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과거도 눈 감았나 2006년 3월, 대전국립묘지에 안장된 김창룡 장군 묘 앞에서 시민단체 회원들이 ‘반민족행위자 및 반국가사범의 국립묘지 퇴출’을 주장하며 묘비에 끈을 묶어 쓰러트리는 ‘파묘 퍼포먼스’를 벌이고 있다. 연합뉴스 | ||
대표적인 인물로는 총독부 시절 초대 특무대장을 지낸 김창룡을 들 수 있다. 김 씨는 암살당한 지 나흘 후 안양 관악산 기슭의 사설묘역에 묻혔으나 1996년 말 브라질에서 귀국한 부인의 요청에 의해 1998년 2월 대전국립현충원으로 유해 이장이 이뤄졌다. 그는 육군장군 신분으로 장군묘역에 안장되어 있다. 김 씨의 이장이 알려지자 시민단체의 항의가 빗발쳤다. 특히 백범 김구 선생 암살에 개입한 배후로 의심받곤 했던 그의 묘가 김구 선생의 모친인 곽낙원 여사와 아들 김인 선생의 묘 근처에 있는 것은 말도 안 된다며 반발했다.
친일파인 김 씨는 어떤 이유로 국립현충원에 이장된 것일까. 이에 대해 국방부는 “김창룡은 현역으로 재직 중 1956년 1월 30일 사망하여 순직처리된 자로 그 당시는 국군묘지령이 제정되기 이전이라 국립묘지(국립현충원)가 아닌 사설묘지에 안장됐다. 그 후 1997년 7월 31일 부인이 이장을 신청했고 육군본부에서 검토한 결과, 국립묘지령 제3조에 의거 대전국립현충원에 안장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2005년 11월 ‘친일군인 김창룡묘 이장추진을 위한 시민대책위원회’가 구성되는 등 반발이 심했다. 이어 2007년에는 당시 김원웅 의원을 대표로 강기정 강창일 송영길 의원 등이 가세해 ‘국립묘지법 개정 및 반민족행위자 김창룡묘 이장추진 시민연대’가 발족되기도 했다. 현재에도 민족문제연구소 등의 단체를 필두로 이러한 현실을 개탄하는 목소리는 수그러들지 않고 있다.
더욱 심각한 것은 국립묘지에 안장되어 있는 친일인사가 비단 김창룡뿐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장군 묘역에는 김창룡 외에도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되어 있는 구 일본군 장교 출신들이 여럿 안장되어 있다.
국민정신총동원 예수교장로회 활동을 한 친일군인 김응순은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고 2006년 애국지사 신분으로 대전국립현충원에 안장됐다. 일본육사 26기 출신으로 당시 일본군 대좌였던 이응준은 1985년 서울국립현충원에 안장됐다. 일본육사 55기로 만주군 헌병대위로 활동한 정일권도 육군장군 신분으로 1994년 서울국립현충원에 안장됐다.
국가유공자 신분으로 백낙준도 1985년 서울국립현충원에 몸을 눕혔다. 백 씨는 일반인들에게 친일인사보다는 연세대학교 초대 총장을 지낸 민족 교육의 선각자로서 널리 알려져 있다. 하지만 백 씨는 1943년 친일매체 기고를 통해 “대동아전쟁처럼 숭고하고 위대한 전쟁은 없다”며 학생들을 선동한 인물이다. 그는 해외에서 고학했지만 일제 치하에선 친일 논객으로, 미군정하에선 친미주의자로 변신했고, 초대 참의원 의장, 문교부 장관, 대학총장을 지냈다.
만주국 정부 관리 양성기관인 만주 대동학원 3기생으로 75년 일본 총리가 된 기시와 손잡고 한일 간 인맥을 형성한 황종률도 같은 묘역에 안장되어 있다.
1937년 일제와 야합해 불교계에 중앙통제기관을 설립하면서 종권을 장악한 친일승려 이종욱은 조선불교회 비행기를 헌납하는 적극적인 친일행각을 펼쳤다. 하지만 그도 건국훈장 국민장을 받고 애국지사 신분으로 1978년 서울국립현충원에 안장됐다. 그는 일본을 위해 전 조선의 사찰에서 ‘국위선양 무운장구 기원제’를 지내도록 하고 국방헌금과 위문금을 거둬 일제당국에 바쳤으며 다수의 친일시사문을 발표한 인물이다.
당시를 주름잡던 엘리트들도 있다. 일본 규슈제대 출신으로 고등문관시험 행정과에 합격해 조선총독부 관리를 지낸 엄민영은 국가유공자 신분으로 1969년 서울국립현충원에 안장됐다.
한국인 최초로 일본고등문관시험에 합격, 조선총독부 판사 등을 역임한 조진만은 1979년 서울국립현충원에 안장됐다. 경성제대 출신으로 일본 고등문과 행정과에 합격, 일본 홋카이도 도청에서 농무과장을 지낸 진의종 전 국무총리는 1995년 국가유공자 신분으로 서울 현충원에 안장됐다. 특히 일제의 관리로서 부일에 협력했던 그는 한국 독립 운동사에 큰 획을 그은 안중근 의사를 기리는 사업추진위원회 고문을 맡아 구설에 오르기도 했다. 도쿄제대 상대 출신으로 조선은행에 근무한 백두진 전 국무총리도 1993년 서울 현충원에 안장되어 있다.
