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벌총수 B 그룹 A 회장 성추문 관련 문건은 ‘대한민국 대통령’을 수신인으로 하는 J 씨의 진정서와 J 씨 주변인물들이 J 씨 주장을 보증하는 내용으로 법무법인 공증하에 작성한 사실확인서, 그리고 여러 젊은 여성들이 A 회장과 비밀스러운 만남을 가졌다는 내용과 해당 여성들의 신상 관련 자료들로 구성돼 있다.
작성일자가 2008년 3월로 돼 있는 이 진정서의 첫 머리엔 ‘진정인 J 아무개, 피진정인 A 회장, C 아무개, K 아무개’로 기재돼 있다. C 씨는 A 회장의 인척이며 K 씨는 A 회장 부인의 대리인이다. 진정서의 내용은 대략 이렇다. J 씨는 1979년 자신이 운영하던 식당에 손님으로 찾아온 A 회장과 친분을 맺게 됐으며 1994년 J 씨가 일본 도쿄에서 사업을 시작할 때 보증 문제를 A 회장이 도와주면서 더욱 친밀해졌다고 한다.
이듬해인 1995년 J 씨가 어려운 사정을 털어놓자 A 회장이 도와주겠다면서 대신 조건으로 딸 둘 중에서 한 명을 자신에게 ‘소개’해달라고 했다는 것. 딸의 장래는 물론 J 씨를 장모로 예우해줄 것이며 계열사에 J 씨가 원하는 곳에 매장도 하나 주겠다는 약속까지 했다고 한다.
결국 J 씨는 1996년 당시 대학 1년생이던 작은딸을 A 회장에게 소개해줬고 이에 A 회장은 딸에게 대학 졸업 후 발레학원을 하나 만들어 주겠다는 약속도 덧붙였다. 그런데 이후 시일이 지나도 A 회장은 J 씨에게 한 약속을 이행하기는커녕 J 씨 딸을 멀리하려 했다고 한다. J 씨가 A 회장에게 약속을 지키라고 채근해도 이를 묵살하고 연락을 아예 끊었으며 협박까지 했다는 것.
이에 J 씨는 지난 2004년 저명한 변호사에게 이 내용을 의뢰했는데 그제야 B 그룹 쪽에서 사람을 보내 합의를 종용했다고 한다. A 회장 인척 C 씨가 J 씨에게 2억 원을 내주면서 합의각서에 서명과 날인을 요구했고 결국 J 씨는 이에 따랐다. 각서엔 ‘합의금 2억 원을 받음과 동시에 B 그룹 측 및 관계 개인과 관련된 매장과 음식점, 학원 관계 등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고 이의 없이 합의한다’고 명시돼 있다.
당시 C 씨의 운전기사가 들고 온 두 개의 쇼핑백에 현금 2억 원이 담겨 있었다고 한다. C 씨는 이 돈이 자신의 돈임을 밝히며 J 씨의 사정이 너무 딱해 보여 우선 주는 것이라고 밝혔다. C 씨는 A 회장에게 잘 이야기해서 좋은 음식점 차릴 수 있게 30억 원을 받아내 줄 테니 그때 자신의 돈 2억 원도 갚으라고 했단다.
그러나 C 씨의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J 씨의 주장대로라면 결국 A 회장이 자신의 재력을 내세워 딸을 우롱하고 농락해 J 씨 가정을 파탄시킨 셈이다. 진정서 말미엔 A 회장이 비슷한 수법으로 여러 명의 어린 여성들과 성관계를 갖는 등 파렴치한 행각을 벌였으며 반드시 철저하게 조사해 엄중 처벌해달라는 당부가 담겨 있다.
이 진정서에 등장하는 ‘저명한 변호사’는 바로 정부부처 산하 위원회 위원장을 지낸 K 변호사다. 이와 관련, K 변호사는 <일요신문>과의 전화통화에서 “(2004년) J 씨가 찾아온 적이 있다”고 밝혔다. K 변호사는 “사건을 정식 수임한 것이 아니라 상담만 해줬을 뿐”이라 덧붙였다. 그런데 J 씨가 찾아온 다음날 B 그룹 측에서 K 변호사에게 연락을 해왔다고 한다.
