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13일 열린 고 장영희 교수의 장례미사. 임준선 기자 kjlim@ilyo.co.kr | ||
우리 시대의 ‘희망메신저’이자 ‘영원한 문학소녀’ 장영희 서강대 교수(57·영미어문·영어문화학부)가 지난 9일 지치고 고단한 삶을 마감했다. 장 교수는 소아마비 장애와 세 차례의 암 투병을 견뎌내면서도 강단 복귀와 왕성한 집필 활동으로 삶에 지친 많은 사람들에게 희망을 안겨준 장본인이었다.
장 교수의 삶은 그 자체가 기적이었다. 생후 1년 만에 두 다리를 쓰지 못하는 소아마비 1급 장애인이 된 그는 장애인에 대한 세상의 혹독한 편견과 싸우며 자신의 삶을 스스로 개척해냈다. 서강대 영문과를 마치고 미국 뉴욕주립대에서 영문학 박사학위를 받은 그는 귀국 후 모교에서 교수로 재직하며 영미문학자이자 수필가로 활약해왔다. 역경을 딛고 일어난 그의 일생은 이 땅의 수많은 장애인에게 희망이었다.
그러나 장 교수의 삶은 한마디로 하루하루가 치열한 전쟁이었다. “남보다 느리게 걷기에 더 많이 볼 수 있다”고 스스로를 위로했지만 어린시절부터 그가 넘어야 할 벽은 너무 높았다. 그리고 이러한 현실은 그를 더욱 치열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치열한 삶의 뒤에는 항상 어머니 이길자 씨(82)가 있었다.
이 씨는 걷지 못하는 둘째 딸을 초등학교 3학년 때까지 업어서 등·하교를 시켰다. 화장실에 데려가기 위해 두 시간마다 학교를 들락거렸으며 눈이 오는 날이면 새벽부터 일어나 집 앞 골목길에 연탄재를 부숴서 미리 뿌려놓았다.
장 교수는 생전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어머니는 기동력 없는 딸이 발붙일 한 뼘 자리를 마련하기 위해 목숨 걸고 싸우셨다. 제발 한몫 끼워달라고 애원해도 자꾸 벼랑 끝으로 밀쳐내는 이 세상에 악착같이 매달릴 수 있었던 것은 어머니 때문이었다.”
헌신적인 어머니에 대한 고마운 마음은 장 교수가 사망하기 직전 간신히 뱉은 마지막 말이 ‘엄마’였다는 것에서도 잘 드러난다.
장애는 상급학교로의 진학에 늘 걸림돌이었다. 그러나 한국 영문학계의 태두로 일컬어지는 아버지 장왕록 박사(94년 작고)는 장애인 딸이 이 땅에서 인간대접 받으며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이 교육이라 믿었다. 따라서 그녀를 특수학교가 아닌 일반학교에 진학시키려 필사적인 노력을 기울였다. 서울대 교수인 아버지로 인해 간신히 서울사대 부속 중·고교에 입학해 학업을 계속할 수 있었지만 정작 대학입학에서는 응시는커녕 원서를 낼 기회조차 갖지 못했다.
1971년 1월 보다못한 장 박사는 서강대 영어영문학과장이던 미국인 신부 부르닉 교수를 찾아가 “딸이 입학시험을 좀 치르게 해달라”고 사정했다. 부르닉 교수는 “무슨 그런 이상한 질문이 있느냐. 시험은 다리가 아니라 머리로 치르는 것”이라며 응시를 허락했다. 이것이 ‘교수 장영희’의 시작이었다.
“집에서 기다리는 부모님께 낙방소식 전하는 것을 조금이나마 늦춰볼 양으로 동생과 무작정 영화관에 들어갔다. <킹콩>을 상영하고 있었다. 그때 나는 전율처럼 깨달았다. 이 사회에서는 내가 바로 그 킹콩이라는 걸. 사람들은 단지 내가 그들과 다르게 생겼다는 이유만으로 나를 미워하고 짓밟고 죽이려고 한다. 기괴하고 흉측한 킹콩이 어떻게 박사과정에 들어갈 수 있겠는가?”
