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2년 패장 김성근 ‘야신’ 별명 붙어
2002년 한국시리즈 6차전 9회말 2사 1,2루에서 삼성의 3번 타자 이승엽이 스리런 동점홈런을 친 뒤 마해영과 포옹하는 모습. 4번 타자 마해영은 곧바로 극적인 끝내기 홈런을 쳤다. 사진제공=삼성 라이온즈
삼성과 LG가 맞붙은 2002년 한국시리즈는 많은 야구인들에게 역대 최고의 한국시리즈로 꼽힌다. 삼성 이승엽과 마해영의 연타석 홈런으로 유명한, 바로 그 시리즈다. 지금은 우승을 밥 먹듯이 하는 삼성이 창단 21년 만에 어렵게 첫 한국시리즈 우승의 감격을 맛봤던 해이기도 하다.
당시 삼성은 시리즈 전적 3승 2패로 앞서 있다가 6차전에서 6-9로 뒤진 채 9회를 맞았다. LG의 승리로 끝나 3승 3패로 균형을 이룬다면, 시리즈의 흐름이 LG 쪽으로 넘어갈 수밖에 없는 상황. 이미 승부가 끝났다고 생각해 야구장을 떠난 관중도 많았다. 그런데 이런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믿을 수 없는 이승엽의 동점 3점홈런이 터졌다. 뒤이어 타석에 선 4번 타자 마해영은 LG 투수 최원호를 상대로 드라마 같은 끝내기 홈런을 작렬했다. 결국 삼성의 10-9 승리. 삼성의 오랜 한이 풀리는 순간이었다.
당시 LG 투수코치였던 양상문 LG 감독은 “LG가 차근차근 삼성을 압박해 가면서 우승까지 넘보는 분위기였는데, 시리즈 내내 부진했던 이승엽이 6차전 9회에 3점짜리 동점 홈런을 때리고 곧이어 마해영의 끝내기 홈런까지 나와 정말 영화같은 승부가 연출됐다”면서 “LG 역시 6차전을 잡았다면 8년 만의 우승이 가능한 분위기였기에 양쪽 희비가 극명하게 엇갈린 명승부였다”고 회상했다. 그때 삼성 지휘봉을 잡고 있던 김응용 감독은 우승이 확정된 후 LG 사령탑이었던 김성근 감독을 향해 “마치 ‘야구의 신’과 싸우는 것 같았다”는 덕담을 건넸다. 김성근 감독에게 그 유명한 ‘야신’이라는 별명이 붙은 계기였다.
# 2004년 트리플플레이·홈스틸도 나와
2004년 한국시리즈 4차전에서 삼성 배영수는 현대 타선을 상대로 10이닝 노히트노런을 기록했지만 0-0 균형이 깨지지 않아 승리투수가 되지 못했다. 작은 사진은 마운드에서 내려온 뒤 더그아웃에서 연장 승부를 지켜보는 모습. 연합뉴스
2004년 현대와 삼성의 한국시리즈도 둘째가라면 서러운 명승부다. 양 팀은 한국시리즈 2차전에서 8-8, 4차전에서 0-0, 7차전에서 6-6으로 비겨 사상 최초로 한국시리즈를 9차전 승부까지 끌고 갔다. 세 차례나 연장 12회 혈투를 펼쳤으니, 이닝 수로만 따져도 한 경기를 더 한 셈이다. 심지어 4차전에서는 삼성 선발 배영수가 10이닝을 무안타 무실점으로 막아내 ‘비공인 노히트노런’을 기록했고, 7차전에서는 한국시리즈 사상 첫 트리플플레이와 홈스틸(현대 전준호)이 나와 야구팬들을 열광시키기도 했다.
