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섯 번 마운드에 오른 최동원
롯데 최동원은 1984년 한국시리즈에서 4승 투수라는 전무후무한 타이틀을 거머쥐었다. 7차전에서 혼신을 다해 피칭하는 모습. 연합뉴스
1984년 한국시리즈에는 오직 한 사람의 이름만이 존재했다. 롯데 에이스 최동원은 1·3·5·6차전에 이어 7차전에도 다시 마운드에 올랐다. 상대 선발은 5차전에 등판했던 삼성 김일융. 당시 롯데 강병철 감독은 과연 최동원을 7차전에 다시 써도 괜찮을지 고민을 거듭했다. 아무리 떨쳐내려 해도, 자꾸 최동원 카드에 미련이 남았다. 강 감독은 최동원의 아버지인 고(故) 최윤식 씨에게 의견을 물었다. 최 씨는 “사우나를 다녀온 뒤 생각해보자”고 했다. 부자(父子)의 결정은 결국 ‘출전’이었다.
최동원은 피로누적으로 제 컨디션이 아니었지만, 결코 무너지지 않았다. 팀도 에이스의 불꽃같은 투혼에 화답했다. 3-4로 뒤진 8회 1사 1·3루서 유두열이 김일융을 상대로 역전 3점포를 쏘아 올렸다. 롯데 팬들은 이후 경기와 상관없이 ‘아! 대한민국’을 연이어 합창했다. 1차전 첫 타자 장태수를 삼진으로 잡았던 최동원은 7차전 9회에도 다시 마지막 타자로 나온 장태수를 삼진으로 돌려세우면서 역대 가장 완벽한 ‘한국시리즈 4승’의 전설을 완성했다. 경기가 끝나 뒤 긴장이 풀린 최동원은 시상식 때 한국시리즈 MVP 부상으로 받은 승용차 위에서 연신 어깨를 만졌고, 우승 축하파티를 앞두고 결국 코피를 쏟았다.
#김동기 인천에 안긴 첫 가을의 승리
태평양은 1989년 정규시즌 3위에 올라 인천 연고팀으로는 사상 처음으로 포스트시즌에 진출했다. 그해 부임한 김성근 감독의 지시에 따라 한겨울에 오대산 얼음물에 들어가고 맨발로 눈 속을 걸었던 선수들에게는 그야말로 ‘고진감래’와도 같은 성과였다.
역사적인 첫 준플레이오프 상대는 삼성. 1차전부터 연장 14회까지 혈투가 펼쳐졌다. 그날 탄생한 영웅이 바로 포수 김동기였다. 김동기는 양 팀의 무득점 행진이 이어지던 연장 14회말 2사 2·3루서 힘차게 배트를 휘둘렀다. 타구는 당시 “동물원 같다”는 놀림을 받았던 인천 도원구장 외야 펜스의 철망까지 훌쩍 넘어 좌중간 끝내기 3점홈런으로 연결됐다. 오랜 시간 승리보다 패배에 익숙했던 인천팬들은 홈런 한 방이 만들어낸 가을잔치의 첫 승리에 열광했다. 이날 선발투수였던 박정현 역시 14이닝 동안 175개의 공을 던지면서 완봉승을 올렸다. 김동기는 포수 마스크를 쓰고 그 공을 모두 받았다.
#정명원 무결점 투구
정명원. 이종현 기자 jhlee@ilyo.co.kr
1996년 10월 20일. 현대 정명원이 한국 가을야구 역사상 가장 빼어난 투구로 전설의 반열에 올랐다. 정규시즌 내내 마무리투수로 활약했던 그가 해태와의 한국시리즈 4차전에 선발투수로 등판한 것부터가 놀랄 일이었다. 정명원은 해태의 스물아홉 타자를 상대로 안타 없이 4사구 세 개만 내주면서 삼진 9개를 잡아냈다. 7이닝 3안타 무실점으로 호투한 해태 이대진과의 팽팽한 투수전에서 확실한 우위를 점했다. 때마침 이날 정명원과 호흡을 맞춘 포수는 주전 장광호가 아닌 백업 김형남이었다. 해태 타선은 생소한 배터리의 생소한 볼배합에 속수무책으로 이리저리 흔들렸다. 그 사이 현대는 8회말에만 4점을 뽑아내며 4-0으로 이겼다. 정규시즌에도 보기 힘든 노히트노런이 1996년의 가을을 빛냈다.
