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은이 한 달이 넘도록 공개석상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자 경미한 건강이상설부터 쿠데타설까지 다양한 루머들이 곳곳에서 터져 나오고 있다. 연합뉴스
군부가 이처럼 일촉즉발의 군사도발을 해상과 육상에서 잇따라 벌이자 평양 권력에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진 것 아니냐는 관측이 이어졌다. 모험주의적인 군부의 도발본능을 제어할 권력이 흔들리고 있는 것이란 얘기였다. 김정은의 통치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틈을 타 군부가 대립각을 세웠다는 분석도 제기됐다.
지난 4일 인천아시안게임 폐막식 참석을 이유로 방한했던 황병서 북한군 총정치국장 일행의 행보에도 다시 관심이 쏠렸다. 황병서와 최룡해 노동당 비서, 김양건 당 통일전선부장(대남 담당) 등 실세 3인방의 깜짝 방문에는 김정은 건강이상설 확산을 차단하기 위한 포석도 깔려있다는 분석이 뒤늦게 나왔다. 이벤트성 방문에 남북 당국대화 재개라는 카드까지 꺼내 이슈를 주도한 뒤, 곧바로 군사도발로 국면을 전환하는 전술을 선보이고 있다는 측면에서다. 김양건 부장은 류길재 통일부 장관과의 면담 때 “김정은 건강에 이상이 없다”는 메시지를 전달해 이런 의도를 드러내기도 했다.
물론 북한 권력 핵심부는 표면적으로 이상이 없어 보인다. 무엇보다 조선중앙TV나 노동신문 등 관영 선전매체에 특별한 징후가 드러나지 않고 있다는 게 대북부처 관계자의 귀띔이다. 김정은의 신변에 이상이 생겼거나 군부에 의해 권력이 장악됐다면 이들 매체의 보도에서 뭔가 감지됐을 것이란 말이다. 김정은의 스위스 유학 시절 현지 대사로 후견역할을 한 리수용 북한 외무상이 유엔회의에 참석하고, 10일까지 러시아 등지를 방문하고 돌아간 것도 권력에 이상이 생겼다면 있을 수 없는 일이란 주장도 ‘평양권력 이상 무’ 관측 쪽에 손을 들어주고 있다.
하지만 반론도 만만치 않다. 북한 체제의 특성상 권력 내부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기 어렵다는 점에서다. 겉으로 드러난 것만으로 김정은 유고설을 근거 없는 것으로 평가하는 건 문제란 지적이다. 김일성과 김정일의 사망 때 이를 북한 발표보다 앞서 감지해낸 서방 정보기관이 없었다는 점에서 진짜 김정은 신병에 어떤 문제가 생겼는지는 예단하기 힘들다는 것이다.
건강이상설로 시작된 김정은 관련 소문이 한국은 물론 미 백악관과 중국의 관영매체까지 나선 부인에도 불구하고 가라앉지 않고 있는 것도 전에는 보기 힘들었던 이상한 현상이다. 북한 관련 루머는 통상 증시 등에서 반짝 등장했다가 당국의 해명이나 전문가들의 반론에 의해 수그러드는 게 관례다. 그런데 이번엔 다른 패턴이다.
김정은 권력공백은 9월 3일 평양에서 열린 모란봉악단 공연 관람 이후부터다. 부인 리설주까지 동반한 행사 때 김정은의 건강은 이상 없어 보였다. 그렇지만 그의 공개활동 중단이 한 달 가까워진 지난달 말 이상설이 불거지기 시작했다. 중국의 네티즌들 사이에서 “군부에 의한 쿠데타가 발생해 김정은이 실각했다”는 얘기가 돈 것이다. 후계구도에서 밀려났던 그의 친형 김정철에 대한 신변보호가 시작됐다는 말까지 나왔다. 김정은을 대체할 이른바 ‘백두혈통’(김일성·김정일 일가의 핏줄)으로 정철이 옹립됐다는 주장이었다. 하지만 군부 쿠데타를 주도한 것으로 지목된 인물이 ‘조명록 군 총정치국장’으로 제시되면서 신빙성이 의심이 갔다. 조명록은 이미 2010년 사망한 것으로 드러났기 때문이다.