게다가 9차전은 역대 최악의 폭우 속에서 치러진 수중전이었다. 당시 심판을 맡았던 한 야구인은 “9차전에서는 야수들이 공을 제대로 볼 수도 없을 정도로 비가 억수같이 쏟아졌지만, 그렇다고 게임을 중단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현대 1루수 이숭용이 빗속에서 마지막 타구를 잡고 포효하던 장면은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고 회고했다. 선수들은 진흙바닥에 미끄러지고 비 때문에 쉬운 공을 놓치기도 했지만 끝까지 혈전을 멈추지 않았다. 결국 9차전은 현대의 8-7, 한 점 차 승리로 끝났다.
이밖에도 1984년 롯데-삼성의 한국시리즈와 2000년 두산-현대의 한국시리즈도 잊기 힘든 명승부로 꼽힌다. 1984년에는 전무후무한 롯데 최동원의 한국시리즈 4승이 탄생했고, 2000년에는 현대의 3연승 후 두산이 다시 3연승을 거둬 사상 첫 한국시리즈 리버스 스윕을 꿈꿨지만, 결국 현대가 7차전을 이겨 우승을 차지했다.
# ‘불멸의 4승’ 최동원 MVP 못 받은 까닭?
그렇다면 역대 한국시리즈에서 최고의 활약을 펼친 선수는 누구일까. 당연히 첫 손에 꼽히는 선수는 한국시리즈 4승 기록을 보유한 고(故) 최동원이다. 롯데 에이스였던 최동원은 1984년 삼성과의 한국시리즈에서 1·3·5차전을 완투(1차전 완봉승, 3차전 완투승, 5차전에서 8이닝 완투패) 했고, 6차전 구원승에 이어 7차전에서도 또 다시 완투승을 올렸다. 한국시리즈 7경기 가운데 5경기에 등판해 총 40이닝 투구. 그런데 방어율은 1.80에 이른다. 그야말로 만화 같고, 아마도 다시는 볼 수 없을 신화다. 그런데도 최동원은 그해 한국시리즈 MVP를 놓쳤다. 당시 포수로 최동원과 호흡을 맞췄던 NC 한문연 코치는 “최동원은 이미 정규시즌 MVP가 확실했기 때문에 시리즈 MVP가 유두열로 결정됐을 뿐”이라며 “지금도 믿기지 않고, 앞으로도 다시 나오기 힘든 역사”라고 했다. 허구연 MBC 해설위원도 “당시 최동원의 역할은 절대적이었다. 팀 전력의 90%를 차지했다”고 회상했다. 한국시리즈 역사만 놓고 보면, 해태 선동열보다 최동원이 더 돋보이는 투수였다고 평가하는 야구계 인사들도 많다.
# 이종범·나지완·김용수도 ‘레전드’
최고의 명승부를 연출했던 2002년 한국시리즈의 영웅 마해영도 인상적이었다. 마해영은 6차전 끝내기 홈런뿐만 아니라 5차전에서도 홈런 두 방을 때려내면서 타율 0.458(24타수 11안타) 3홈런 10타점으로 시리즈 MVP에 올랐다. KIA 나지완도 빼놓을 수 없다. 2009년 SK와의 한국시리즈에서 사상 첫 ‘7차전 끝내기 홈런’을 때려냈다. 당시 KIA 타자들을 지도했던 두산 황병일 코치는 “7차전을 앞두고 나지완에게 ‘너 오늘 홈런 두 개 칠 것 같다’고 말했는데 정말 그날 두 개를 쳤다”며 “나중에 나지완이 ‘코치님 때문에 소름이 끼쳤다’고 하더라. 그냥 나지완에게 힘을 실어 주기 위해 한 말이었는데 실제로 이뤄져 기뻤다”고 회상했다.