#김상진의 마지막 승부
해태의 고졸 2년차 투수였던 김상진은 1997년 10월 25일 한국시리즈 5차전에서 인생 최고의 가을을 보냈다. 9이닝을 2안타 2볼넷 1실점으로 막아내면서 완투승을 따냈기 때문이다. 해태가 6-1로 승리해 통산 아홉 번째 우승을 달성한 날이었다. 2차전에서 3회를 못 넘기고 강판됐던 김상진은 아쉬움을 딛고 일어나 역대 한국시리즈 최연소 완투승 투수로 기록되는 기쁨을 누렸다. 그러나 그게 마지막 환희이자 영광이었다. 막 꽃을 피우려 했던 젊은 투수는 2년 뒤인 1996년 6월 10일, 만 22세 3개월 2일의 나이로 눈을 감았다. 위암 선고를 받은 지 8개월만이었다. 3년간 84경기에 등판했던 김상진의 통산 성적은 24승26패2세이브, 방어율 3.90으로 남았다.
#김광현 새로운 에이스의 탄생
SK 김광현은 2007년 두산과의 한국시리즈 4차전에서 7.1이닝을 무실점으로 막으며 승리투수가 됐다. KIA 나지완은 2009년 SK와의 한국시리즈 7차전에서 팀을 우승으로 이끄는 극적인 끝내기 홈런을 쳤다. 연합뉴스, 임준선 기자 kjlim@ilyo.co.kr
국가대표 에이스인 SK 김광현은 2007년 프로야구에 데뷔했다. 그러나 그가 마침내 환하게 빛나기 시작한 시기는 그해 가을이었다. 아마도 김광현의 야구인생에서 결코 잊을 수 없을 그날. 2007년 10월 26일 열린 두산과의 한국시리즈 4차전이었다. 시즌 3승 7패, 방어율 3.92를 기록한 고졸 신인 투수 김광현은 1차전에서 공 99개로 완봉승을 따냈던 두산 용병 다니엘 리오스를 상대로 선발 등판했다. SK 타선은 1회초 선취점을 올린 뒤 5회초 조동화-김재현의 연속타자 홈런으로 3점을 먼저 냈다. 김광현이라는 새로운 스타의 탄생을 위해 그 정도 점수면 충분했다. 김광현은 공 하나마다 힘과 패기를 모두 실어 던졌다. 6회말 1사 후 이종욱에게 단 한 개의 안타를 내준 게 전부. 7.1이닝 9탈삼진 무실점으로 두산 타선을 틀어막고 한국시리즈 첫 승리를 따냈다. 에이스로 태동한 김광현과 함께 2007년 SK의 운명은 ‘우승’으로 돌아섰다.
#끝내준 나지완
2009년 한국시리즈를 끝내는 홈런이 7차전 9회말에 터졌다. 32년간 딱 한 번 나왔고, 앞으로도 다시는 보기 어려울지 모를 명장면. 그 영예의 주인공이 바로 KIA 나지완이다. 당시 KIA와 SK는 3승 3패로 팽팽하게 맞선 채 운명의 7차전을 맞았다. 초반 상황은 한국시리즈 3연패에 도전한 SK의 분위기로 흘렀다. SK는 4회초 박정권의 2점홈런으로 포문을 연 뒤 5회초 1점, 6회초 2점을 추가해 5-1로 앞서갔다. 우승이 눈앞에 보이는 듯했다.
그러나 KIA의 기적이 시작됐다. 나지완이 6회말 2점홈런으로 추격의 시동을 걸었고, 7회말 안치홍의 솔로홈런과 김원섭의 적시타로 5-5 동점이 됐다. 마침내 찾아온 운명의 9회말. SK 마운드에는 6차전에도 등판했던 채병용이 서 있었다. 1사 후 타석에 들어선 나지완은 볼카운트 2B-2S서 채병용의 높은 직구를 힘차게 걷어 올렸다. 나지완과 KIA, 그리고 한국 프로야구가 평생 잊지 못할 타구 하나가 잠실구장 좌중간 하늘을 갈랐다. 타이거즈는 KIA로 이름을 바꾼 뒤 처음으로 통산 열 번째 한국시리즈 우승컵을 들어 올렸다.
