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해운대>의 한 장면.
팬들의 화살도 상대팀이 아닌, ‘우리 팀’으로 향한다. 좀 더 좋은 성적을 원한다고, 그리고 더 좋은 야구를 보여 달라고 당당하게 요구한다. 초창기의 프로야구 팬들은 달랐다. 지역 색이 관중석에 그대로 반영됐다. 팬들의 열정으로 특히 유명한 부산의 롯데와 광주의 해태는 그라운드 안보다 밖에서 더 뜨거운 팬들의 장외전쟁도 겪어야 했다. 과연 과거에는 팬들로 인해 어떤 일이 생겼고, 현재의 팬들은 어떻게 달라졌을까. 2회에 걸쳐 돌아본다.
#지역 색이 고스란히 드러났던 옛 관중석
잠실구장 해태 팬 난동사건.
1999년 10월 20일 대구구장에서 벌어진 프로야구 플레이오프 롯데-삼성전에서 롯데가 승리하자 흥분한 삼성팬들이 난동을 부리며 경찰관과 대치하는 모습. 연합뉴스
요즘의 야구팬들이 팀 성적과 경기력으로 질책을 한다면, 당시에는 그저 ‘지역’의 차이에서 오는 반감 때문에 선수들도 애를 먹었다는 뜻이다. C 야구인은 “선수들이 퇴장할 때 맥주병, 먹다 남은 치킨이나 족발 같은 게 날아오는 건 늘 있는 일이었다. 원정을 나가서 밖에서 식사를 하면 그쪽 지역 팬들과 시비가 붙는 일이 많아서 나중에는 외출도 잘 하지 않았다”고 털어 놓았다.
#해태 구단 버스가 불탔던 사연
달아오를 대로 달아올랐던 팬들의 열기와 지역감정이 동시에 충돌하는 순간, 야구장은 그야말로 전쟁터가 됐다. 1986년에는 끝내 역대 가장 상징적인 사건이 터졌다. 영호남 라이벌 삼성과 해태의 한국시리즈 3차전이 끝난 뒤 대구구장 앞에 주차돼 있던 해태 선수단 버스가 불에 타서 전소됐다.
86년 홈팀 삼성의 대구 팬들이 해태 구단 버스에 불을 질렀다.
그러나 삼성은 홈에서 열린 3차전도 패했다. 격분한 일부 관중이 경기장 밖에 세워둔 해태의 45인승 리무진 버스에 불을 질렀다. 애꿎은 다른 야구팬의 차까지 파손시키면서 경찰과 대치했다. 버스가 불에 타는 동안, 해태 선수들은 1시간 넘게 야구장에 갇혀 있었다. 인명사고가 없었던 게 다행일 정도. 한국시리즈가 계속될 수 있을지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한국야구위원회(KBO)는 메이저리그 사무국에 사고수습 방안을 물었지만, “축하한다. 그렇게 홈팬들의 열성이 뜨겁다면 한국 프로야구의 성공은 확실한 것 같다”는 인사(?)만 받았다. 4차전을 대구가 아닌 다른 야구장에서 여는 방안을 검토해보기도 했다. 결국 대구시와 회의한 끝에 ‘천재지변이 없는 한 예정대로 같은 장소에서 강행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대신 대구구장에는 평소보다 네 배 이상 많은 경찰병력이 배치됐다. 경기는 또 다시 연장 접전 끝에 해태의 승리. 사고버스의 보상 문제는 이듬해 1월 구단주간담회에서 삼성 구단이 해태에 배상하는 쪽으로 결론이 났다.
#한때 폭력으로 얼룩졌던 야구장 관중석
1990년 8월 한 통신사는 ‘프로야구 경기장 폭력 심각’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송출했다. 이 기사에 따르면, 1982년 프로야구 출범 이후 그 시점까지 총 50여 건의 크고 작은 야구장 폭력사고가 사회적인 문제를 일으켰던 것으로 집계됐다. 당연히 앞서 해태 선수단 버스 방화 사건이 포함됐다. 사실 1990년은 유독 대형 사고가 많이 터진 시즌이기도 했다. 부산에서는 롯데 팬들이 관중석 곳곳에 불을 질러 일곱 명이 형사입건 됐고, 인천에서는 태평양 팬들이 롯데 버스에 돌을 던져 수백만 원가량의 재산 피해를 입혔다. 또 잠실에서는 해태팬과 LG팬 500여 명이 집단 난투극을 벌이면서 최악의 진흙탕 싸움을 펼쳤다.