해태 이종범도 1993년 삼성과의 한국시리즈에서 역사적인 활약을 펼쳤다. 타율 0.310(29타수 7안타) 4타점 7도루로 시리즈 MVP에 올랐다. 당시의 삼성 선수들에게는 당연히 안 좋은 기억으로 남아 있다. 삼성 김성래 코치는 “1루에 나가기만 하면 어느새 3루까지 가 있었다. 삼성이 해태에 진 게 아니라 이종범에게 졌던 것이나 다름없다”고 떠올렸다. LG 김용수는 팀이 우승했던 1990년과 1994년 두 번의 한국시리즈에서 모두 시리즈 MVP를 거머쥐었다. 그만큼 역할이 막중했다는 의미다.
1996년 해태와의 한국시리즈 4차전에서 노히트노런을 기록했던 현대 정명원, 그리고 2004년 한국시리즈 4차전에서 10이닝 동안 노히트노런을 기록하고도 경기가 연장 12회 무승부로 끝나 결국 기록을 인정받지 못한 삼성 배영수도 여전히 기억에 남을 최고의 피칭을 선사했다.
배영은 스포츠동아 기자 yeb@donga.com
비가 갈라논 포스트시즌 명운 곰들 ‘꿀휴식’ 후 기적 쐈다 NC와 LG가 맞붙은 올해 준플레이오프는 두 차례나 비 때문에 경기가 밀리는 불운을 겪었다. 10월 19일 1차전과 10월 22일 2차전 사이의 ‘원치 않은’ 휴식일이 무려 이틀. 1차전을 이기고 흐름을 이어가려던 LG와 하루 빨리 1차전의 패배를 설욕하고 싶었던 NC는 서로 “비가 우리 쪽에 유리한 변수가 될 것”이라며 길조로 받아들이려 애썼다. 1996년 10월 2·3일 현대와 한화의 준플레이오프 2차전이 비로 이틀 미뤄진 이후 18년 만이자 역대 두 번째로 벌어진 일이니 당황할 만도 했다. 비가 위대한 역사의 발판이 된 경우도 있다. 1984년 한국시리즈에서 만난 롯데와 삼성은 3승 3패로 팽팽하게 맞선 가운데 운명의 7차전을 눈앞에 뒀다. 그런데 이때 폭우로 7차전이 하루 밀리는 상황이 벌어졌다. 롯데는 뜻밖의 휴식일을 받은 에이스 최동원의 어깨를 다시 한 번 믿기로 했다. 결국 롯데의 첫 우승을 결정짓는 네 번째 한국시리즈 승리가 완성됐다. 이날의 우천순연이 없었다면, 천하의 최동원도 7차전 완투는 불가능했을 터다. 2001년을 빛낸 ‘미라클 두산’의 신화도 ‘비’라는 조연 덕을 톡톡히 봤다. 두산은 그해 준플레이오프와 플레이오프를 모두 거쳐 한국시리즈에 올랐다. 한국시리즈에 직행해 힘을 비축했던 삼성은 1차전에서 7-4로 승리하면서 기세를 올렸다. 그러나 다음 날 2차전을 앞두고 대구에는 추적추적 가을비가 내렸다. 포스트시즌 전 경기를 치르느라 투수들이 모두 지치고 심신이 피곤했던 두산에게는 그야말로 가뭄 끝의 단비와도 같았다. 두산은 하루 뒤 열린 2차전에서 9-5로 이겨 기어이 적지에서 1승 1패로 균형을 맞췄고, 시리즈 전적 4승 2패로 한국시리즈 패권을 차지하는 기쁨을 맛봤다. 두산은 2000년 플레이오프에서도 LG에 1승 2패로 밀리다가 4차전이 비로 하루 순연된 후 내리 3연승을 올린 적이 있다. [은] |
