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2년 최규선게이트 관련 영장 실질심사를 받은 김희완 전 부시장. | ||
기자는 최근 김 전 부시장의 한 지인으로부터 ‘김 전 부시장이 지난 4월 교도소 안에서 목을 매 자살을 시도했다가 미수로 끝났고, 이후 상태가 위독해 건국대병원에 오랫동안 입원했다’는 말을 전해 들었다.
확인 결과 김 전 부시장은 교도소에 수감 중이던 지난 4월 중순 지병을 이유로 형집행정지를 받았고 3개월간의 1차 정지 기간이 끝난 지난 7월, 기간을 연장해 또 한번 형집행정지를 받은 것으로 나타났다. 건대병원 측에 확인한 결과 김 전 부시장은 몇 개월간 입원 후 지난 8월 말 병원을 퇴원한 것으로 드러났다.
하지만 법무부 교정국 측은 이 같은 사실을 확인해 줄 수 없다는 입장을 밝혔다. 법무부 측은 언론에 이 사실이 알려지지 않도록 보안에 각별한 신경을 쓰고 있는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현재 김 전 부시장은 교도소로 들어가지 않았으며 어디에 머물고 있는지 정확히 알려지지 않고 있다. 한 지인은 삼성병원으로 옮겨갔다고 전했으나 이도 확인되지 않았다.
정부 기관이나 병원 측에서는 김 전 부사장의 병명을 밝히지 않고 있으나 얼마 전 그를 면회했다는 한 지인은 “김 전 부시장이 교도소 안에서 여러 가지 심적 고통으로 괴로워하다 자살을 시도한 것으로 알고 있다”고 전했다. 김 전 부시장은 한때 거동도 못하고 언어 장애까지 올 정도로 상태가 악화됐으나 최근 호전된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자살 전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며 남겨놓은 유서도 작성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과연 김 전 부시장을 ‘자살 기도’란 막다란 골목으로 몰아넣었던 심적 고통은 무엇이었을까. 이를 알기 위해서는 그가 정치에 입문하던 87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경기도 이천 출신인 김 전 부시장은 연세대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한 후 미국으로 건너가 하버드대 국제정치학과를 졸업한 촉망받는 엘리트였다. 귀국 후 중앙일보사에 근무하다 31세의 젊은 나이에 정계에 입문했다.
그가 정계에 입문하게 된 것은 같은 회사 기자 출신인 홍사덕 의원 때문이었다. 그는 홍 의원 밑으로 들어가 정계에 진출한 후 신민당 이민우 총재 공보비서로 일했다. 그러다 87년 이 총재가 정계은퇴를 선언하자 김영삼 전 대통령 캠프에 합류해 연설문 작성 등 공보업무를 맡았다. 당시 정치권에서는 하버드대학 국제정치학과 출신인 엘리트를 찾기가 쉽지 않았다. 특히 그는 뛰어난 업무 처리 능력과 정치적 식견, ‘주군’의 마음을 정확히 읽어내는 통찰력을 겸비하고 있어서 당시 정치인들 사이에서는 ‘나에게도 저런 보좌관 하나쯤 있었으면…’ 하는 말이 오갈 정도였다. 이때 그의 나이는 불과 30대 초반이었다. 정치인으로서 그의 인생은 탄탄대로를 달릴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의 ‘순항’은 여기까지였다.
그는 90년 3당 합당 당시 “바른 길이 아니면 가지 않겠다”며 합당에 반대하면서 김영삼 전 대통령과 연을 끊었다. 고난의 시작이었다. 그는 야당인 국민회의에 입당해 14, 15대 총선에 도전했으나 잇따라 낙선의 쓴잔을 들이켜야 했다. 여기까지는 노무현 전 대통령과 비슷한 길을 걸었다. 하지만 이후 두 사람은 전혀 다른 길을 걸었다.
▲ 99년 5월 당시 서울 송파갑 재보궐 선거에 출마한 김희완 후보가 거리 유세를 하고 있는 장면. | ||
결국 그는 자신을 처음 정치권으로 끌어들인 홍사덕 의원의 권유로 2000년 2월 12일 한나라당에 입당하게 된다. 당시 그는 과거의 적이었던 이 총재에게 “보궐선거 과정에서 이 총재의 원칙주의와 인간미를 알게 돼 입당했다”며 고개를 숙였다. 그러나 기대했던 전국구 순번에서 당선권 밖으로 밀리자 그는 다시 한나라당을 떠났다.