조선독립신문 사장을 역임한 윤익선도 건국훈장독립장을 받고 1970년 서울 현충원에 안장됐다. 친일문학가 단체인 조선문인협회 간사로 활동했으며, 창씨개명해 일제의 신체제문학에 적극적으로 협력한 박영희도 애국지사 신분으로 대전현충원에 안장되어 있다.
위에서 언급한 인물들은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된 인물들이다. 하지만 친일명단 규정에는 신중을 기해야 한다는 지적도 있다. 일각에서는 당시의 시대적 상황을 고려하면 자의적인 친일을 한 사람은 찾기 어렵다는 주장도 있다. 또 일제강점기 때 단지 관료의 자리에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친일파로 규정해서는 안된다는 목소리도 없지 않다.
이 문제에 대해 가장 민감한 반응을 보이는 이들은 당연히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된 인사들의 후손들이다. 실제로 민족문제연구소 측이 친일명단을 발표했을 당시 선친의 친일행각에 대해 인정하고 사과하는 후손들도 있었지만 일부는 강력히 반발, 줄소송을 예고하기도 했다.
이에 민족문제연구소는 최종 수록예정자 명단을 밝히면서 다음과 같이 인명사전에 수록하게 된 객관적인 잣대를 제시한 바 있다. 연구소 측은 우선 ‘을사늑약 전후부터 1945년 8월 15일 광복에 이르기까지 일본제국주의의 국권침탈 식민통치 침략전쟁에 적극 협력함으로써 우리 민족 또는 타 민족에게 신체적 물리적 정신적으로 직·간접적 피해를 끼친 자’로 친일파를 규정했다. 또 수록대상자의 범주는 조약 체결 등 매국 행위에 직접 가담한 민족반역자와 식민통치기구의 일원으로서 식민지배의 하수인이 된 자, 식민통치와 침략전쟁을 미화 선전한 지식인 문화예술인과 같은 부일협력자의 두 가지로 구분했다.
이 중 민족반역자는 전부를, 부일협력자는 일정한 직위 이상인 자를, 그 외 정치적 사회적 책임을 물어야 할 친일행위가 뚜렷한 자를 수록대상으로 선정했다고 말했다. 민족문제연구소가 밝힌 선정의 원칙은 자발성과 적극성, 반복성, 중복성, 지속성 여부다.
하지만 친일행적이 문제가 되어 국립현충원에서 이장한 인물은 일제시대 언론인이었던 서춘 단 한 명뿐이다. 서춘은 1919년 동경 유학생 독립선언에 참가한 공로로 애국지사 서훈을 받아 89년 국립현충원에 안장됐지만 조성총독부의 기관지인 매일신보사 주필을 지내는 등의 친일 행각이 드러나 96년 서훈이 취소됐다.
친일인사들이 국립묘지를 꿰차고 있는 이유는 광복 이후 그들이 세운 공적 때문이라는 것이 국가보훈처의 설명이다. 하지만 이는 일제에 항거하다 옥고까지 치른 조동호 김시현 장재성 등 독립투사들이 한때의 좌익운동경력 때문에 독립유공자 명단에서 배제된 것과 비교해보면 이중적인 잣대가 아닐 수 없다.
그렇다면 친일파명단에 등재된 이들의 묘를 이장할 수는 없는 것일까. 민족문제연구소 방학진 사무국장은 “나라를 위해 몸을 바친 애국지사들이 묻혀있는 국립묘지에 친일인사들이 안장되어 있는 것은 분명 그냥 넘길 일이 아니며 반드시 바로잡아야 한다. 그러나 현재의 법으로는 이장을 강제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유가족이나 후손들이 양심껏 알아서 이장하는 방법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다”고 말했다.
이는 국방부가 민족문제연구소 측에 전달한 회신문을 통해서도 확인된다. 국방부는 “‘김창룡의 묘’를 다른 곳으로 이장하는 문제는 국립묘지령 제3조에 따라 안장된 자는 같은 령 제15조에 의거 피안장자의 유가족으로부터 이장요청이 있어야 국립묘지 이외의 장소로 이장이 가능하다”고 답변했다. 그러나 많은 독립유공자들의 후손들과 시민단체 관계자들은 “과거 한때의 친일행각을 거론해 후손들의 명예를 실추시키고자 하는 의도가 아니다. 항일선열들과 친일파가 같은 자리에 있는 것이 문제”라며 “언제까지 후손의 자발적 양심에 맡겨둘 수만은 없는 일”이라고 성토하고 있다.
평생을 항일독립투쟁과 민족주의적 삶으로 일관해온 백강 조경환 선생이 지난 1993년 별세하면서 “독립유공자로 둔갑한 친일파가 묻혀있는 국립현충원에는 절대 가지 않겠다”는 유언을 남겼다는 사실은 많은 것을 시사해준다.
이수향 기자 lsh7@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