배영은 스포츠동아 기자 yeb@donga.com
무적군단 해태 가을야구 비화 헐! 포상금 대신 제과세트 받았다 1990년대 최고의 투수로 이름을 날렸던 현대 정민태는 “해태 타이거즈의 붉은색 유니폼만 봐도 왠지 주눅이 들어 기싸움에서 밀렸다”고 했다. 1983년부터 1997년까지 무려 아홉 번이나 한국시리즈 우승을 차지한, 그야말로 ‘전설’의 팀. 프로야구 33년 역사에서 명실상부한 최고․최강의 팀이 바로 해태다. 해태 역사의 베스트 라인업은 올스타전 못지않게 화려하다. 일단 아홉 번의 우승을 모두 이끈 김응용 감독이 프로야구 역대 최다승 사령탑이다. 마운드에서는 선동열, 이강철, 조계현, 이대진, 김정수, 문희수 등이 위용을 자랑하고, 포수 장채근이 이들과 배터리를 이룬다. 내야는 1루수 김성한, 2루수 홍현우, 유격수 이종범, 3루수 한대화로 꾸려진다. 외야는 좌익수 김일권, 중견수 이순철, 우익수 김종모가 맡는다. 지명타자는 프로야구 초대 홈런왕 김봉연. 수많은 야구 관계자들이 “아무리 요즘 강팀이라 불리는 팀들도 해태와는 비교할 바가 못 된다”고 말하는 이유다. 특히 1993년에는 선동열, 조계현, 송유석, 김정수, 이강철, 이대진까지 한 팀에서 10승 투수 여섯 명을 배출했다. 당연히 지금까지 깨지지 않은 역대 최고 기록이다. 당시 멤버들 대부분이 지금은 여러 팀으로 흩어져 지도자 생활을 하고 있는데, 하나같이 “돌이켜 보면 그때 우리는 참 대단했다”고 입을 모은다. 김종모는 “해태는 시즌 처음부터 끝까지 계속 1위를 달렸고 그 자리에 익숙했다. 1번부터 9번까지 모두 강했고, 선발 라인업도 늘 고정적이었다”고 회상했다. 이종범도 “워낙 팀에 스타들이 즐비해서 경기에 이기는 것을 당연한 일로 여겼다”고 했고, 조계현은 “해태는 이기자고 하면 이겼다. 연패도 없었다”고 힘주어 말했다. 엄격한 위계질서도 해태의 특징으로 유명하다. 스타선수들을 통제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아마추어 시절부터 스타였던 이종범조차 신인 때 선배와 캐치볼을 하다 웃었다는 이유로 얼차려를 받았다. 당시 선수 가운데 한 명은 “군대보다 몇 배 더 하다는 말도 들었다. 제아무리 스타라고 해도 김응용 감독이 카리스마로 완전히 통제했다. 스타군단이었지만 팀워크가 탄탄했던 이유”라고 귀띔했다. 김 감독은 선수들을 자극하기 위해 탁자를 때려 부수고, 승리투수 요건을 눈앞에 둔 투수를 지체 없이 교체하곤 했다. 승리를 향한 선수들의 집념을 자극하기 위해서였다. 그렇게 다져진 선수들의 집중력은 포스트시즌과 같은 단기전에서 진가를 발휘했다. 이강철은 “포스트시즌에 들어가는 순간 선배들의 강한 ‘포스’가 느껴졌다. 눈빛과 태도부터 달라지는 모습을 보며 나도 위력을 실감했다”고 했다. 그러나 해태는 손에 꼽히게 가난한 구단이기도 했다. 성적과 구단 사정은 반비례했다. 선수단은 한국시리즈에서 우승한 후 거액의 포상금 대신 ‘해태제과 종합선물세트’를 받았다. 연봉도 다른 구단보다 낮게 책정됐다. ‘서울보다 광주 집값과 물가가 훨씬 싸다’는 구단의 논리 때문이었다. 스타선수들의 화려한 플레이는 ‘헝그리 정신’으로 둔갑했다. 당연히 연봉 때문에 빚어지는 마찰도 많았다. 역대 최고의 투수였던 선동열은 “노예처럼 던졌는데도, 20승을 못 하면 연봉을 깎는다고 했을 정도였다. 지금 생각하면 그 계약서에 도장을 찍은 나도 웃긴다”고 너털웃음을 터트리기도 했다. 그렇게 재정난에 시달리던 해태는 결국 2000시즌을 끝으로 ‘타이거즈’라는 프랜차이즈의 전통과 명예를 새 구단 KIA에 넘겨주고 사라져야 했다. [은] |