이듬해 장 교수는 뉴욕주립대로 유학을 떠난다. 장 교수의 유학은 ‘킹콩’이 아닌 ‘인간’으로 살아남기 위한 마지막 선택이었다. 그리고 수년 후 그녀는 소아마비 장애를 딛고 교수 자리에 오른 인간승리의 주인공이자 영미 문학을 독자들의 눈높이에 맞춰 맛깔스럽고 아름답게 풀어내는 학자로, 이 시대의 감성을 자극하는 에세이스트로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받았다.
하지만 2001년 장 교수는 ‘유방암’이라는 일생일대의 암초에 부딪히게 된다. 수술 끝에 완치판정을 받았지만 2004년 다시 척추암 선고를 받았다. 장 교수는 자신이 연재하던 칼럼 첫머리를 통해 “신은 인간의 계획을 싫어하시는 모양”이라는 말로 담담히 자신의 암재발 소식을 알렸다. 자신에게 닥친 불행을 신의 뜻으로 받아들이는 그의 태도는 불행을 겪어온 사람만이 취할 수 있는 의연한 자세였다. 실제로 그는 “뒤돌아보면 내 인생에 이렇게 넘어지기를 수십 번, 남보다 조금 무거운 짐을 지고 가기에 좀 더 자주 넘어졌고 그래서 어쩌면 넘어지기 전에 이미 넘어질 준비를 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라는 글을 남기기도 했다.
장 교수는 좌절하지 않았다. 그는 “신은 다시 일어서는 법을 가르치기 위해 넘어뜨린다고 나는 믿는다”며 강한 투병의지를 보였다. 지난해에는 암이 간으로 전이되는 최악의 상황으로 악화됐지만 삶의 끈을 놓지 않았다. 장 교수는 암 재발 판정을 받고도 강단에 복귀했으며 2년간 스무 차례가 넘는 항암치료를 받으면서도 <문학의 숲을 거닐다> <생일> <축복> 등 집필활동을 멈추지 않는 투혼을 보여줬다. 말기 암 환자같이 절망의 끝자락에 있는 사람들은 장 교수의 글에서 희망의 메시지를 읽었다. 특히 그는 죽음을 코앞에 두고도 의식이 남아있을 때까지 출간을 앞둔 마지막 수필집 <살아온 기적 살아갈 기적> 교정에 매달린 것으로 알려져 많은 사람들을 감동시켰다.
평생을 목발에 의지해온 장 교수는 9년간 총 세 번의 암 선고를 받았다. 하지만 그는 절망에 빠진 여느 암환자들의 시한부 삶을 거부했다. 그리고 자신의 장애에 대해 동정적인 시선도 원치 않았다. 실제로 수년 전 한 잡지에 ‘신체장애로 천형 같은 삶을 극복하고 일어선 이 시대 희망의 상징 장영희’라는 제목으로 자신의 인터뷰 기사가 실린 것과 관련, “어떻게 감히 남의 삶을 ‘천형’이라 부르는가”라며 불쾌한 감정을 드러냈다. 장 교수는 ‘Count your blessings(네가 누리는 축복을 세어보라)’는 영어 속담을 인용, “사람들은 신체장애가 끔찍하고 비참할 거라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다. ‘천형’이라 불리는 내 삶에도 축복은 있다. 내 삶은 천형은커녕 천혜의 삶이다”라고 말했다.
고통은 장 교수를 더욱 강하게 만들었다. 고통이 깊어질수록 그는 삶에 대한 강한 의지를 드러냈으며 농익은 문장으로 뭇 사람들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전달했다.
‘희망’은 장 교수를 ‘행복하게’ 살게 하는 에너지였다. 장 교수는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에 나오는 ‘희망을 갖지 않는 것은 어리석다. 희망을 버리는 것은 죄악이다’라는 말을 거론하며 “희망이야말로 우리가 존재할 수 있는 기본적인 힘”이라 역설했다.
역경이 닥칠 때마다 오뚝이처럼 일어섰던 장 교수였지만 그의 실제성격은 강인함보다는 연약함에 가까웠던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그는 ‘억척스럽다’ ‘치열하다’는 수식어를 무척 싫어했다고 한다. 자신의 삶을 즐겁게 살아갈 뿐이라는 것이었다. 장 교수를 아는 사람들은 한결같이 ‘영혼이 순수한 분’ ‘착한 심성을 가진 분’ ‘만년 소녀’라고 회고했다. 실제로 장 교수는 <낯 두꺼운 사람들>이라는 에세이에서 “소심하고 남에게 민폐 끼치기 싫어하고 대중 앞에 서거나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실수를 하거나 비난을 받으면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고 이렇다보니 늘 걱정투성이고 하루하루 사는 게 피곤하고 고달플 때가 많다”고 고백한 바 있다.