김 전 부시장은 2000년 6월경 동교동계의 좌장격인 권노갑 전 민주당 고문의 핵심 참모로 들어가면서 다시 한 번 재기를 꿈꿨다. 그러나 그의 선택은 결과적으로 더 큰 ‘화’를 불러왔다. 그는 권 전 고문 밑에 있으면서 ‘최규선 게이트’의 주역인 최규선 씨를 만났고, 권 전 고문의 소개로 김대중 전 대통령의 삼남 홍걸 씨를 알게 됐다. 김 전 부시장이 권 전 고문 밑으로 들어갈 무렵 최 씨도 권 전 고문의 비서로 들어왔다.
권 전 고문의 비서로 만나게 된 김 전 부시장과 최 씨는 이후 의기투합해 ‘비즈니스’에 함께 참여하게 된다. 최 씨는 홍걸 씨를 등에 업고 체육복표 사업 등 각종 이권에 개입한 사실이 드러나 결국 검찰에 구속됐고, 이 과정에서 김 전 부시장이 최 씨와 복표사업자였던 ‘타이거풀스’ 송재빈 대표를 소개해 준 사실이 수사결과 드러났다. 김 전 부시장 역시 불법 로비를 한 혐의로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 추징금 8000만 원을 선고받았다.
홍걸 씨가 개입됐던 이 사건은 김대중 정권 말 ‘레임덕’을 불러오는 직접적인 원인이 됐던 이른바 ‘최규선 게이트’였다. 김 전 부시장은 이 사건의 핵심 인물로 조명을 받았고 언론은 ‘김희완’이란 인물을 낱낱이 해부하기에 이른다.
김 전 부시장의 능력을 보고 그를 끌어들인 모든 정치인들은 항상 그에게 ‘장밋빛 미래’를 약속했으나 그가 받아든 것은 모두 공수표였고, 결국 그에게 남은 것은 ‘철새 정치인’이라는 낙인과 범죄자라는 오명뿐이었다.
김 전 부시장의 추락은 이것이 끝이 아니었다. 그는 집행유예 기간이었던 지난 2004년 12월경 고등학교 선배 소개로 제이유그룹 주수도 회장을 만나게 된다. 그는 제이유가 국세청에 낸 ‘과세 전 적부심사’ 청구가 수용될 수 있도록 도와달라는 청탁을 받고 3억 원을 받은 사실이 검찰 수사 결과 드러나 올 3월 대법원에서 징역 2년과 추징금 3억 원을 선고받았다.
김 전 부시장은 재판 과정에서 줄곧 ‘3억 원은 로비대가가 아닌 투자금 명목으로 받은 것’이라며 억울함을 호소했지만 법원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또한 최근에는 김 전 부시장이 제이유 재판 과정에서 ‘무죄를 받게 해달라’며 전직 검찰수사관 이 아무개 씨에게 수천만 원을 건넨 사실이 검찰 수사에서 드러나기도 했다. 이 수사관은 최근 국회 아무개 전문위원으로부터 금품을 수수한 사실이 드러나 구속됐다. 김 전 부시장은 ‘자신이 먼저 이 수사관에게 접근한 것이 아니라 이 수사관이 자신이 억울함을 호소하고 있다는 점을 악용해 아무개 대법관에게 로비를 해주겠다고 접근해 돈을 받아갔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지인들에 따르면 김 씨는 정치입문 후 낙선과 탈당, 게이트 연루 등의 과정을 거치면서 촉망받는 엘리트 기자에서 철새 정치인, 브로커 등으로 추락한 자신의 인생에 대해 깊은 회의를 느꼈다고 한다. 또한 무언가 다시 시작해보려면 새로운 사건들이 불거져 자신의 발목을 잡는다며 깊은 절망감을 보이기도 했다고 한다.
여기에 본인이 깊은 수렁에 빠져있는 동안 아내는 심한 우울증에 빠졌고 자식도 방황하게 됐다. 지인들은 정상적으로 생활하지 못하는 아내와 자식 문제도 김 전 부시장이 극단적인 생각을 품은 요인으로 작용했을 것이라고 보고 있다.
김 전 부시장은 부시장에서 물러난 뒤인 지난 99년 2월 <전직 대통령이 죽는 날 우리도 눈물을 흘릴 수 있을까?>라는 에세이집을 냈었다. 한국의 역대 대통령이 예외 없이 비리 의혹으로 초라한 말년을 보내는 대목을 안타까워하며 쓴 책이었다. 자의든 타의든 그 역시 여러 비리에 연루되어 철장 신세를 지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됐고, 이것이 그를 더 깊은 수렁으로 몰아넣고 있는 것 같아 씁쓸함을 더 해주고 있다.
박혁진 기자 phj@ilyo.co.kr