한동안 수그러지는 듯하던 소문은 지난주 다시 중국 네티즌과 서울의 증권가 사이에 퍼지면서 평양 쪽으로 시선을 끌어 모았다. ‘그럴싸한 중국발 정보’란 제목의 한 유고설은 SNS를 통해 급속하거 번졌다. 김정은이 수술실패로 뇌사에 준하는 심각한 상태에 빠졌고 정상적으로 돌아오기는 불가능하다는 요지였다. 김정은의 여동생 김여정이 백두혈통이기 때문에 표면에 등장할 확률이 높다는 점도 덧붙여졌다.
눈길을 끈 건 “아시안게임 때 방한한 실세 3인방이 현재 전권을 행사하고 있다”는 대목이었다. 북한 주민의 동요라든가 다른 내부 세력의 준동을 막기 위해서 평양에 계엄령이 내려졌다는 상황까지 매우 구체적으로 더해졌다. 북한 문제를 다뤄온 우리 정부 당국자도 “김정은 유고설과 관련한 중국내 동향이나 우리 진보세력의 동향까지 정말 ‘그럴싸하게’ 담고 있다”며 “사실관계를 떠나 구체성을 띠고 있는 점 등으로 볼 때 북한문제나 관련 동향에 상당한 지식과 정보가 있는 사람이나 집단에 의해 작성된 것으로 판단된다”고 평가할 정도였다.
지난 4일 황병서(사진), 최룡해, 김양건 등 북한 최고위급 3인방의 깜짝 방남을 두고 ‘김정은 건강이상설’ 확산을 차단하기 위한 포석이 깔려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사진공동취재단
베일에 싸여있는 평양 권력핵심부의 상황은 몇 가지 시나리오가 가능하다.
첫째, 군부 쿠데타의 발생으로 김정은이 사실상 축출됐거나 연금됐을 상황이다. 김정은의 잦은 숙청과 강등을 비롯한 군부 홀대에 반발한 군부 원로세력과 신진간부들이 반기를 들었을 것이란 얘기다. 이럴 경우 군부 최고실세인 황병서를 정점으로 인민무력부장(우리 국방장관)인 현영철, 총참모장 리영길 등이 주도세력일 가능성이 높다. 오극렬 국방위 부위원장 등 원로들은 후원역할을 담당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여기에 김정은 집권 직후인 2102년 여름 숙청된 리영호 전 총참모장과 추종세력 등이 가세했을 것이란 추론도 제기된다.
이럴 경우 일정 기간이 지난 후 군부는 새로운 지도자로 누굴 옹립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대두할 수 있다. 김정은의 친혈육인 형 정철 등이 거론될 수 있지만 김정은 로열패밀리 내에서의 권력 이양이 또 다른 갈등을 부를 수 있다는 후유증이 남는다. 물론 군부가 집단지도체제로 가거나 제3의 인물이 등장하는 것도 가능하다. 하지만 70년 가까이 김일성 혈족에 의한 세습통치와 수령우상화에 익숙해진 주민들을 어떻게 설득하느냐가 문제로 제기될 수 있다.