한국시리즈 키워드 희생·자존심·기회 김시진 ‘최동원, 네가 던지면 나도 던진다’ 1984년 한국시리즈에서 활약한 삼성 김시진. 사진제공=삼성 라이온즈 첫째는 ‘희생’이다. 1982년 10월 8일, 프로원년 한국시리즈 3차전을 앞두고 OB 김영덕 감독은 선수들에게 말했다. “박철순이 오늘 야구 인생을 걸었다”고. 박철순은 시즌 막바지부터 허리 부상을 참고 버텨오다 결국 1·2차전 때 병원에 입원해 있었다. 그러나 팀이 1무1패로 수세에 몰리자 결국 진통제를 맞고 출전하기로 결심했다. 박철순은 3·4차전 세이브에 이어 6차전 완투승을 거두면서 팀의 우승을 이끌었지만, 그 후 기나긴 부상치료와 재활을 감내해야 했다. SK 채병용은 2009시즌이 끝난 뒤 팔꿈치 인대 수술을 앞두고 있었다. 이미 인대는 너덜너덜해진 상태였다. 그러나 그는 그해 한국시리즈 마운드에 올라 연투를 마다하지 않았다. 공 하나를 던질 때마다 팔꿈치가 찌릿찌릿했지만, 내색하지 않고 견뎠다. 채병용은 결국 7차전 9회말 나지완에게 시리즈를 끝내는 홈런을 맞았다. 그러나 팬들은 누구도 그를 비난하지 못했다. 둘째는 ‘자존심’이다. 1984년 한국시리즈. 삼성 김시진에게 롯데 최동원은 친구이자 영원한 라이벌이었다. 김시진은 등판가능 순서를 묻던 감독에게 “최동원이 1·3·5·7차전에 나온다면, 나도 그렇게 하겠다”고 했다. 김시진은 1차전에서 패전투수가 됐고, 3차전에서는 2-2였던 8회 홍문종의 타구에 발목을 맞아 들것에 실려 나갔다. 그래도 진통제 주사를 맞고 6차전 마운드에 또 올라 완투를 했다. 라이벌에게 질 수 없다는 오기가 그를 다시 일으켰다. 삼성 박한이는 2009시즌을 마치고 데뷔 첫 FA(프리에이전트) 자격을 얻었지만, 어느 팀도 불러주지 않아 자존심을 단단히 구겼다. 결국 4년도 아닌 2년 계약을 맺고 헐값으로 삼성에 남았다. 2013년 한국시리즈. 1차전에서 손가락을 다친 박한이는 3차전에 다시 나와 결승득점을 올렸다. 1승 3패로 삼성이 벼랑 끝에 선 5차전에서는 8회 결승 2타점 적시타를 쳤다. 6차전에서는 두산의 추격 의지를 꺾는 3점포를 날렸다. 한국시리즈 MVP로 선정됐다. 박한이는 그해 말 두 번째 FA가 됐고, 4년간 28억 원에 계약해 제대로 된 대우를 받았다. 1982년 한국시리즈에서 부상투혼을 펼친 OB 박철순. 1994년 한국 시리즈에서 연장전 끝내기 홈런을 친 LG 김선진. 셋째는 ‘기회’다. 1993년 삼성-해태의 한국시리즈 3차전. 삼성 선발 박충식의 연장 15회 181구 완투로 유명한 그 경기다. 3회부터 나와 연장 10회까지 막아낸 해태 선동열은 어깨가 아파 더 이상 못 던지겠다고 했다. 마운드를 이어받은 투수는 배팅볼 투수 출신인 송유석. 팀의 궂은일을 도맡아온 선수지만, 박충식의 상대는 아니라고 여겨졌다. 그러나 송유석의 구위는 삼성팬들의 기대를 저버리고도 남았다. 15회까지 삼성 타선을 무안타로 틀어막았다. 절체절명의 기회를 잡은, ‘숨은 영웅’이었다. LG 김선진은 1994년 태평양과의 한국시리즈 1차전 6회에 대주자로 들어섰다. 빠른 발 빼고는 장점이 없었던 선수. 시즌 후 방출대상자 명단에 이름이 올라 있었다. 그런데 연장 11회, 김선진이 때린 초구가 잠실구장 담장을 넘어갔다. 한국시리즈 사상 첫 연장 끝내기 홈런. 그 후 김선진은 6년 더 선수생활을 했다. [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