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강남 개포동 구룡마을의 전경. 초라한 외관과는 달리 타워팰리스와 도로 하나 사이에 두고 있는 이곳은 마지막 남은 금싸라기 땅으로 불린다. | ||
타워팰리스와 도로 하나를 사이에 두고 인접해 있는 구룡마을은 초라한 외관과는 달리 강남에서 마지막 남은 ‘금싸라기’ 땅으로 불린다. 때문에 지난 99년부터 개발업자들이 이곳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면서 주민들 간에 심한 갈등을 빚어오다 급기야는 이번과 같은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일요신문>은 한때 한동네 주민들이 벌써 10년째 얼굴을 붉히며 살게 된 구룡마을의 상황을 파헤쳐봤다.
한동안 머뭇하던 장맛비가 쏟아지기 시작한 지난 2일 오전. 타워팰리스와 도로 하나를 사이에 두고 위치해 있는 구룡마을의 모습은 궂은 날씨로 인해 더욱 우울해 보였다.
‘불법 주거지’라는 안내문을 붙여놓은 마을 입구의 입간판, 무너질 것 같은 판잣집,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해 있는 두 개의 마을 회관, 곳곳에서 마주치게 되는 ‘자율방범대원’ 등 수개월 전 기자가 이곳을 찾았을 때와 분명 같은 풍경들이었다.
하지만 얼마 전 벌어졌던 주민들 간의 격한 몸싸움 때문이었을까 분위기는 사뭇 달랐다. 정체가 불분명한 낯선 외지인을 향해 보내는 경계의 눈초리는 더 따갑게 느껴졌다. 곳곳에서 며칠 전 ‘전투’(?)의 흔적이 느껴졌다. 일부 훼손된 채 남아있는 마을회관들, 몇 집 건너마다 현관문에 붙어있는 ‘폐쇄조치’ 표시판. 분명 몇 달 전에는 볼 수 없던 것들이었다. 오래 전부터 재개발 열풍으로 몸살을 앓아온 이곳이었지만 이 같은 급작스런 변화는 없었다. 불과 몇 개월 사이에 구룡마을에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행정구역상으로는 서울시 강남구 개포동에 위치한 구룡마을은 88년 서울올림픽 준비가 한창이던 80년대 중반 도시미관 정화라는 정부의 정책에 떠밀려 온 빈민들이 모여살기 시작했다. 형편이 넉넉지 못한 사람들이 모여든 탓에 번듯하게 지어진 집들이 거의 없다. 이렇게 하나 둘 지어진 판잣집에 둥지를 튼 사람들이 어느 덧 총 2000여 세대 4000여 명이다.
적지 않은 주민들이 살고 있음에도 행정기관 서류상에서 이들의 존재를 찾아보기란 힘들다. 집들이 모두 무허가 건물인 탓에 건축물들이 등기가 되어 있지 않은 것은 물론이고 주민들 개개인의 주민등록도 이곳으로 되어 있지 않다. 정부에서 제공하는 공식적인 치안, 행정, 복지 서비스 등도 이들에게만큼은 예외다. 결과적으로 문서상에는 구룡마을 주민은 한 사람도 없는 셈이다.
‘복지혜택’은 둘째였다. 불법 거주지에 산다는 이유로 강남구청으로부터 토지변상금을 부과받기도 했었다. 관공서에서 여러 번 철거에 나설 때면 으레 주민들의 거센 저항에 부딪혔다.
주민들의 편의를 들어줄 만한 관공서가 없었기 때문에 주민들이 자치회를 만들었다. 하지만 이마저도 우여곡절 끝에 ‘마을자치회’와 ‘주민자치회’로 나뉘어졌다. 두 자치회는 한때는 중장비를 동원해 서로의 회관을 부술 정도로 갈등의 골이 깊다. 이번에 벌어진 몸싸움도 이 두 자치회 간에 일어난 것이다. 두 단체는 서로가 개발이익을 노린 투기세력이라고 비방하고 있다.
강남 속의 판자촌이란 ‘태생적’ 한계에다 그마저도 두 세력으로 갈라진 마을의 현실로 인해 구룡마을은 자주 언론의 조명을 받아왔다. 그렇게 가난하게 살았지만 적어도 재개발 열풍이 불던 99년까지는 살 만했다는 것이 한 아주머니의 씁쓸한 회상이었다.
“괜찮았지. 그 때는. 못 살아도 나눠줄 마음은 있었으니까.”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상황이 급격히 변하기 시작했다. 맞은 편 대치동에 타워팰리스, 센트레빌 등이 올라가던 지난 1999년 개발업자들은 대치동과 마주보고 있는 이곳에도 눈독을 들이기 시작했다. 대모산 자락에 위치한 이곳은 개발업자들의 눈에는 입지조건에 있어서는 인근 타워팰리스를 능가했다. 구룡마을의 땅 중 상당부분은 한보그룹 정태수 회장이 지난 1986년 사들인 곳이며 2004년까지는 군사시설 보호구역이었다. 개발 소식이 하나 둘 들리기 시작했다. 실제적인 움직임도 있었다.