둘째, 김정은의 건강이 심각한 상황에 빠져 대안을 강구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실제 이런 상황이라면 북한 군부와 노동당의 핵심 세력은 유고상황을 절대비밀로 한 채 대책마련에 집중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북한 TV나 노동신문에도 이상 징후가 감지되지 않을 것이란 얘기다. 이들 세력이 김일성의 카리스마에 기반을 둔 세습권력을 그대로 유지하는 게 유리하다고 판단하면 김정은의 형제 중에서 후임자가 선택될 수 있다. 김정일의 여동생 김경희 당 비서가 권력을 잡게 되면 오랜 노하우 때문에 정권안정에는 유리할 수 있겠지만, 남편인 장성택 처형에 앞장섰던 김정은 주변의 실세들과 불편한 관계일 것이란 점이 장애물이다. 김정은의 형 김정철과 여동생 김여정까지도 후보군으로 가능하다. 경우에 따라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장남이자 김정은의 이복형인 김정남을 새 수령으로 앉힐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이런 상황은 김일성과 김정일로 이어지는 백두혈통을 이어간다는 점에서 부담은 적지만, 이들의 카리스마가 주민들의 호응을 얻을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셋째, 김정은의 건강이 생각보다 심각하지 않아 일정한 치료기간을 지나 권력에 복귀하는 경우다. 2008년 여름 뇌졸중으로 식물인간 상태에 빠졌던 것으로까지 전해진 김정일이 그해 11월 불편한 몸이지만 공개활동을 재개한 것과 유사한 상황전개다. 이런 국면이 되면 김정은은 자신의 귀환을 체제안정과 리더십 공고화에 적극 활용하는 전술을 구사할 수 있다. 이런저런 소문에도 불구하고 ‘화려한 복귀’를 보여줌으로써 “우리 원수님(김정은을 지칭)은 쉽게 쓰러지지 않는다”는 메시지를 주민들에게 던질 수 있다는 점에서다. 우리 정부가 이런 상황에 대비해 김정은 유고설의 관리와 후속대책에 만전을 기해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김정은의 권력공백은 북한 지도부에 매우 당혹스런 일이다. 김정은이 후계자로 본격 등장한 2010년께부터 그의 신변보호에 심혈을 기울여왔다는 점에서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사망한 이듬해 12월엔 최고 권력자로 자리한 김정은의 경호가 최고수준으로 격상됐다. 김정일 시신을 찾아 조의를 표하던 김정은 옆에 권총을 찬 무관이 밀착해 뒤따를 정도였다. 그만큼 북한 권력 핵심층에선 “김정은에게 문제가 생기면 체제가 무너진다”는 절박감이 작용한 것이다. 이후 군부대를 방문하는 등의 공개활동 때에는 전투헬멧 차림에 기관단총까지 갖춘 무장 경호원들이 건물 곳곳에 배치되고 근접경호까지 담당하는 상황이 TV영상을 통해 포착되곤 했다. 김정은 경호를 전담하는 호위총국 제1국 요원들이란 게 우리 정보 당국의 판단이다.
북한이 김정은을 지칭하는 이른바 ‘최고존엄’ 지키기에 올인하는 건 최고지도자를 제거하거나 체제를 전복하려는 움직임이 심심찮게 있어왔다는 점 때문이다. 정보 당국 관계자는 “구체적으로 확인되지 않지만 북한 내부에서 최근까지도 이런저런 반체제 움직임과 관련한 첩보들이 입수되고 있다”고 말했다.
북한군 친위대의 고위 장교가 부대방문 중인 김정일에게 총격을 가하려 했다거나 차량으로 밀어붙였다는 소문 등이다. 김정은 집권 이후에도 피격설이나 교통사고 사망설 등이 서울을 비롯한 국제 증권시장 등에 나돌아 주변국 정보기관을 긴장시키기도 했다. 장성택이 권력실세로 군림할 때는 그의 아들이 최고지도자를 권총으로 저격했다는 그럴 듯한 스토리까지 나돌았다.
이번 유고설은 3년차에 접어든 김정은의 리더십을 시험대에 올려놓았다. 단순한 건강 이상이라고해도 노동당 창건 기념행사나 김일성 시신 참배와 같은 체제유지에 핵심적인 이벤트에 불참할 상황까지 만든 건 문제란 얘기다. 자칫 공백이 장기화하면 주민들뿐 아니라 체제 핵심 세력들 사이에서도 김정은의 통치력에 대한 의문이 제기될 수 있다.
김정은의 올해 나이는 30세다. 유고설은 사실이 아닌 것으로 밝혀진다 해도 건강이상 소문에 휩싸이기엔 너무 이른 나이다. 이런 사정 때문에 이번에 정상적으로 복귀한다 해도 향후 통치에 적지 않은 상처를 입을 것이란 전망도 제기된다.
김성진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