과 운명을 함께할 인사에 비서실을 맡겨 ‘실세화’ 해야 한다는 얘기다. 노 대통령 측근그룹에서 “문재인 시민사회 수석이 하루라도 빨리 비서실장을 맡아 충성도 높은 인사들을 전면배치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는 것도 같은 맥락이라 하겠다.
이준원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