▲ 강남구 개포동 구룡마을 주민자치회. | ||
이처럼 구룡마을이 개발될 움직임이 보이면서 주민들도 개발이 되면 뭔가 보상을 받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에 휩싸였다. 토지나 건물에 대한 법적인 권리는 없었지만 적어도 10년 이상을 살아온 만큼 주거권에 대한 최소한의 보상은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이었다.
하지만 주민들의 이런 기대감은 얼마가지 않아 분노와 냉소로 바뀌어갔다. 보상권을 노린 외지인들이 하나 둘 들어와 빈집에 살기 시작했다. 어느 때부터인가는 이곳과 어울리지 않는 외제 승용차도 마을 입구에서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었다. 이른바 ‘지분 쪼개기’도 성행했다.
외지인이 늘어나면서 개발이 된다면 정작 보상을 받아야 할 원주민들이 불이익을 볼 가능성이 생긴 것이다. 이때부터 이른바 ‘물딱지’라는 것이 등장했다. ‘물딱지’란 이 마을의 원주민임을 증명하는 일종의 확인증과 같은 것인데 나중에 이곳이 개발되면 원주민에게 우선적으로 주어질지 모르는 입주권을 받기 위한 ‘보증수표’로 통용되고 있다. 하지만 딱지가 발급됐을 때는 이미 외지인이 너무 많이 섞여있었다. 나중에는 딱지를 사고파는 일들도 벌어졌다. 이곳에 들어온 지 오래됐다는 한 노인은 ‘딱지는 말만 들었지 나는 구경도 못해봤다’고 말했다. 자치회의 정통성을 주장하는 양쪽 자치회에서는 이 딱지문제로도 팽팽하게 맞서있다.
한동안 잠잠했던 구룡마을에 물리적인 충돌이 일어난 것은 몇 개월 전부터 다시 ‘개발’ 움직임이 움텄기 때문이다. 이 지역 지주인 정 아무개 씨가 얼마전 주민자치회 소속 주민 398명에게 땅을 매매함과 동시에 관리 기관에 처분신탁을 한 것이다. 한 마을 주민은 주민자치회의 이런 움직임이 ‘개발을 전제로 한 것’이라고 말했다. 이런 움직임이 일어나면서 ‘이번에는 진짜 개발될 것’이란 소문이 퍼져가기 시작했고 다시금 ‘물딱지’나 ‘판잣집’이 거래될 조짐도 나타났다. 실제로 딱지만 받아놓은 채 거주하지 않는 경우도 부지기수다. 이에 주민자치회 측은 ‘부동산 투기꾼’들을 잡아낸다는 명목 아래 빈집에 ‘폐쇄조치’라는 가로막을 설치하는 등 솎아내기 작업에 나섰다. 이 과정에서 ‘주민자치회’ 관계자들과 이를 막아선 ‘마을자치회’ 관계자들 사이에 심한 몸싸움이 벌어진 것.
마을자치회 측은 멀쩡한 주민들을 투기꾼으로 몰아 마을 밖으로 쫓아낸 주민자치회 측에 이번 사태의 원인이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관할구청인 강남구청 측은 ‘구룡마을’이라 하면 손사래를 친다. 막상 어떤 식으로든 이 문제를 풀어나가려고 하면 가장 근본적인 문제인 원주민과 외부인 간의 구분이 거의 불가능하다는 벽에 부딪힌다. 주민등록도 없는 상태에서 시간이 너무 오래 흘렀기 때문이다. 두 개의 자치회도 서로가 정통성을 주장하고 있어 주민들과의 대화채널을 단일화하기 어렵다. 불법 거주자란 이유로 주민등록을 받지 않은 관공서의 행정이 부메랑이 되어 돌아온 셈이다. 현재 강남구청 측은 이대로 두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민간개발은 허용하지 않겠다는 계획을 세우고 있다. 민간개발을 한다면 땅을 가지고 있는 지주들과 투기세력만 득을 볼 뿐 설사 원주민들에게 입주권이 주어져도 실제 입주 가능한 능력을 가진 원주민은 거의 없다고 보고 있다.
결국 구룡마을은 마을 구성원들과 관공서의 특단의 대책이 없으면 해결의 실마리를 찾기 거의 어려운 상태다. 오히려 시간이 지나면 상황이 더욱 복잡해질 가능성이 높다. 여름에는 위생의 사각지대에 머물러 있으며 겨울에는 여전히 연탄을 사용해야 하는 이곳 주민들을 계속 이렇게 살게 내버려둘 수도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선뜻 개발을 감행해 투기꾼들의 배만 불려줄 수도 없는 것이다. 강남구청 측의 고민은 끝이 없어 보였다.
박혁진 기자 phj@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