가을의 기적 ‘리버스 스윕’ 미라클 두산 준PO서 두 차례 ‘반전 드라마’ 지난해 넥센은 창단 후 첫 포스트시즌에서 천국과 지옥을 오갔다. 홈구장 목동에서 열린 준플레이오프(준PO) 1·2차전에서는 사상 최초로 2경기 연속 끝내기 안타를 때려내면서 짜릿한 승리를 거뒀다. PO 진출까지 남은 승수는 1승. 말 그대로 절대적인 우위였다. 그러나 슬픈 반전이 기다렸다. 넥센은 잠실에서 열린 3·4차전을 모두 패했다. 하루를 쉬고 안방으로 돌아온 5차전에서는 연장 승부 끝에 PO행 티켓을 내줬다. 5차전 9회말 2사 후 터졌던 4번타자 박병호의 극적인 동점 3점포가 2013년 넥센의 마지막 환희였다. 지난해 준PO 5차전에서 넥센을 누르고 PO 진출에 성공한 두산 선수들이 기뻐하는 모습. 사진제공=두산 베어스 반대로 두산은 또 한 번 ‘리버스 스윕(Reverse Sweep)’의 기적을 연출했다. 벼랑 끝까지 몰렸던 팀이 극적으로 흐름을 뒤집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런데 두산은 끝내 해냈다. 흥미로운 사실은 두산이 준PO 역사에서 유일하게 리버스 스윕을 경험해본 팀이었다는 점이다. 준플레이오프에 5전 3선승제가 처음 도입된 2005년 이후(2006·2007년에는 3전 2선승제로 잠시 환원), 2패를 먼저 당한 팀이 3연승으로 PO에 진출한 해는 2010년과 2013년뿐. 2010년의 첫 주인공도 두산이었다. 그해 페넌트레이스 3위로 준PO에 진출한 두산은 원정도 아닌 안방 잠실에서 4위 롯데에 내리 2경기를 내줬다. 1차전에서는 5-5 동점인 9회초 정재훈이 롯데 전준우에게 솔로홈런을 맞은 뒤 5점을 한꺼번에 내주며 무너졌고, 2차전에서도 1-1로 맞선 연장 10회초 정재훈이 이대호에게 3점홈런을 맞고 무릎을 꿇었다. 그러나 ‘미러클 두산’의 진짜 기적은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롯데의 홈 사직구장에서 열린 3차전이 전환점이었다. 두산이 6-5로 앞선 6회말 전준우의 큼직한 타구가 바람을 타고 그라운드 상공으로 들어온 애드벌룬에 맞고 떨어졌다. 6심이 모여 합의한 끝에 아웃 판정이 나왔고, 결국 그 점수 그대로 두산이 이겼다. 분위기를 탄 두산은 사직 4차전을 11-4로 승리한 뒤, 다시 돌아온 잠실 5차전에서도 똑같이 11-4의 스코어로 대승을 거뒀다. 롯데 사령탑이던 제리 로이스터 감독은 시리즈 종료 후 리버스 스윕패에 대한 책임을 지고 경질됐다. 리버스 스윕이 준PO에서만 드물었던 건 아니다. 꾸준히 5전 3선승제로 진행돼온 PO에서도 단 한 차례에 불과했다. 1996년 태평양을 인수해 프로야구에 발을 들여 놓은 현대는 정규시즌 2위로 PO에 선착해 있던 쌍방울에게 먼저 2연패를 당했다. 그러나 이후 3연승을 내리 거두면서 사상 최초의 리버스 스윕을 완성했다. 당시 쌍방울 지휘봉을 잡고 있던 김성근 감독은 OB 감독 시절부터 계속된 ‘한국시리즈 진출 실패’ 징크스를 다섯 시즌째 이어가야 했다. 7전 4선승제로 치러지는 한국시리즈에서는 리버스 스윕이 단 한 번도 없었다. 3연패 후 4연승은 말 그대로 ‘이변’에 가깝다. 2007년 두산에게 2연패를 당한 뒤 4연승으로 한국시리즈 우승을 차지했던 SK가 가장 기적에 근접했던 팀이었다. [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