▲ 생전에 장영희 교수는 화가 김점선(왼쪽), 이해인 수녀(오른쪽)와도 친분을 나눴다. 사진제공=우먼센스 | ||
장 교수는 “내가 이 세상에 정붙이게 만들어준 것은 바로 옛날 나와 함께하기를 거절하지 않는 골목길 친구들”이라고 고백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따금 장 교수는 낮은 사람이 높은 세상을 살아가는 고충과 비양심적인 행동을 하고도 얼굴표정 하나 바뀌지 않는 낯 두꺼운 사람들에 대한 질타의 목소리를 내기도 했다. “건강검진 결과가 잘 나왔다고 남편이 축하하는 의미에서 오피스텔을 하나 사줬다” “내가 산 골프장 회원권은 겨우 4000만 원인데 그거 갖고 그러느냐”고 아무렇지 않게 말하는 정치인이나, 1년간 교통딱지만 11장을 받았다는 사실에 대해 “우리 기사에게 싫은 소리 좀 하지요”라며 쾌활하게 웃으며 대답한 장관 후보들을 향해서도 냉소를 날렸다.
장 교수의 가훈은 ‘착함 속에 보석이 있다. 결국은 착함이 이긴다’는 뜻을 담은 ‘선래보’다. 장 교수는 “결국 이 세상을 지탱하는 힘은 인간의 지식도, 열정도, 용기도 아니고 ‘착함’이다”라고 말했다.
죽음을 넘나드는 투병생활도 그의 열정을 잠재우지는 못했다. “지난번보다 훨씬 강도 높은 항암제를 처음 맞는 날, 난 무서웠다. … 순간 나는 침대가 흔들린다고 느꼈다. 악착같이 침대 난간을 꼭 붙잡았다. 마치 누군가 이 지구에서 나를 밀어내듯, 어디 흔들어 보라지, 내가 떨어지나, 난 완강하게 버텼다”라는 글에서도 알 수 있듯 장 교수는 기적을 꿈꾸며 무던히도 버텼다. 그는 병상에서도 웃음을 잃지 않았으며 자신의 아픈 모습을 가족 외의 다른 사람에게 드러내기를 싫어했다. 절망 대신 시종일관 따뜻하고 소박한 글들로 희망의 메시지를 전했다. 특히 평소 ‘긍정의 힘’을 언급했던 장 교수는 삶에 대한 강한 애착을 나타냈다고 전해진다. 장 교수는 수필집 <내 생애 단 한번>에서 “길고 가늘게 사느니 굵고 짧게 사는 것이 낫다고 말하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개똥밭에 굴러도 저승보다는 이승이 낫다는데 화끈하고 굵게, 그렇지만 짧게 살다가느니 보통밖에 안되게, 보일 듯 말 듯 가늘게 살아도 오래 살고 싶다”라고 썼다.
투병 중 장 교수는 “생각해보니 나는 지금 더도 말고 덜도 말고 기적을 원한다. 암에 걸리면 죽을 확률이 크고 확률에 위배되는 것은 기적이기 때문이다”라는 말도 남겼다. 또 후에는 “아프고 힘들어서 하루하루 어떻게 살까 노심초사하며 버텨낸 나날들이 바로 기적이며, 살아온 기적이 살아갈 기적이 된다”는 말로 희망을 전파했다. 장 교수의 제자들은 아름다운 미소를 지닌 단발머리 교수님을 가슴에 묻겠다고 했다. 또 그의 여동생들은 “모두의 장영희였다”는 말로 남겨진 노모를 위로했다.
자신의 수필집 제목처럼 ‘때론 아프게, 때론 불꽃같이’ 살다간 장 교수의 삶은 오늘날 삶의 소중함을 망각하며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더없이 귀한 일깨움을 주고 있다.
이수향 기자 lsh7@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