86년 홈팀 삼성의 대구 팬들이 해태 구단 버스에 불을 질렀다.
앞서의 A 야구인은 “아무래도 세상에 대한 울분이 야구장에서 다 터져 나왔던 시기가 아닌가 싶다. 당시에는 젊은 혈기에 너무 심한 욕을 하는 관중과 싸우고 싶기도 하고, 지나친 폭력 때문에 겁이 날 때도 있었던 게 사실”이라면서 “지금 생각해 보면 당시의 프로야구가 그만큼 팬들에게 더 큰 의미가 있었던 게 아닌가 싶다. 지금은 프로야구가 여러 가지로 발전했고 팬들도 성숙해졌지만, 지나친 폭력만 빼면 그 시절의 순수한 열정이 그리운 이들도 있을 것”이라고 귀띔했다.
배영은 스포츠동아 기자 yeb@donga.com
| 사라진 팬 풍속도 종이학 수천 마리는 받아봐야 스타쥐~ 야구에 대한 팬들의 사랑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그러나 시대가 변하면서 그 마음을 표현하는 방식이 조금씩 달라지고 있다.
요즘 유행하는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는 약이자 독이다. 팬들은 SNS를 통해 자신이 좋아하는 선수와 직접 소통한다. 마치 오래된 지인처럼 다정하게 얘기를 주고받고, 선수도 자신의 일상을 전하며 팬들에게 가깝게 다가간다. 대신 선수가 말실수를 하거나 다른 팬들이 선수에게 자신과 다른 의견을 보내면, 가차 없이 비난을 가한다. 과거에는 선수와 소통할 수 있는 경로가 적었다. 구단 게시판조차 사용할 수 없던 시절이다. 일방적으로 마음을 표현해야 했다. 가장 대표적인 방법이 팬레터. 프로야구 선수들 라커룸에는 언제나 팬레터가 수북하게 쌓여 있었다. 과거 스타선수였던 한 야구인은 “원정경기를 다녀오면 펜레터가 산더미처럼 밀려 있었다. 솔직히 다 읽어보기도 버거울 만큼의 양이라 개봉도 해보지 못한 편지도 많았다”며 회상했다. 프런트 직원들도 구단 사무실에 도착한 팬레터를 선수별로 분리해 전달하는 것이 주요 일과 가운데 하나였다. 최근에는 사라진 풍속도지만, 한때는 여성팬들이 선수들에게 종이학을 접어 선물하는 게 유행이었다. 팬들이 보여줄 수 있는 성의의 상징이었기 때문이다. 종이학 수백·수천 마리 정도는 받아봐야 스타 선수로 인정받을 수 있을 정도. 처치 곤란할 만큼 많은 양의 종이학이 라커룸을 메우곤 했다. 때로는 재미있는 선물도 배달됐다. 대표적인 게 구두약이다. 낮 경기 때 선수들은 강한 햇빛이 눈에 직접 들어와 시야를 가리는 것을 막기 위해 검은색 아이패치를 눈 밑에 붙인다. 그런데 한 여학생 팬이 ‘선수들이 검은색 구두약을 눈 밑에 바르는 것 같다’고 착각해 구두약 수십 통을 사서 보낸 것이다. 지금처럼 인터넷을 통해 수많은 야구 정보를 접할 수 없는 시대였으니 가능한 일이다. 과거의 팬들은 화를 내는 방식도 단순했다. 자신이 응원하는 선수와 구단에 실망을 느꼈을 때, 무작정 구단 버스를 막아섰다. “감독 나와라!”, “주장 나와라!” 하며 청문회를 요구했다. 성난 민심을 표현하고 싶은데 선수단에게 의사를 전할 방법이 없으니, 그게 유일한 수단이었다. SNS를 통해 조직적으로 목소리를 내는 요즘 팬들과는 확실히 달랐다. [은] |
