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군표 전 국세청장 | ||
하지만 고위 공직자들의 재산 내역을 살펴보면 이런 미술품들이 재산으로 신고돼 있는 경우는 찾기 힘들다. 누락시킨다 해도 이번 그림 로비 의혹과 같은 경우가 아니면 발각될 가능성이 희박하기 때문이다.
관련부처는 고위공직자의 집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확인하지 않는 한 미술품과 같은 재산의 신고누락을 적발할 방법은 없다고 말하고 있다. 때문에 일각에서는 허술한 고위공직자 재산공개 제도가 다른 형태의 뇌물을 양산하는 원인이 된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고위 공직자들의 재산 공개와 관련된 허점들을 짚어봤다.
한상률 국세청장으로 하여금 끝내 사표를 내게 만든 ‘그림로비’ 의혹은 전군표 전 청장의 아내인 이 아무개 씨가 소유하고 있던 그림 ‘학동마을’을 G갤러리에 팔아달라고 부탁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불거졌다. 이 씨는 그림을 한상률 청장이 국세청 차장일 때 남편에게 준 것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한 청장은 이 그림을 본 적도 없다고 했다. 결국 둘 중 한 명은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림이 과연 누구 손에 있었는지를 확인하기 위해 공직자 재산공개 내역을 살펴봤다. 현행 고위공직자 윤리법을 보면 회화, 도자기 등이 품목당 500만 원이 넘으면 재산신고를 하도록 돼있다. 하지만 2007년 당시 고위공직자 재산 공개 내역을 살펴보면 전군표 전 청장의 재산에 그림이나 미술품 등의 내역은 없다. 마찬가지로 다른 그림이 더 있다는 의혹을 받고 있는 한 청장 역시 그림 관련 재산내역은 전혀 나와있지 않았다. 결국 이들이 신고한 재산은 상당부분이 누락된 셈이다.
미술품뿐만 아니다. 뇌물 수수 등으로 낙마한 이주성 전 국세청장의 경우에는 수천만 원대의 고급 오디오 시설과 가구 등을 받은 것이 문제가 됐다. 하지만 이것 역시 재산신고내역에서는 빠져 있다. 이 전 청장이 받은 오디오 시설은 마니아들 사이에 내놓으면 당장 수천만 원은 족히 받을 수 있는 것들이다. 본인의 기호에 따라서는 얼마든지 뇌물로 발전할 가능성이 있는 것들이 관련 규정 미비로 신고에서 빠진 것이다.
귀금속과 관련한 부분도 눈여겨 볼만하다. 일반인들 사이에서는 다이아몬드나 금 같은 귀금속도 엄연히 재산으로 분류되고 있으나 귀금속 관련 내역을 공개한 고위공직자들은 많지 않다. 강부자 내각으로 비판을 받았던 이명박 정부 내각의 재산 공개 내역을 보면 이명박 대통령(다이아몬드 500만 원 상당), 이상희 국방부 장관(금 2100만 원 상당, 다이아몬드 200만 원 상당), 강만수 기획재정부 장관(다이아몬드 200만 원 상당) 등 3명에 불과하다.
수십억 원대의 부동산과 현금을 보유한 부자들이 유독 귀금속에 눈을 돌리지 않은 게 신기할 뿐이다. 결국 그만큼 많은 고위공직자들이 귀금속을 재산공개에서 누락시켰다는 반증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동산이나 부동산 등에 대한 재산신고가 정확히 이뤄지고 있는 것도 아니다.
세종증권 매각 의혹 과정에서 다시 이름이 거론된 정대근 전 농협회장이 대표적 사례다. 정 전 회장은 2006년 박연차 회장과 세종캐피탈로부터 60억 원가량을 받았음에도 2008년 재산내역을 보면 동산과 부동산을 다 포함해서 40억 원을 넘지 않는다. 18대 국회 최연소 당선자였던 양정례 의원도 13억 원의 재산을 누락해 신고했다 언론을 통해 드러난 바 있다.
▲ 전군표 전 국세청장이 청장 재임시절 뇌물로 받은 것으로 보도된 고가의 그림 ‘학동마을’. | ||
현재 규정상 재산을 누락해서 신고한 사실이 발견되면 공직자윤리위원회에서 소속 부처에 해당 공직자에 대한 징계나 해임을 요구할 수 있고 더 나아가 수사까지 의뢰할 수 있게 돼 있지만 실제로 징계까지 이어진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또한 행정직원의 사무착오라는 식의 책임 떠넘기기를 해도 이를 밝혀낼 방법도 거의 없다. 이명박 정부 초대 외교안보수석 비서관이었던 김병국 고려대 교수는 아버지의 재산을 20억 원가량 누락 신고한 것이 청문회 때 드러나 문제가 됐으나 ‘사무착오’라고 답하면서 별 무리없이 비서관에 임명됐다.
공직자윤리위원회 관계자는 “위원회가 수사권이나 징계권을 직접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적발 이후 처리는 소속 부처에 맡겨질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상황이 이럼에도 불구하고 최근 정부 일각에서는 ‘누락신고’에 대한 처벌 기준을 완화하는 제도를 준비 중이어서 논란이 예상된다. 행정안전부가 고위공직자 재산신고에서 누락액수가 1억 원 미만이면 징계를 면해주는 방안을 강구 중인 것. 허술한 법망으로 인해 고위공직자들의 재산 누락 신고가 적지 않은 상황에서 이 같은 제도의 추진은 국민정서에 역행하는 것이란 비판이 일고 있다.
피부양자가 아니면 재산공개를 거부할 수 있도록 하는 것도 공직자 재산공개의 허점이다. 공직자윤리법은 직계 존비속의 재산을 공개하도록 돼 있으나 피부양자가 아니면 고지를 거부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일례로 지난 7월 국회사무처가 국회의원들의 재산을 공개한 결과, 전체 의원의 25%인 의원 45명의 직계 존비속이 재산고지를 거부했다.
시민단체들은 이러한 고위공직자 재산공개 제도의 허점을 보완하기 위해서는 직계존비속 재산고지 거부제를 폐지하고 공직자윤리위원회를 독립기구화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경제정의실천연합 정책팀의 한 관계자는 “물리적인 이유를 들어 단속의 한계를 토로하는 관계자들의 주장은 고위공직자들의 의도적인 재산 누락을 방조하는 것”이라며 “재산신고를 더욱 강화하는 쪽으로 제도가 개선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박혁진 기자 phj@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