K 변호사는 “내가 B 그룹 측에 알린 게 아니다. 아마도 J 씨가 나를 만났다고 B 그룹 측에 알린 것 같다”고 당시를 회상했다.B 그룹 측 인사들이 K 변호사에게 “한 번 만나자”고 청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K 변호사 사무실에서 K 변호사와 J 씨 그리고 B 그룹 측 인사가 동석해 이야기를 나누게 됐다. 확인 결과 K 변호사를 찾은 인사는 문건에 등장하는 C 씨와 K 씨였다.
이에 대해 K 변호사는 “B 그룹 측에서 온 인사들이 누구였는지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고 밝혔다.정황상 K 변호사 사무실에서 A 회장의 성추문과 관련된 이야기들이 오갔을 것으로 보인다. 이에 대해 K 변호사는 “J 씨가 (성추문 관련 사안을) 말한 것은 맞지만 B 그룹 측 인사들은 진위에 대해 가타부타 언급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그룹 총수의 사생활을 아랫사람들이 함부로 공적인 자리에서 이렇다 저렇다 논할 입장은 아니었을 것이란 설명이다.K 변호사 사무실에서 만난 J 씨와 B 그룹 측이 합의를 했는지에 대해 K 변호사는 “정확히 알지 못한다”고 밝혔다. K 변호사와의 만남 이후 J 씨와 B 그룹 측이 “우리가 알아서 해결하겠다”고 밝혔다는 것이다.
K 변호사는 “이후로 J 씨나 B 그룹 측에서 아무런 연락도 받지 못해서 어떻게 결론이 났는지 알지 못 한다”고 덧붙였다.2004년 K 변호사 사무실 회동 당시 B 그룹 측 인사로 참석한 A 회장 부인의 대리인 K 씨는 <일요신문>과의 전화 인터뷰에서 진정서 내용과 관련해 “A 회장님이 절대 그렇게 사람을 함부로 대하는 분이 아니다”며 “(A 회장과 J 씨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자세히는 모르지만 그런 약속을 한 적은 없다고 들었다”고 밝혔다.
여기서의 ‘약속’은 진정서에 언급된 ‘J 씨를 장모로 예우해주며 매장 등을 내주겠다’는 내용을 뜻한다.진정서에 피진정인으로 오른 것에 대해 K 씨는 “나는 관련자도 아닌데 왜 날 걸고넘어지는지 원망스러웠다”며 “아마 내가 (A 회장에게) 자기 의사를 잘 전달해줄 것으로 생각한 것 같다”고 밝혔다.
K 씨는 1970년대 한 모임에 나갔다가 우연히 A 회장 부인(당시는 결혼 전)의 모친을 만난 게 인연이 돼 A 회장 부인 일을 돌봐줬다고 한다. A 회장과 부인이 맺어지는 데도 K 씨가 큰 역할을 했다고 한다.
K 씨는 자신이 중재에 나서 C 씨가 2억 원을 J 씨에게 전달한 사실은 확인해 줬다.
K 씨는 “당시 2억 원을 건네주면서 (진정서 관련 내용을) 외부에 알리지 않도록 약속도 했다”며 “아마 (J 씨가) 사업도 잘 안 되고 몸도 안 좋고 해서 A 회장 건을 문제 삼는 것 같다”고 말했다. 최근 진정서 관련 내용이 다시 떠돌기 시작하자 걱정이 돼 며칠 전 J 씨를 만났다는 K 씨는 “어려울 때 많이 도와주신 분에게 흠이 될 일을 벌여선 안 된다”며 다독거렸다고 한다.
K 씨는 A 회장 부인에 대해선 “A 회장의 안사람 역할을 훌륭히 해내고 있다”고 전했다. 그 ‘안사람 역할’ 범주엔 J 씨 건을 잘 처리하는 것도 포함된 듯했다.그런데 진정서의 당사자인 J 씨는 <일요신문>과 가진 전화통화에서 진정서 속의 격앙된 내용과는 동떨어진 입장을 취하고 있다. J 씨는 진정서 내용에 대해 “할 말이 없다.
찾아오지 말아 달라”고만 밝혔다. 몇 차례 답변을 더 요청했으나 J 씨는 더 이상의 말을 내놓지 않았다. <일요신문>이 J 씨와 통화를 한 것은 K 씨와 J 씨가 만난 직후의 일이다. 한편 J 씨의 진정서에 기재된 A 회장 성추문 의혹에 대해 B 그룹 측은 “말도 안 된다. 대꾸할 가치를 못 느낀다”고 일축했다.
천우진 기자 wjchun@ilyo.co.kr
김장환 기자 hwany@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