| 잊을 수 없는 명물팬 목터져라 “삼진! 삼진!” 삼진할머니 아시나요 선수는 아니었다. 그러나 야구장 좀 가봤다 하는 사람에게는 스타선수 못지않게 유명했다. 프로야구가 역사를 쌓아가는 동안, 전국의 야구장에도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명물팬’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광주의 ‘삼진 할머니(왼쪽)’와 LG 할아버지. 사진제공=KIA 타이거즈 광주구장의 ‘삼진 할머니’가 대표적이다. 팔순을 바라보는 이 할머니는 상대팀 타자들이 타석에 들어서면 늘 “삼진! 삼진!”을 외치는데, 그 목소리가 웬만한 남자들만큼 우렁차서 ‘삼진 할머니’라는 별명이 붙었다. 해태가 전성기를 보내던 1990년대부터 홈경기에는 단 한 번도 빠지지 않았다. KIA는 몇 년 전부터 이 할머니에게 광주구장에 늘 무료입장할 수 있는 명예회원 자격을 줬다. 1990년대 해태의 골수팬이라면 ‘해태 아줌마’를 모르는 사람이 없다. 알록달록한 한복을 입고 거의 모든 경기장에 나타나 역시 알록달록한 꽃술을 들고 응원을 펼쳤다. 타이거즈 출신의 코치나 선수들도 ‘해태 아줌마’를 보면 인사를 건넬 정도다. 지금은 예전처럼 적극적인 활동을 하지 않지만, 여전히 가끔 경기장을 찾아 선수들을 응원한다는 후문이다. ‘LG 할아버지’도 추억을 자극하는 이름이다. 나이가 70대에 접어들어 등이 구부정해졌지만, 선글라스를 끼고 호루라기를 불며 단상에 올라 치어리더들과 함께 춤을 추고 응원을 주도했다. LG가 우승했던 1990년과 1994년은 ‘LG 할아버지’가 가장 신바람났던 시기였다. 이 할아버지는 1990년대 후반 세상을 떠난 것으로 알려졌다. 이후에는 ‘달마 아저씨’와 ‘박경수 아저씨’ 등이 뒤를 이었다. 태평양이 인천 도원구장에서 활약하던 시절, 보디빌더와 맞먹는 체격으로 응원단장보다 더 활기찬 응원을 이끌었던 ‘고릴라 아저씨’도 유명했다. 태평양 내야수 ‘권준헌’의 이름을 제대로 발음하지 못해 늘 ‘권준현’이라고 외쳤다는 일화도 유명하다. 그러나 태평양이라는 팀이 없어지면서 이 아저씨도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사직구장에는 1루쪽 관중석 맨 앞자리에 한 노신사의 지정석이 있었다. 여든이 넘은 이 아무개 씨는 최동원이 던지던 시절부터 이대호가 홈런을 날리던 시절까지, 30년 가까이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늘 같은 자리에서 롯데를 응원했다. 옷은 늘 단정한 양복 차림이라 더 눈에 띄었다. 팬들도 언젠가부터 그 자리는 이 씨의 몫으로 남겨놓았다. 다른 사람이 앉았다가도 이 씨가 도착하면 자리를 비워줬다. 야구장에 자주 오는 젊은 팬들은 이 씨를 ‘아버지’라 불렀다. 그러나 이 씨가 늘 앉던 그 자리에는 이제 ‘익사이팅 존’이 들어섰다. 2010년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난 고(故) 이학용 씨도 빼놓을 수 없다. 늘 독특한 가발이나 중절모를 쓰고 사직구장 전 경기에 등장해 열정적으로 롯데를 응원했다. 경기 도중 롯데 선수들에게 의미 있는 홈런이 나오면, 직접 외야로 달려가 ‘이 기념 공을 선수들에게 돌려주자’고 팬들을 설득하곤 했다. 선수들도 그런 정성에 감동해 그를 ‘형님’이라 불렀다. 롯데 조성환은 2010년 골든글러브를 수상하면서 “최고의 롯데팬이 세상을 떠났다. 이학용 씨의 열정을 잊지 않겠다”는 소감을 남기기도 했다. [은]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