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칼로 물 베기’ 이상득 의원이 지난 3일 참석한 최고중진연석회의에서 현실 정치에 더 이상 개입하지 않겠다는 의견을 밝히고 있다. | ||
한나라당 내에서는 이 의원의 ‘용퇴’ 배경에 대해 갖가지 의견이 분분하다. 특히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이후 당 쇄신특위 등에서 불거진 ‘용퇴론’이 가장 직접적인 이유로 꼽힌다. 이 의원의 정치적 입지가 예전만 못하다는 것도 용퇴의 배경으로 지목된다. 이 의원은 지난 4·29 재보선에서 자신의 측근인 정종복 전 의원이 친박 측 무소속 후보였던 정수성 의원에게 패배한 데다 이어진 원내대표 경선에서 ‘보이지 않는 손’ 논란에 휘말리면서 정치력에 적지 않은 타격을 입었다. 이와 관련 일각에서 최근 청와대를 중심으로 진행된 것으로 알려진 ‘형님과의 선긋기’ 작업도 그가 용퇴를 하게 된 주요 원인이 됐다는 분석도 나오고 있다. 이명박 정부 최고 실세로 위세를 떨쳤던 ‘형님’의 2선 후퇴 내막을 살펴봤다.
이명박 대통령 취임 이후 정치권에서는 ‘만사형통(萬事兄通)’이란 말이 우스갯소리로 나돈 적이 있다. ‘모든 것은 형님을 통해서 이뤄진다’는 뜻의 이 말은 이 대통령의 형인 이상득 한나라당 의원이 각종 정치 현안에 지나치게 개입하는 것을 빗댄 표현이었다. 한때 정치권에서 농담처럼 주고받던 이 말은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기정사실화하는 모양새를 띠었다.
특히 이 의원은 사실 여부와 관계없이 인사문제에 있어서는 항상 배후로 언급됐다. 이로 인해 대통령의 고유권한인 인사권을 마치 대통령의 형이 쥐고 흔드는 듯한 인상을 줬다. 물론 이 의원은 줄곧 억울함을 호소했다. 하지만 언론은 이런 논란들을 현 정권을 해석하는 하나의 ‘정치적 프레임’으로 고착화시켰다.
국민들은 피로감을 느꼈고 이는 곧 대통령에게 정치적 부담이 됐다. 그리고 집권 2년차를 맞은 시점에서 반드시 해결해야 할 숙제가 됐다.
여기에 박연차 게이트는 이 대통령으로 하여금 자신의 친인척 및 측근들을 둘러보는 계기가 됐다. 한편으론 박 회장에 대한 검찰 수사는 형과의 관계를 재설정하는 단초를 제공했다고 볼 수 있다. 지금처럼 ‘이상득’이라는 ‘비공식 권력’이 자꾸 부각되면 몇 년 뒤 그가 노건평 씨처럼 되지말라는 보장이 없기 때문이다.
이 때문일까. 이 대통령은 얼마전 친인척 관리 강화를 민정실 쪽에 주문했다. 이에 따라 민정실도 경찰의 협조를 받아 업무를 강화했다. 청와대 한 관계자는 “이 의원 역시 갖가지 구설수에 단골로 등장하고 있었기 때문에 노건평 씨 사건을 ‘반면교사’로 삼아 친인척 관리에 더욱 심혈을 기울일 필요성을 느꼈다”고 말했다.
▲ 박영준 국무차장. | ||
이때만 해도 박연차 게이트에 대한 수사가 아직 초기 단계에 있을 때였다. 하지만 검찰 수사가 중반으로 접어들면서 상황은 묘하게 흘러갔다. 최종 타깃이었던 노 전 대통령에 대한 수사가 앞당겨진 반면 전·현직 정치인들에 대한 수사는 뒤로 늦춰졌다.
전직 대통령까지 소환 조사를 한 마당에 여권 정치인들을 대충 수사할 수는 없는 일. 이때의 검찰 수사는 ‘브레이크 없는 폭주기관차’나 다름없었다. 한상률 전 국세청장이 이명박 대통령에게 직보했다는 이른바 ‘한상률 리스트’에 정치권과 언론의 눈과 귀가 쏠렸다. 여권 핵심 실세가 빠졌다는 말도 나왔다.
검찰 주변에서는 ‘검찰수사가 이제는 외부에서 통제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다’라는 얘기가 나오기 시작했다. 특히 노 전 대통령이 서거로 검찰 수사가 종료되기 직전까지만 해도 “10월에 임기 만료를 앞두고 있는 임채진 전 검찰총장이 자리에 연연하지 않고 수사를 진두지휘했다”는 것이 검찰 관계자의 설명이었다.
