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당경찰서의 중간 수사 발표 이후 여론과 매스컴은 끊임없이 경찰을 질타했다. 경찰의 ‘수사 일단 중지’ 선언이 경찰의 수사 의지 없음으로 풀이되곤 했다. 그렇지만 경찰이 놀면서 기다리기만 한 것은 아니다. 막상 김 씨가 귀국했는데 혐의를 입증하지 못할 경우 경찰은 매우 곤란한 처지에 놓이게 된다. 그렇지 않아도 ‘수사 의지가 없는 부실수사’라는 오명을 쓰고 있는 상황에서 시민단체들은 ‘고 장자연 특검’까지 입법 청원했다. 이렇게 경찰을 향한 비판이 집중돼 있는 상황에서 만약 경찰이 김 씨가 귀국한 뒤 혐의를 입증하지 못할 경우 엄청난 여론의 질타가 뒤따를 수밖에 없다.
이번 수사가 유난히 어려운 까닭은 문건을 작성한 장자연이 이미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피해자가 없는 상황에서 경찰이 피의자의 혐의를 입증해야 하는 것. 술자리나 성상납 강요의 경우 증거도 찾아내기 어려운 사안이다. 교도통신에 따르면 김 씨는 일본에서 검거된 뒤 “장자연 자살 원인은 성 접대가 아니다”며 혐의를 부인하고 있다고 한다.
MBC <뉴스후>는 일본 현지 취재를 통해 김 씨의 행적을 추적한 내용을 보도하며 경찰의 수사 의지를 질타하기도 했다. 하지만 일본에서도 취재가 가능한 한국 매스컴과 일본에서 수사권이 없는 한국 경찰의 차이를 감안해야 한다.
결국 경찰은 한국에서 수사를 진행해야만 했고 수사력은 김 씨가 귀국한 뒤의 상황에 집중됐다. 현재 김 씨는 강요 협박 폭행 횡령 등의 혐의로 기소중지 돼 체포영장이 발부된 상황이다. 특히 술자리 및 성상납 강요 관련 부분이 수사의 핵심이다.
분당경찰서 관계자는 “다른 부분 혐의가 입증돼도 강요 부분 혐의가 입증되지 못하면 부실 수사라는 오명을 뒤집어쓰게 될 것”이라며 “이 부분은 고인이 세상을 떠나 수사에 어려움이 예상된다”고 얘기한다.
따라서 경찰은 김 씨의 사업 내용과 인맥에 대한 폭넓은 내사를 진행해왔다. 이 과정에서 경찰의 수사 대상도 넓어졌다. 중간 수사 발표 당시 언급된 13명(김 씨 포함) 외에도 김 씨와 연관된 인물들 가운데 혐의가 포착된 이들에 대한 내사를 진행해온 것. 전 정권 실세 A 씨를 비롯한 김 씨의 정재계 인맥을 비롯해 김 씨와 업무적 혹은 개인적으로 친하게 지낸 연예관계자와 언론계 인사에 대한 첩보를 수집해왔다.
이렇게 소위 ‘김 대표 리스트’가 만들어진 것이다. ‘김 대표 리스트’를 통한 수사 확대에 대해 분당경찰서 한풍현 경찰서장은 “아직 확실치 않지만 수사 계획이 있다”고 밝혀 내사 과정에서 일정 부분 수사 성과가 있었음을 인정했다.
김 씨 검거 과정에도 이런 경찰의 수사가 큰 힘이 됐다. 김 씨 주변 인사들에 대한 내사가 진행되면서 일본을 오가며 불법체류자 신분인 김 씨를 돕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지인을 파악해 그 정보를 일본 경시청에 넘긴 것. 결국 김 씨는 지인을 만나러 가는 길에 체포됐다.
김 씨가 일본에서 강제 추방 등의 형식으로 귀국하게 되면 곧장 경찰에 체포된다. 현재 경찰은 체포영장과 사전구속영장 등을 청구해 놓은 상황이다. 게다가 별도의 사건으로 지명수배까지 내려져 있는 터라 귀국과 동시에 구속 수사가 진행될 가능성이 크다. 경찰이 다소 유리한 상황에서 수사를 진행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는 데 성공한 것. 경기경찰청 이명균 강력계장은 “새로운 사실이 드러나면 수사 인력을 늘리는 것은 기본”이라며 경기지방경찰청 차원에서 수사 인원을 증원할 계획임을 밝혔다.