상황이 이렇게 흘러가면서 최근 이명박 대통령은 정무라인을 통해 다시 한 번 친인척 및 측근들의 ‘먼지털기(?)’에 나섰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 대상은 이 의원을 비롯한 측근 정치인들. 박영준 총리실 국무차장과 또 다른 여권 실세 2명도 여기에 포함돼 있었다고 한다. 조사의 주요 목적은 이들이 박연차 회장이나 천신일 회장 등과 수상한 금전거래를 한 사실은 없었는지를 확인하는 것. 또한 여기에는 대선자금과 관련한 내용도 포함되어 있었다고 한다.
이미 전 정권에서도 대통령의 측근이었던 안희정, 최도술 씨가 대통령도 몰랐던 대선자금을 기업으로부터 받은 사실이 드러나 정권 초반 정국 운영권이 흔들렸던 전례가 있었던 것처럼 ‘천신일 회장 자금을 빌미로 대선자금을 수사해야 한다’는 야당의 주장이 탄력을 받아 검찰 수사가 걷잡을 수 없이 확대될 경우에 대비하기 위함이었다고 한다. 당시 민주당 내부에서도 특검 도입 주장이 솔솔 흘러나오던 때다.
그러나 그는 이 대통령과 이 의원의 관계가 정권 초반과 달라진 것은 부인하지 않았다. 정치권의 시각도 이와 다르지 않다. 대통령과 형의 관계를 고려했을 때 조사했다는 사실 자체가 가지는 의미가 크다는 것이다.
한나라당의 한 관계자는 “이런 조사가 사실이라면 방점은 (박 회장 혹은 천 회장과 측근들의) 금전거래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 의원을 조사했다는 것에 찍어야 한다”고 말했다. 이 대통령과 이 의원 사이의 신뢰 문제에 미묘한 파장이 일고 있다는 해석이다. 그는 “최근 들어 정치권에서 이상득 의원 주일대사설이 흘러나온 것도 같은 맥락일 것 같다”고 덧붙였다.
한나라당의 또 다른 관계자는 “이 대통령도 이 부분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따라서 이 대통령이 이 의원뿐만 아니라 박 차장까지 조사했다면 권력구도에 중대한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 사안”이라며 “이 대통령이 형님에 대해 거리를 두기 위한 수순일 가능성도 있다”고 설명했다.
이 대통령이 정무라인을 통해 이 의원 및 측근들을 조사했다는 것에 대해 청와대 또 다른 관계자는 “대통령이 정무라인을 통해 은밀히 조사했다면 확인하기가 어렵다”고 말했다.
이 의원의 용퇴 이전까지 국민들은 사실 여부를 떠나서 ‘형님정치’로 요약되는 부적절한 정치현상에 큰 거부감을 보였다. 그리고 이것이 이 대통령뿐만 아니라 현 정권에 대한 지지도를 갉아먹고 있는 것도 부인할 수 없었다.
분명한 것은 이 대통령은 취임 후 계속된 ‘만사형통’ 논란을 이제는 잠재워야 할 시점이라고 판단했던 것으로 보인다. 비공식라인을 통해 은밀히 조사를 진행한 것도 이와 같은 결단의 표현으로 볼 수 있다. 조문정국이 펼쳐지면서 ‘형님’이 먼저 2선으로 물러날 것을 밝혔지만 사실은 이 대통령도 일종의 선긋기를 해온 셈이다. 그런 점에서 형님의 ‘용퇴’도 ‘단독플레이’라기보다는 ‘사인’을 받고 내린 결단이라는 시각도 있다. 물론 이 의원은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청와대와의 교감은 없었다고 밝히고 있다.
아무튼 말 많던 이상득 의원은 이제 2선으로 물러났고 이후 청와대는 ‘이것으로 됐다’는 듯이 개각 등 추가적인 조치는 없을 것이라는 입장을 밝히고 있다. 김경한 법무장관 교체론에 대해서도 청와대는 “김 장관이 사의를 표명했지만 반려됐다”고 정리한 바 있다.
그러나 민심은 간단치 않다. 이 대통령의 지지율은 최근 곤두박질을 치고 있고 대학교수들의 시국선언은 요원의 불길처럼 번져가고 있다. 민심은 형님의 2선 후퇴만으론 만족할 수 없다며 대통령의 더 큰 결단을 촉구하는 분위기다.
박혁진 기자 phj@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