그렇지만 김 씨 역시 만반의 준비를 마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사실 김 씨가 일본으로 떠난 까닭은 장자연의 자살 때문이 아니었다. 지난해 11월 남성 모델 B 씨는 김 씨의 사무실에서 만취 상태에서 강제 추행을 당했다며 종로경찰서에 김 씨를 고소한 바 있다. 경찰의 거듭되는 출석 요구를 묵살한 채 김 씨가 일본으로 향하자 경찰은 기소중지한 상황에서 사건을 서울중앙지검으로 송치하고 김 씨를 지명 수배했다.
이로써 경찰은 우선 강제 추행 사건으로 김 씨를 구속한 뒤 장자연 문건과 관련된 수사를 진행할 수 있게 됐다. 그런데 김 씨가 일본에 체류하고 있는 과정에서 모델 B 씨는 김 씨의 인척을 통해 합의를 본 뒤 고소를 취하했다.
경찰은 강제추행치상죄는 합의를 했다고 하더라도 처벌이 불가피하다는 입장을 보이며 김 씨가 일본에서 검거된 다음 날인 지난 25일 B 씨를 불러 사건 경위를 재확인했다. 강제추행죄의 경우 친고죄로 합의가 이뤄져 고소를 취하하면 검찰의 공소권이 사라지지만 강제추행치상죄는 친고죄가 아니다. 그렇지만 강제추행치상죄의 경우에도 합의를 통해 고소가 취하되면 비교적 가벼운 사법처벌을 받는 선에서 사건이 마무리될 공산이 크다. 다시 말해 구속수사가 이뤄질 사안은 아니라는 얘기.
결국 강제추행치상죄를 통해 구속 수사가 가능한 상황을 만들어 놓고 고 장자연 문건과 관련된 깊이 있는 수사를 진행하려 했던 경찰의 의도가 조금씩 빗나가기 시작한 것이다.
물론 일본으로 도피해 불법체류자 신분으로 지내다 강제 구인되는 만큼 도주와 증거인멸 가능성이 높아 법원이 구속 영장을 발부할 것으로 보인다. 그렇지만 김 씨가 유력 변호사들을 법정대리인으로 내세울 경우 상황은 달라질 수 있다. 고 장자연 문건 파문 수사의 경우 의혹은 많지만 구체적인 혐의가 드러나지 않을 경우 구속 수사에 어려움이 커지기 마련이다.
장자연이 세상을 떠난 지 벌써 넉 달여가 지났다. 그동안 일본에서 지내온 김 씨는 국내에 있는 지인들의 도움을 받으며 일본에서 충분한 준비의 시간을 가졌다. 매스컴을 통해 경찰 수사 상황을 체크하며 자신에게 집중된 혐의점을 충분히 인지하며 대비한 것. 김 씨는 일본 경시청 형사들에게 검거될 당시 별다른 저항도 하지 않았으며 “빨리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얘기를 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는 김 씨가 이미 경찰 수사에 대한 준비를 끝마쳤기 때문으로 풀이되기도 한다.
이 과정에서 김 씨는 이미 가장 큰 걸림돌이었던 강제추행치상죄 부분을 피해자와 합의해 고소가 취하되도록 만들어 놓았다. 수사 초기부터 ‘보이지 않는 손’이 수사를 방해하고 있다는 의혹이 제기돼 왔는데 그 ‘보이지 않는 손’이 은밀히 김 씨의 일본 체류와 수사 대비까지 도왔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결국 경찰의 수사 역시 문제의 ‘보이지 않는 손’이 존재할 경우 김 씨 뿐 아니라 그들의 혐의까지 잡아내는 것이다. 그런데 경찰은 본격적인 수사를 시작도 하기 전에 강제추행치상죄 고소 취하라는 카운터 펀치를 한 방 맞고 말았다.
경찰 내부에서도 수사가 상당히 어렵게 진행될 것이라는 목소리가 흘러나오고 있다. 취재 과정에서 접촉한 한 경찰 관계자는 “피해자가 이미 세상을 떠난 상황에서 피해자가 강제로 술자리에 끌려 나오고 성상납까지 했다는 혐의를 입증하는 데는 한계가 보인다”면서 “지난 2002년에는 성상납 관련 수사를 진행하던 부장판사가 인사 상의 불이익까지 받으며 수사를 중단해야 했을 만큼 비호세력의 힘도 간과할 수 없다”고 설명했다.
다양한 악재로 이미지가 크게 훼손된 경찰 입장에선 고 장자연 문건 수사가 이미지 쇄신에 커다란 기회가 될 수 있지만 그 반대의 경우 치명타를 입을 수밖에 없다. 경찰과 김 씨와의 물러설 수 없는 한판 승부가 임박했다.
신민섭 기자 leady@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